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사샤는 여유로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내 긴장을 숨기고 순간순간 올라오는 무언가의 화를 누르는 모습을 보면서 사샤는 처음 그녀의 방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살짝 긴장됐던 마음이 오히려 삭 풀렸다.
“그래서, 나를 찾아온 이유는 언제 들을 수 있지?”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는 사이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엘리나는 지금 자신의 기에 눌리고 있었다. 카일러와 함께하고 로제를 가까이에 두면서 제게 그들의 귀족적인 애티튜드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아마 기가 죽은 게 아닐까 싶었다. 차분하고 침착하게 대할수록 허세를 부리듯이 턱을 들던 그녀의 눈빛이 한순간 변했다.
호오, 어쩔 줄 모르고 긴장하고 긴장하는 자기를 깨달으며 자존심 상하기를 반복하더니 마음을 다잡은 모양이었다.
자, 이제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려고 왔는지 한번 들어 볼까?
“당연히 언니랑 여유롭게 차 마시러 온 건 아니고, 나랑 같이 나가자.”
뭘 그렇게 여유로운 얼굴로 말하려나 했더니. 이상한 말을 꺼낸다. 어딜 가겠다는 것인지, 제가 왜 가야 하는지 일언반구도 없이 그녀는 마치 저와 꼭 가게 될 거라는 듯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만만한 얼굴이구나. 사람을 데리고 나가려면 어디로 왜 가야 하는지 정도는 말해 줘야 하지 않겠니?”
그리고 타이르듯 말을 꺼내고 난 뒤에야, 사샤는 다물어지는 입술 끝에 씁쓸함을 느꼈다.
뭔가가 있구나.
그러한 생각이 핑, 하고 머릿속을 스친 것이다. 엘리나는 멍청한 아이였다. 하지만 멍청한 것과 달리 약은 아이였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서는 강한 떼를 부릴 줄 알고, 자신이 우위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눈치껏 찾아낼 줄 알았다.
카일러와의 일에 대해서는 상대방이 업신여기던 언니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한눈에 카일러에게 반해 버렸던 탓인지 눈이 좀 멀었던 것 같은 느낌이 있었지만 말이다.
아마 거기에 미디에나가 바람을 좀…… 아니 잔뜩 불어넣어 준 탓이 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느낌이 조금 달랐다. 아까까지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했더니 순식간에 자신감을 찾은 모습이라니, 허술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니까.
“우할린 숲으로 갈 거야.”
심지어 가야 한다는 장소가…….
“너와 함께 나갈 일도 없겠지만 그곳이라면 더더욱 갈 일이 없겠구나.”
사샤는 미소 한 방울 남기지 않은 채로 엘리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올곧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직선으로 내리꽂히자 엘리나는 살짝 움찔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른침 한 번 삼키고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넌 나랑 같이 가야 할 거야. 그 숲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지.”
엘리나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녀의 자신감의 원천이 도대체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숲에서 있었던 일을 이렇게나 당당하게…….
그리고 사샤는 꽤나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단련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영혼은 혼자서 세상을 살아남는 데에 있어서 눈치를 빠르게 키울 수밖에 없었고, 몸에 남아 있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락방에서 밤마다 내려오려 했다면 누구보다 빠른 눈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우할린 숲에서 일어난 일. 그때마다 항상 제 곁에 있었던 것은 카일러, 혹은 딜런이 다였기 때문에 아무도 이 일에 대해서 모를 거라 생각했던 것이 오산인 모양이었다.
엘리나가 말하는 ‘일’이란 바로 사샤가 마물을 마주친 일에 관한 것일 터다.
“흐응. 그래? 어째서? 내가 가고 싶지 않아 해야 정상인 거 아닌가?”
하지만 사샤는 말리지 않았다. 여유롭게 말한다면 이쪽도 그렇게 대응하면 된다. 뭔가 얻고 싶으면 내게도 내미는 것이 있어야지.
아무것도 없이 갈 수는 없었다. 카일러 없이 그 숲에 가는 것은 위험 요소가 많았다.
엘리나는 티 나지 않게 어금니를 악물었다 바로 힘을 풀었다. 쉽게 넘어오지 않을 것이야 당연했지만 이렇게나 여유롭게 받아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살짝 주춤했던 엘리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패를 지금 꺼내야 할지 조금 나중에 꺼낼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끓고 있었다.
“시간 끌지 말고 일어나. 안 가면…… 분명 후회할걸?”
뒤에 숨긴 것을 바로 꺼내 보이지 않는 엘리나의 속내는 훤히 보였다. 지금 불안해지려는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냥 여기서 바로 돌려보내도 되는 사람이었다. 듣지 않아도 된다면서 내쫓아 버리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사샤는 잠시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마물에 대한 것일 터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신이 거부하지 못할 만한 무언가가 있을 터였다. 마물에 대한 정보일까 아니면 자신의 정체일까.
