103화
두 여인은 함께 공작저를 나섰다. 뒤에서는 로제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나를 따라 외출하겠다는 그녀의 말을 들은 로제는 대번에 좋지 않은 예감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다급히 사샤의 팔을 붙잡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나는 우할린 숲으로 가. 걱정하지 마. 나는 그곳에 가도 위험하지 않으니까. 카일러가 돌아오기 전, 돌아올게.”
사샤의 그 말이 지키기 어려운 약속이라는 것은 로제도 알았지만 적어도 위험하지 않다는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는 듯했다. 올곧게 흔들리지 않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았는지 로제는 물러나 주었다.
그렇게 사샤는 엘리나와 함께 길을 나서게 되었다. 함께 타는 것은 엘리나가 타고 온 마차였지만 그 뒤로 이그노트의 마차로 함께 따랐다. 그것을 로제의 마지막 고집이었다.
“대신 공작님께서 돌아오시면 말씀드릴 겁니다. 이베른의 영애님이 이곳으로 와서, 사샤 님을 모시고 우할린 숲으로 갔다고요.”
로제는 마차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사샤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사샤만이 아닌 옆에 서 있는 엘리나에게도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휙 몸을 돌린 엘리나가 그녀를 째려보았으나 관록의 하녀장 로제는 철없는 아가씨의 눈빛에 쫄아 버릴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은 오롯이 사샤에게로 향해 있었다.
“기사라도 한 명…….”
“카일러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다 위험해질 뿐이야. 괜찮아.”
“자꾸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무슨 죽을 자리 보러 가는 줄 알아?”
그녀들이 자꾸 태평한 얼굴들로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마음이 자꾸 불안해지는 것은 엘리나였다.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거기에 동요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씨, 이게 아닌데……. 엘리나는 뿌루퉁해서는 먼저 마차에 올랐다.
사샤는 걱정 말라는 듯한 기색을 남기고는 자신의 양손을 주먹을 꼭 쥐었다 폈다. 긴장은 날려 버리고 엘리나가 타고 있는 마차 위로 올랐다.
마차는 적당한 소음과 적당한 흔들림을 만들며, 자꾸 생각에 잠기려는 사샤의 머릿속에 문득문득 마차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사샤는 괜히 어색해지는 것도 귀찮아서 아예 창밖을 보며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앞에 앉아서 불편함에 몸을 어떻게 할 줄 모르는 아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 아이를 따라 나섰던 것은 바로 이베른 때문이었다.
지금의 사샤는 전혀 기억도 못 하는 기간이지만, 그럼에도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애초에 없었으니까, 원래 내 아빠였을 사람은 사랑을 주고 싶어도 못 줘서 이렇게 된 것일 뿐이었지만 본래 여기 살던 사샤는 달랐다. 바로 아래층에 아빠가 있음에도…… 자신만큼이나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사람의 존재감을 느끼면서 혼자 처박혀 있는 것과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 혼자만 남아 버리는 것, 어느 것이 더 힘든 것일까. 애초에 그런 걸 비교하고 있는다는 게…… 슬픈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단지…… 그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는 것인지.
그 답을…… 얻으러 가는 길.
우할린 숲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멀어졌나 싶었다. 목적지가 분명하니 일부러 빙빙 돌 필요는 없겠고.
“우할린 숲으로 가는 것은 맞아?”
“그, 그럼! 알아서 가고 있잖아. 좀 있으면 도착하겠지.”
엘리나는 갑자기 무심하게 툭 던져진 질문에 차분하게 답할 새도 없이 화들짝 놀라 버럭 소리를 내 대답해 버렸다. 엘리나는 마차를 타고 달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만 같았다.
마차는 카일러와 올 때마다 멈추어 서던 커다란 입구 대신 다른 입구 앞에 세워졌다. 마부의 에스코트로 마차에서 두 영애가 내려 주변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숲의 모양이나 주변 환경을 스스슥 둘러보았을 때 들어가면 위험한 곳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우할린은 우할린이구나.”
마차에서 내린 사샤는 주변을 훑어보며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리고 그녀보다 먼저 내려서 주변의 모습을 보고 기운이 묘한 것을 느낀 엘리나가 불안하게 눈동자를 떨더니 그녀의 말에 파드득 화를 냈다.
“그럼 여기가 우할린 숲이 아니면 뭔데!”
버럭 소리 지르는 그녀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기분 나쁜 긴장이 흐르는 숲의 입구는 음침하기 그지없었다. 그 기운에 눌려 저렇게 날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럼 얘기해 볼까? 여기서 뭔가가 나타날 때까지 나와 함께 있는 거니, 아니면 내가 여기 도착했다는 걸 누군가에게 알려야 하니? 아니면…… 내가 자기 거라고 생각하는 아버지가 여기에 나타나기라도 하신다니?”
어느 것 하나 대답하지 못한 채 미리 보고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이베른을 만나는 것이었다.
