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카일러의 추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살면서 불가능한 일이 있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던 만큼, 제대로 자신의 세력을 갖추고 나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 덤비는 편이었다.
그 정도까지라는 생각을 못 했던 사샤는 그와 함께 나란히 보는 후원에도 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가볍게 던졌던 말이 이렇게 눈앞에서 실현되어 간다는 것을 보는 게 너무 신기했다.
이건 그냥 일반적인 노동을 쓰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몇 달에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럴 땐 마법사가 최고였다.
“정말…… 이런 광경을 보게 되다니 놀랍네요.”
“로제…….”
3층을 오르면 층계참 끝에 유리로 벽을 만들어 후원을 내다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거기에 서서 넋 놓고 공사 현장을 바라보고 있던 사샤의 곁으로 로제가 다가왔다.
“미, 미안…… 내가 이러려고 말 꺼낸 건 아닌데…….”
사샤는 여러모로 이런 소동을 만들어서 고용인들에게 미안한 참이었다. 카일러가 그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살짝 덜 미안한데…….
사샤가 난감한 눈썹 모양을 만들며 로제에게 사과하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희도 공작님을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사랑에 빠진 공작님은 저희가 생각하고 있던 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인 듯합니다.”
사랑에 빠진……. 그녀가 입에 담은 그 말에 얼굴이 화르륵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런 사샤의 얼굴을 살짝 돌아본 로제가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예쁜 커플을 지켜보는 마음은 중년이 되고도 살짝 설레고 있었다. 정말 주책맞게도.
그 동안의 공작저의 분위기에 맞게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하녀장이 되어 파반과 함께 저택을 지키는 파수꾼 같은 역할을 해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 작은 존재 하나가 공작저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이제는 저도 조금 웃어도 될 것 같고, 중간중간 농담도 던져도 될 것 같고……. 한 번 더, 변화해 가는 공작저의 분위기에 맞게 바꾸어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 우와…… 방금 그거 마법인 거죠? 막 쾅콰광 하더니 땅이 막 갈라졌어…….”
2층 테라스로는 답답했는지 3층까지 올라와 위에서 바라보려는 그녀는 좀 더 욕심을 내고 싶었는지 계단을 더 올라 4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로제가 그 뒤를 따르는 사이 4층 유리 너머로 유심히 내려다보던 사샤는 이야, 하고 작은 감탄을 했다.
“사샤 님, 공사 모습은 내일 더 크게 변화해 있을 것 같은데 계속 그렇게 서서 지켜보실 거예요?”
유리벽에 거의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 같아서 로제가 슬쩍 말려 보았다.
“음? 아아…… 근데 지금도 되게 시시때때로 변하고 있는데? 금방 끝날 거 같지 않아?”
“글쎄요. 저렇게 폭파해서 길을 내고도 안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서야 물을 흘릴 수 있지 않을까요?”
“으음…….”
계속 보고 있고 싶었던 것인지 그녀는 좀 더 유리벽 앞에서 뭉그적거렸다. 진짜 아이처럼 그냥 끌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로제는 거기까지만 하고 물러가려고 했다.
“로제의 말이 맞다 오늘은 저렇게 폭파만 계속 할 참이라 모래먼지만 보게 될 것이다.”
그때 층계참 아래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그, 목소리는 유리벽에 붙어 떨어질 줄 모르던 사샤를 대번에 돌아보게 만들었다.
아래 계단에서 올라오는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보이고 그다음에 훤칠한 몸이 뚜벅뚜벅 올라왔다. 마치 드라마에서 보면 멋진 주인공이 슬로 모션으로 등장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 이게 주인공 자체 효과인가. 자신이 연못을 원했다고 해서 마법사들을 물러다가 후원에 인공 강을 만들려는 이 남자를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듯했다.
“카일러! 저거 정말…… 괜찮아요? 나 되게 철없이 이상한 거 바란 거 아니에요? 진짜, 진짜 괜찮아요?”
신기한 건 신기한 거고, 멋있는 것은 멋있는 거고……. 애초에 저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냐는 말이다.
제가 이곳의 상식에 대해 아직도 무지한 것이 많긴 하겠지만 이건…… 안 괜찮아 보이는데?
당황해서 그에게 달려간 사샤의 머리에 텁 하고 커다란 손이 올라왔다. 그 손이 슥슥 그녀의 머리를 흩트려 주었고 그 손길을 좋아하는 사샤는 당황했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의 소매를 잡았다.
“그대는 연못을 바랐다. 시냇물을 만들겠다 한 건 나였어.”
“음…… 뭐, 그건 맞는 말이긴 하지만요.”
카일러의 말에 빠르게 손절하는 사샤를 보며 뒤에서 로제가 풉 하고 웃음을 흘렸다.