얼마 전 카일러와 함께 마물을 마주친 숲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것에 대해 아는 이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중 사샤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간 무엇이 있었다.
“내가 공작저를 안 나가면 돼요. 이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마물이 본래의 활동 범위를 벗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제가 뱉은 약속이 그 힌트가 되었다.
저택을 벗어나지 않으면 마물은 통제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자신이 집을 나서면,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면 그들은 분명히 자신을 찾기 위해 통제의 범위, 산맥을 벗어나 버린다.
확률상 꽤 높은 범위 내에서.
그리고 거기에서 유추했던 것은 바로 이베른 후작저에서 이 사샤의 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관한 것이다.
아마 본래의 영혼도 자신이 왜 갇혀 살아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짚이는 것이 없었을 듯했다. 만약 그런 게 있었다면 카일러를 붙들고 계약하는 시점에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에게 자신을 내던지면서도…… 끝내 카일러를 믿지는 못했던 것일까.
조금 짠해지려고 한다. 본래의 영혼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차라리…… 적어도 이전 내 본체로 들어간 것은 아니기를 바랐다.
“혹시, 아버…… 흠, 이베른 후작이 시켰니?”
제게는 아버지라는 느낌조차 없었고,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부르려던 걸 급히 정정했다. 왠지 그렇게 부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 말이 적중했던 듯 놀라는 엘리나의 눈동자를 보자 기분이 훅 다운되었다.
아버지라는 작자가 딸을 어떻게 다락방에서 20년을 방치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항상 들었는데, 그녀가 마물을 만났다는 일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숲으로 딸을 끌어들이려 하다니, 그것도…… 자신이 아껴 마지않는 딸을 미끼로 보내어서.
정말 무서운 남자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래. 아빠한테…… 물어볼 것이 있지?”
씨익 웃으면서 자신을 떠보려는 엘리나의 반응조차 소름을 더 만들어 냈다.
“너, 지금 내가 그 숲에 가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는 있니?”
어이가 없어서 묻고 말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흔들릴 그녀를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 방향이 조금 달랐던지 의기양양하던 엘리나의 반응이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더 의뭉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궁금하지 않아? 아빠가 아니면 아마 그 이야기를 들을 사람도 없을걸?”
저건 그녀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아마 심각성 같은 것도 모를 것이다. 그냥 내가 거기에서 마물과 마주친 적이 있으니, 가기 싫어할 것이다 마주칠까 봐 두려워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그녀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그 말 또한…… 엘리나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하아, 그래 그걸…… 이베른 후작은 알고 있다는 말이구나.”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살짝 틀고 눈동자만 움직여 건너편의 엘리나를 바라보았다. 자꾸 아빠를 다른 사람을 부르듯이, 특히 작위가 낮은 사람을 부르듯이 말하는 것에 마음이 흔들리게 만들었다.
언니 사샤가 아니라 그냥 타인을 대하는 느낌이 너무나도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그래. 답을 알고 싶으면 나와 함께 가면 돼. 그냥 이렇게 묻어 두고 살 수 있을 거 같아? 궁금해서 죽을 것 같잖아.”
태연을 찾은 것인지 애써 가장하는 것인지, 이미 그녀가 건네는 말에 집중한 사샤는 그녀가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자, 이제 자신을 향한 도발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럼 여기에서…… 자신이 선택할 올바른 행동은 어떤 것일까.
옳은 것은 당연히 지금 눈앞에서 자신만만한 척 웃으며 이베른 후작의 앵무새 노릇을 하는 불쌍한 영애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후작이 이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 일을 맡길 만큼 별다른 애정이 없는 것인지,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딸을 내보내야만 하는 어떤 압력이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용당하는 이 아이의 입장이 또 눈앞에 선하니까.
“언제까지 카일러 공작님한테 폐 끼치고 있을 거야, 응? 뭐 할 줄도 모르고 공작저에 처박혀 있기만 하면 다 공작부인인 줄 알아.”
머뭇거리고 있는 사샤에게 돌덩이를 던진 것은 엘리나였다. 그 동멩이는 속으로만 소용돌이치던 사샤의 마음의 물결을 수면 위로 드러내었다. 표면만 잔잔하던 호수에 파도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저 말은 엘리나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자신에게 차곡차곡 쌓아 온 자격지심을 풀어놓는 그녀를 향해서 사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나를 데려가고 싶다면 좋아. 따라나서 주지.”
사샤는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났다. 이렇게 바로 일어날 줄 몰랐던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올려다보는 그녀를 서늘하게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