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어둠이라고 해서 서로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초능력이라도 얻은 것처럼 어둠 속 실루엣으로 그를 모두 보는 듯했고, 그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저를 번쩍 안아 들었다가 침대 한가운데에 내려 주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의 맨살이 닿았던 몸의 감촉이 남아 하, 숨을 내뱉는 사이 제 위고 그가 올라왔다.
“그런데…… 이 시간부터 왜 이렇게…….”
카일러는 커다란 몸을 수그려 그녀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여린 목선에 혀를 진득하게 핥아 올리며 손으로 허리선을 쓸어 주었다.
그 감각에 숨이 잠시 멎었던 사샤는 질문을 끝맺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알아들었을 것이었다. 무엇을 묻고자 했는지.
목덜미를 싹 핥은 카일러는 그녀의 질문에 피식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으, 제발…… 거기서 그렇게 웃지 말아요…….”
안 그래도 혀로 핥아 예민해진 목의 감각에 그의 뜨거운 숨이 흩뿌려지자 온몸이 짜릿해져 버렸다.
“사실 며칠…… 하고 싶은 걸 참고 있었더니…….”
그는 그렇게 짧게 말하고는 그녀의 쇄골에 입을 맞추었다. 뜨겁고 부드러운 그의 입술과 혀와 손이 사샤의 온몸을 어루만지고 다녔다.
진작 젖어 있던 사샤의 몸이 흠칫거릴 정도로 자극을 주던 카일러의 움직임은 원하던 곳에 도달하려 하나가 된 이후로는 점차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아, 아학, 응!”
사샤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짧은 신음을 흘리며 매달렸다. 딱히 참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시간들이었지만 그의 손이 야릇하게 몸에 닿을 때나 그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리고 막상 그가 닿아 오면 내가 그동안 그를 원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마는 것이다.
“나도…… 하고 싶었으니까아……. 응, 걱정하지 말아요, 흐읏. 하아……!”
사샤는 그렇게 그의 귓가에 흥분할 만한 이야기를 흘렸다. 신음과 섞인 목소리를 그의 귓바퀴를 간질여 제게 지금 깊이 묻은 몸이 더욱 큰 존재감을 드러내 버렸다.
“하, 사랑한다…….”
“응! 하아, 나도요…… 사랑해요, 정말.”
갑작스러웠던 한낮의 관계는 그러고도 몇 번이나 더 이어졌다. 그는 하나하나 정성스러웠고 뜨거웠고 거칠었다. 그리고…… 끝낼 줄을 몰랐다.
마치 누군가 막아 두었던 것을 뚫고 들어온 듯이 끝도 없이 자신을 품고 안아 주는 카일러의 품에서 오히려 사샤는 자신이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
“아빠? 무슨 일이에요?”
엘리나는 징징거리던 것을 멈추고 나자 평소의 애교쟁이 딸로 돌아와 있었다.
후작저의 집무실에 앉아 있던 이베른은 여전히 내리누른 눈을 들지 않고 그저 앉아만 있었다.
책상 앞 커다란 가죽 의자에 앉은 그가 위엄 있는 모습으로 그렇게 눈을 감고 있자 발랄하게 들어왔던 엘리나는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꼭 물고 일단 방을 나서 볼까 했다. 제가 부른 소리는 못 들은 듯하니 조용히 나가기만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이미 온 것도 모르는 걸로 봐서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녀가 다시 집무실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이었다.
“엘리나.”
“예? 아, 예, 예. 나가려던 거 아니었어요!”
이베른의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고 제 발이 저린 엘리나는 자신이 나가려고 했다는 것 자체에 본인이 놀라 냉큼 이베른이 앉아 있는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엘리나는 서둘러 발을 옮겼다. 집무실의 소파에 앉아 책상 너머의 이베른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앉아 있었다.
엘리나가 슬쩍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그가 아주 느리게 눈을 떴다.
“나가려고 했나.”
“아니, 아빠 주무시는 거 같길래…… 하핫.”
엘리나는 대략 웃음을 흘리면서 지나가고자 했다. 가볍게 대답하면 금방 웃음이 사라질 것이었다.
“됐다. 오라 할 때 왔으니까.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서 불렀다, 엘리나.”
이베른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지금 다른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황후가 다녀갔다. 마물이 나온다 위험해서 딸아이도 보내지 못했던 숲을 뚫고 그녀가 이베른 후작저까지 찾아왔다.
그가 게라넬의 수장이라는 정보는 물론이고, 그가 사샤는 다락방에 가뒀던 것도 모두 다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내어 저를 여유롭게 쳐다보았다.
자꾸만 안 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려는 것을 간신히 버티면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역시나 제게 다른 길이 없었다.
“제가…… 할 일이요? 아빠가 하는 일 중에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있어요?”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리나를 보면서 이베른은 다시 한번 손을 놓칠 뻔했다.