이렇게 바라만 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어서 안내해. 아까 들었다시피 나는 이 볼일을 얼른 끝내고 공작저로 돌아가야 해.”
사샤는 이런 분위기와 음습함 사이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있다면 반바지 정도?
“기, 기다려. 아빠는 안에 계셔, 하지만 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 있어서 나는 필요 없다고 하셨어.”
당황하면서 황급히 발뺌하는 그녀를 보자 사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내자의 역할, 여기까지가 끝인 모양이군.”
“그래, 나는 여기까지야. 너는 저 숲으로 들어가면 돼.”
엘리나는 숲 입구에까지 바짝 다가가 귀를 기울여 보다가 안쪽에서 울리고 사라지는 울음 같은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났다.
“좋아. 여기 있거나 가거나 그건 알아서 하도록 해.”
사샤는 덤덤하게 한 발 한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음습한 공기와 폐부로 들어오는 축축한 냄새까지 나서 제가 항상 가던 그 우할린과는 전혀 다른 곳인 것 같았다.
사샤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들어가기로 한 이상,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입구에 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엘리나의 표정이 어떨지 궁금하지 않았다.
안에는 정말 많이 어두웠다. 울창한 숲이라서 그런 건지, 하늘에도 나뭇잎이 그득해서 안이 어두워질 지경이었다.
자박자박 걷는 걸음 소리도 길이 조금 더 깊어지자 사라지기 시작했다. 촉촉한 발은 걸음을 피해 이끼가 나 있을 정도였다. 빽빽한 나무들과 하늘을 덮은 잎사귀들 사이에서 그랬다.
“이베른 후작?”
사샤는 조금 더 걷다가 멈춰 서선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사샤 이베른의 생물학적 친아버지가 딸을 분노로 대해 왔던 이유를 말해 주겠다는 것에서 사샤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알고 싶었다. 도대체가 어떻게 된 남자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이유가 있었기에 딸을 다락방에 올려 가두고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내가 가진 상식으로는 끝날 기미 없이 그걸 또 반복해서 떠올리고만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부름에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음습한 숲길은 계속해서 이어져 있었고 사샤도 그 길을 따라서 걸어갔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나 그건 원래 그런 거야, 하는 어쭙잖은 대답은 필요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이해도 아니었다. 물론 이해할 수 있으면 덜 속상하겠지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예를 들면 누군가의 압박이 있었다고 한들……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못 할 것 같았다.
아무리 누군가의 압력이 있었다 한들 여기까지 온 엘리나는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미 거기에서 나와 엘리나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에게 같은 딸이 아닌 것이었다.
“어디 있는 거예요, 사람을 불렀으면 정직하게 앞에 나와서 할 얘기 하고 들을 거 듣고 해냐 하는 거 아닌가요?”
이베른 후작은 고사하고 사람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오로지 들리는 소리라고는 자신이 폭신한 이끼 위를 밟고 지나가는 소리 정도였다.
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싶은 음습하고 무거운 공기가 흐르지도 않고 고여 있는 듯했다.
설명하러 오는 것은 맞는가.
생각해 보면, 이제 와서 그것을 제게 설명할 이유가 과연 있는가 하는 부분에서 의문점이 들었던 것이다. 이런 위험까지 감수해 가면서 저를 불렀다는 것은…… 내게서 뭔가 얻을 수 있는 게 있어서일까, 마물과의 소통…… 같은 것 말이다.
이베른이다. 그 후작은 관연 자신의 딸에게 무엇을 알려 주기 위래 이곳으로 왔을까……?
하지만 그 모습은 여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아…… 낚인 것인가.”
우아한 말투에 단어 선택의 괴리가 있었는데 그게 썩 거슬리지 않는 희한한 말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조금 더 걸어 들어가 보았다.
시간도 조금 더 흘렀다. 체감상 한참이나 지난 것 같은 그 자리에서 사샤는 카일러를 떠올렸다. 그가 많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그 모습이 상상이 되어 버려서 가슴이 아렸다.
그때였다. 바스락. 풀 밟는 소리가 났다.
너무 지척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느라 귀를 기울이자 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뭐지? 뭐지? 하고 집중하는 사이였다. 순식간의 그 기척이 가까워졌어도 눈 한번 깜빡 감았다 들어 올렸을 때 모든 이들이 탄성을 지를 것인가……!
그때, 눈은 감았다 떠오르는 순간 이미 시야에 그것이 들어와 있었다. 짙은 회색의 마른 나뭇가지를 연상시키는 그것은 정말 순식간에 다가와 있었다.
사샤는 숨을 멈추었다. 세 발자국, 그의 세 발자국이면 바로 부딪힐 만한 거리에 마물이 나타나고야 말았다.
“역시 나에게 뭘 해 줄 사람이 아니었어. 물질적인 것도 그러더니…… 심지어 말도 제대로 해 주지 않으려는 거구나…….”
사샤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마물을 바라보았다. 긴장감 흐르는 그 사이에서 사샤는 그렇게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