카일러는 사샤를 보고 있던 눈을 돌려 뒤를 보았다. 자신이 앞에 있는데 저렇게 웃음이 새는 소리를 내는 로제가 매우 생소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로제도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혹시나 자신의 시선에 겁먹은 얼굴로 굳어 버릴까 하는 걱정을 했지만 역시나 로제. 그녀는 쉽게 자신에게 겁먹을 여인이 아니었다.
“사샤 님, 매우 귀여우시네요.”
하지만 거기에 더해 이런 말을 꺼내는 로제는 카일러에게도 조금 낯선 것이었다.
이제껏 굉장히 정해진 길만 걷는 엄격한 사람이었는데 자신의 앞에서 풉 소리를 내며 웃는다거나 안주인을 두고 귀엽다 말하는 것은 제가 알던 로제가 아닌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딱딱한 얼굴로 일만 하는 묵묵한 이가 아니라 주인이라도 따스하게 바라봐 줄 줄 아는 마음이 깊은 여인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으니까.
“그렇지.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군, 로제.”
오랜만에 대화를 나눠 보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두 사람이 그렇게 훈훈함을 연출하고 있을 때 그 사이에 있던 사샤는 카일러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내밀었다.
“귀엽다는 말을 내가 좋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요?”
사샤는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어색하기도 했지만…… 공작부인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 말했던 카일러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영문을 모르는 카일러였지만 거기에 따지지는 않았다 대신 머리를 흩트리고 쓸어내리던 손길로 그녀의 입술을 톡 건드렸다.
“우리가 그대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음…… 아뇨, 없었어요.”
“음.”
설명이 끝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한 그를 보고 이번엔 사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되게 막 설명 많이 해 줄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간단하네요.”
구구절절 해 줘야 할 설명이 많은 것은 아닌데, 분위기가 갑자기 툭 끊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웃음이 나와 버린 것 같았다.
“흠, 뭐 덧붙여 말을 해 주자면…….”
로제에게 슬쩍 눈길을 던졌던 카일러가 웃음을 살금 머금은 눈을 다시 돌려 사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작은 어깨를 감싸고 몸을 돌리더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결에 그를 따라서 계단을 내려가며 그를 올려다보자 웃음이 새어서 입술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여 어리둥절했다.
“이그노트 공작부인의 품위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사샤는 좀…… 많이 귀여운 것 같다.”
그 말을 로제의 앞에서는 하지 못해서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사샤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빵 터져서는 그의 품에 안기다시피 하는 자세로 계단을 마저 내려가며 한참을 웃었다.
그런데 그가 2층까지 내려와서 향하는 곳이 바로 자신의 방이었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사샤는 아주 본능적으로 온몸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카일러? 이 시간에 갑자기 왜 방으로 들어가는 거죠?”
기어이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커튼을 다 쳐 놓은 상태라 방 안은 어둠으로 잠겨 어느새 조용해져 버렸다.
아직은 해가 쨍쨍한 시간이었다. 지금 암막 커튼으로 가린다고 해서 이게 되는 일인가 싶었는데 말이다.
사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그의 손이 그녀의 몸 위를 쓰다듬고 다녔다. 커다란 손이 예고도 없이 온몸을 훑고 다니는데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자분자분 쓰다듬고 이따금씩 손에 힘을 주는 그것만으로도 사샤는 숨이 가빠져 버리고 말았다.
“거절하려면 할 수 있어……. 알고 있지?”
이미 시작해 놓고 거절하라니. 사샤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젖혔다. 그녀의 목선이 아찔하게 드러났다.
거절의 말을 입에 담는다면 그는 대번에 이 손을 뗄 것이다. 자신을 탐하는 것에 있어 흥분은 하지만 거기에 휘둘리지 않는 남자였다.
“으응……. 왜 거절해요, 카일러가 만져 주는데에……. 하…….”
카일러의 입꼬리가 쓰윽 말려 올라갔다. 온몸을 쓰다듬을 듯한 손은 어느새 치마 속으로 들어와 한참 맨다리를 어루만지더니 참지 못하겠다는 단번에 그녀가 입고 있던 실내 드레스를 벗겨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벗겨진 옷은 침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천이 가볍게 바닥에 딛는 소리에 사샤의 심장도 툭 떨어져 버렸다.
자신만 벗기는 게 아니다. 그는 꼭 저를 벗기고 나면 자신의 옷부터 벗어 던졌다. 사샤가 보기에 그마저도 자신을 위한 배려처럼 느껴져서 심장이 떨렸다.
본래 관계 전은 이렇게도 설레고 떨리고 기분 좋은 것일까.
사샤는 어둠속 희미하게 보이는 그의 움직임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너무 멋있기만 한 그였기에 언제나 그녀는 온전한 내 것에 안기는 느낌을 받기가 어려웠었다.
하지만 안다. 그것은 내 자격지심 같은 것이지, 그는 온전히 나를 그의 것이라고 생각해 준다는 것을.
“사샤…….”
“카일러. 좋아요. 나는…… 당신은 언제나 좋아요.”
웃음을 머금은 사샤의 목소리가 어둠을 타고 카일러에게로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