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엘리나는 이를 꽉 물었다.
아름다운 나무들이 우거진 우할린 숲을 지나가고 있는 마차 안에서 엘리나는 홀로 잔뜩 긴장한 채로 앉아 있었다.
이그노트 공작저를 찾아가는 두 번째 길이었지만 지난번에는 이토록 긴장하지 않았었다.
후작부인과 함께 앉아서 사샤가 어떻게 공작님을 꼬신 것인지, 가서 결국 사랑받지 못해 구석에서 구박받고 있는 것은 아닐지, 혹시, 그녀를 다시 데려가게 하려고 오라고 한 것은 아닌지, 별별 가정을 다 하며 오히려 즐겁게 갔었다.
물론 돌아오는 길에는 후작부인이고 엘리나고 모두 화가 잔뜩 나 있던 상태라 딱히 마차의 분위기가 좋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우할린 숲은 수도에 갈 때도 지나는 숲이었고, 심지어 영애와 영식들이 데이트를 나온다고 유명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지금 엘리나는 창문 밖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갑자기 저 멀리서 마차를 향해 달려오는 마물이라도 보인다면, 공격을 받기 전에 심장 마비로 먼저 죽어 버릴 것 같았다.
“내일 황후께서 이그노트 공작이 황궁으로 올 것이라 했다. 아침에 길을 나서면, 그가 공작저를 비운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야.”
이베른 후작에게 조르고 졸라 받아 낸 ‘할 일’이란 매우 긴장되는 것이었다. 얼핏 그 의도가 짐작이 가기도 하면서, 자신마저 위험해질 가능성마저 있다는 뜻이 되었으니까.
공작이 황궁을 비운 시각. 엘리나에게는 그를 볼 수 있다는 작은 보상마저 주어지지 않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엘리나는 한껏 긴장한 채 나아가고 있었다.
“실례지만 누구시라고…… 전해 드릴까요?”
그런데, 공작저의 문지기부터가 말썽이어다. 분명 지난번에 한 번 다녀간 적도 있고, 아무리 기사라지만 자신의 얼굴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 아냐?
엘리나는 마차 창문을 열고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다가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문을 열고 나왔다. 바깥에서부터 이런 박대를 당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아서 그저 기사를 앞세우고 마차를 보이고, 자신이 고개를 슬쩍 내밀면 바로 통과되겠지 했었는데.
문 앞을 지키고 서서 굳건한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는 강인해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에 구릿빛 피부를 가진 남자였다.
베어 버릴 듯 매서운 눈빛을 장착한 채 엘리나를 내려다보았다.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아니, 나를 모르……! 후……. 나는 이베른 후작저에서 온 엘리나 이베른이다. 여기 나의 언니가 있어.”
성질을 못 참고 질러 버리려던 목소리를 황급히 수습했다. 여기에서 신경질을 부려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지난번 이곳을 나설 때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으니 고용인들에게 자신을 들이지 말라 전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 실례했습니다, 이베른 영애. 공작부인께 빠르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마차 안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이름을 듣고 나자 깍듯한 대우를 하는 그를 보며 엘리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새로 온 이인가? 그래서 지난번 왔다 간 자신을 못 알아본 것이고. 아무리 그래도 엘리나 이베른의 얼굴을 모른다는 것에 살짝 자존심이 상하려고 했지만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보면서 엘리나는 다시 마차로 올라탔다.
지금 그녀는 이베른 후작의 부탁을 받고 왔다. 정확하게는 임무를 가지고 왔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뭐든지 맡아서 하고 싶다는 생각에 나서서 오기는 했지만…… 차라리 그녀의 방에서 뭔가를 몰래 훔쳐 나오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우할린 숲으로 데려오라니…… 카일러 공작님이 가자고 해도 안 가겠다.”
그 숲으로 무슨 수로 데려가느냐 이 말이야…….
난감해하는 엘리나에게 이베른이 무슨 말을 하면 될지 알려 주기는 했지만…… 그걸로 정말 되는 걸까. 의문이 드는 것이었다.
그때 바깥에서 남자들의 말소리가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갔던 기사가 나온 모양이었다.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몰라 긴장하고 있던 차에 금방 문이 열렸다.
짧게 오간 말을 보아하니 별 내용 없었던 것 같았다.
이렇게 하나하나에 긴장하다니, 엘리나는 다시 입술을 꾹 물었다. 저택 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벌써 자존심 상하는 일이 생기는 게 맘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저택의 앞에서 내리자 어린 하녀 한 명이 나와 깊게 허리를 숙였다. 매우 앳돼 보이는 아이가 자신을 맞아 문을 열어 주는 것을 따라 들어가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드넓은 홀에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와서 본 적도 있고, 황궁에도 다녀와 봤으며, 공작저라면 당연한 것이니까. 그런데 거기서 눈을 조금 더 들자 2층에서 내려오는 사람 하나가 보였다.
“…….”
엘리나는 입이 벌어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계단을 내려오다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샤를 발견한 것이다.
풍성한 금발을 늘어뜨린 채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이상하게 위압 같은 것이 느껴졌다.