이베른은 되도록 자신이 나설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녹록지 않다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자신은 딸아이가 시집을 가고 아이 티를 벗고 성장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합의를 볼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없고, 아랑곳없이 기다리고 있을 그분을 생각하면 두 눈 딱 감고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사샤를 산맥으로 이끄는 것, 정확한 포인트는 따로 알려 주겠지만 이 아이는 어렵지 않게 사샤만을 그 안으로 이끌어야 했다…….
한마디로 복잡하고 엉망진창이었다. 생각할수록 꼬이는 것을 붙들고 이베른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 네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다.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느냐.”
이베른이 그렇게 묻자 엘리나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채 두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맑기만 한 엘리나를 보며 한숨을 참았다. 그래서 사실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 애썼던 것도 있었다.
이 아이가 잘해 줄지에 관해서는 이베른도 장담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자라는 내내 제 언니 대하던 것처럼만 한다면 될 일인 것 같은데. 그걸 실전으로 해내 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응, 아빠. 나 잘할 수 있어요. 아빠 돕는 일인데, 당연히 좋지.”
엘리나는 속도 모른 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눈을 보니까 이베른의 마음은 또 흔들렸다. 무얼 하든지…… 후작저의 비호 아래 하던 엘리나에겐 무서울 것이 없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건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엘리나가 아니라…… 사샤의.
아니다. 그런 애정이 남아 있었나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것이다 엘리나가 자신의 몫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에 관한 걱정.
“아니다, 아니야……. 역시 엘리나 너는 안 되겠어.”
그의 말에 엘리나가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 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화를 낼 듯이 쿵쿵 다가온 그녀는 이베른의 앞에서 그의 팔을 붙들고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아빠아, 나한테 말을 꺼냈을 때엔 나한테 말할 게 있었던 거 아니었어? 왜 안 되는데요? 응? 나 잘할 수 있어요!”
엘리나는 지금 계속 몸이 막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 어떻게든 사샤는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했던 건데, 그래서 황후와 함께 모종의 계획도 만들고 그랬었던 건데 이게 다 뭐란 말인가.
그놈의 마물이 매일 나오는 것도 아니라는데 황궁으로 가서 거기서 지내고 있으면 안 되는 걸까. 그런 생각들도 했었다.
정확히 이베른이 뭘 시키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얘기니까 그걸 꼭 하고 싶었다. 나도 뭔가 해낼 수 있다는 걸을 누구에게든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베른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든 미간을 찌푸린 채 제 팔에 매달려 흔들어 대는 엘리나를 쳐다보았다.
“네가…… 할 수 있다고?”
“어? 아빠 제가 왜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요? 언니도 했던 일인데 내가 왜 못 하는데요?”
“뭐……? 네 언니가 뭘 해?”
이베른은 미간이 한 번 더 와그작 구겨졌다. 그걸 보고 있던 엘리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 들었어! 사샤가 마물이랑 얘기를 한다며? 그거 때문에 황후 폐하 다녀가신 거 아냐?”
생각지 못했던 부분에서 얘기가 새어 나가고 말았다. 쯧, 혀를 차는 이베른을 보며 엘리나는 그 얘기가 사실이었다는 것에 충격받고, 바로 그에게 매달렸다.
“언니도 하는데 내가 왜 못 해. 나한테 시키려는 일 그거 맞지? 나도 할 수 있어. 나도 시켜 줘 아빠.”
그것과는 좀 다른 일이기는 했지만 이베른은 이렇게 떼를 쓰고 나오는 그녀를 이길 수가 없었다.
애초에 시키고자 했던 일이니 물러날 것도 없었다.
“좋아……. 하지만 이 일이 네가 원하는 그것과는 좀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할 거다. 그래도 하겠느냐.”
이베른이 비장한 목소리를 꺼내자 엘리나의 두 눈이 반짝였다. 어디에 이런 눈빛을 감추고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의 표정이었다.
“응. 좋아. 아무튼 아빠도 처음에 나한테 시키려고 했던 얘긴 거잖아. 그렇지?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얘기니까. 내가 할래. 나도…… 나도 뭔가 하고 싶어.”
그냥 착하고 아름다운 영애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소문만 그렇게 흐를 뿐, 카일러는 언니가 가져 버렸고, 자신은 그저 산맥 너머 영지에 사는 영애일 뿐이었다.
황후도 못 되고, 공작부인도 못 되면, 뭐든 하고 싶었다. 게다가 아빠가 시키는 일이니까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아닐 테고 말이다.
“……이그노트 공작저로 가거라.”
“그래, 이그노트로 가서. 어떻게 해? 사샤 언니한테서 뭔가 가져와야 하는 게 있어? 아니면 언니 설득해서 우리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거야?”
엘리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였으면 이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베른은 결국 무거웠던 입을 열었다.
“사샤를 몰래 만나, 그리고 함께 우할린 숲으로 들어와라.”
“우할린 숲……?”
그곳은 사샤가 카일러와 함께 들어갔다가 마물을 만난 곳이었다. 자신은 통과도 못 한다고 하던 숲. 그 길을 지나 이그노트로 가서 사샤를 끌고 그 숲으로 돌아오라니……. 엘리나는 싸한 기분을 느끼며 아빠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