후작부인인 엄마에게서조차 느껴 본 적 없는 우아함이었다.
입을 벌리는 것은 막았지만 살짝 넋을 놓고 그녀를 보고 있던 엘리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무엇이었는지 잠깐 망각해 버릴 만큼 화륵 머릿속이 타올라 버리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지? 지난번에 다녀갈 때 다신 오지 않을 것처럼 하고 돌아가더니.”
“나를 쫓아낸 게 언니가 아니고?”
엘리나는 방금까지 제가 긴장하고 넋을 놓고 했던 행동들이 전부 자존심이 상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부터 크게 나오는 게 그녀를 크게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자존심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로 쌍심지를 켠 눈으로 사샤를 올려다보았다.
“아주 얼굴이 폈네? 공작님 안 계실 때 주인 노릇하는 거, 재밌어?”
엘리나와 눈을 맞춘 후로 한 발 한 발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던 사샤는 한두 개의 계단을 남기고 멈추어 섰다. 발소리도 사뿐하게 울려 엘리나의 외침이 사라지는 사이 사박사박 내려오는 사샤의 발걸음에 엘리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계단을 채 다 내려오기 전 사샤는 옆으로 슥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 마치 귀족 부인인 듯 우아한 자세로 서 있던 여인이 스윽 움직여 그녀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전에 왔을 때도 본 적 있는 이그노트 공작저의 하녀장. 모르고 봤다면 어느 귀족 부인이라고 생각할 뻔했던 하녀장이 그녀의 눈빛 하나에 움직이고 있었다. 기에 눌린 엘리나는 사샤를 바라보다 익, 하고 화를 참는 소리를 내 버렸다.
계단을 마저 내려온 사샤는 엘리나에게 다가오는 대신 스륵 발을 오른쪽으로 옮기며 그녀에게 슬쩍 눈길을 주었다.
“이쪽으로 와.”
한껏 우아한 척하는 미디에나와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였다. 우아함은 꾸며낸 목소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태도에서 나오는 거라는 걸, 지금 사샤를 보며 처음 알았다.
“썩 달갑지 않은 방문객이지만, 그래도 이그노트의 저택에 온 손님에게 차 한 잔 대접하지 않을 수 없지.”
사샤가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안내한 곳은 응접실이었다. 상석에는 사샤가 자리를 잡았고, 그 대각선 자리로 엘리나가 턱을 살짝 든 채로 자리를 잡았다.
하녀장과 다른 하녀 하나가 테이블에 차를 세팅하는 사이 엘리나는 계속 자신의 마음을 다독였다.
지금 무언가 비교하려고 온 것도 아니고 자신은 사샤를 짓누르려고 온 것이 아니다. 내게는 임무가 있고, 그걸 제대로 해낸다면 더 밀린다고 자존심 상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차를 한 모금 마시려던 엘리나는 소파의 상석에 앉아 지그시 바라보는 그녀 때문에 손에 들었던 찻잔을 그대로 다시 내려놓았다.
큼, 하면서 다시 턱을 슥 들었다. 최소한의 자존감은 지키기 위한 몸부림 같았다.
한참 동안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입을 열지 않는 사샤 때문에 엘리나는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왜 왔는지, 무슨 일로 왔는지, 이전의 말다툼을 기억한다면 저를 밀어내고 쫓아내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 고요한 눈동자로 자신을 한참이나 바라보는 그 눈동자에 머릿속이 하얗게 되기 일보 직전, 그련 그녀의 상태를 알아챈 것처럼 사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를 찾아온 이유는 언제 들을 수 있지?”
이전에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그녀는 제가 알던 사샤가 아니었다. 다락방에서 지내느라고 얼굴은 질린 듯이 새하얗고 머리는 언제나 부스스한 채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여자아이였었다.
밤이 되면 슬쩍 기어 나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말리지 않았다. 고용인들이 자신에게 고자질을 해 올 때 ‘아, 그거 그냥 놔둬. 얼마나 답답하겠어?’ 하면서 태연한 척했다.
그게 나의 허세였다. 나는 이렇게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면서 으스댔던 것이다.
나를 돋보이기 위한 장치 정도의 쓰임, 그 이상으로의 가치는 전혀 없고 엄마 아빠가 그저 숨기기에 바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그녀의 기억 속 사샤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긴장하고 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 아닐까. 난 이미…… 이 사람을 낯선 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그노트라는 거대 가문의 안주인, 사샤 이그노트. 눈앞에 있는 그녀는 동명이인으로 제가 전혀 모르는, 직위 높은 어느 귀족 부인인 것만 같았다.
정신 차려, 엘리나. 눈앞에 저 여자는 내 언니야. 다락방에서 혼자 자라온, 엄마 아빠가 숨겨야만 했던, 어디 내보일 수 없는 그런 여자야.
엘리나의 턱이 아까보다 살짝 더 올라갔다. 내려다볼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언니랑 여유롭게 차 마시러 온 건 아니고, 나랑 같이 나가자.”
그녀의 당당한 목소리에 사샤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턱이 떨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한 엘리나의 얼굴에 씨익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