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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98화 (98/128)

98화

“어딜 다녀오는 거지?”

황후전 앞에 마차 하나가 멈춰 설 때부터 문 옆에 삐딱하게 기대어 서서 그곳에서 내릴 사람을 기다리던 리디안은 자신이 기다리던 이가 마차에서 내려 이쪽으로 걸어오는 걸음을 단번에 붙잡았다.

“폐하?”

미디에나는 너무도 당황스러운 발걸음에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그녀의 발이 멈추자 뒤를 따라오던 예하라와 기사 또한 발이 멈춰 버리고 말았다.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가 자신의 선인 기사는 이쯤에서 물러나고 예하라는 뒤에서 허리를 푹 숙여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뒤 천천히 뒷걸음질 쳐 물러났다. 마차까지 전부 저편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리디안의 눈썹이 위로 쓱 올라갔다.

“아침에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수도에 나들이를 좀 다녀올 생각이라 점심 식사는 함께하지 못할 것이라고요.”

모두 사라지자 미디에나의 목소리가 조금 퉁명스럽게 튀어나왔다. 어떤 반응이든 가만히 기대서서 지켜보고 있던 리디안은 두 눈을 들어 미디에나의 두 눈을 딱 마주 보았다.

살짝 움찔하긴 했지만 그녀는 곧바로 평온함을 가장했다. 눈가가 살짝 떨리는 것은 아마 자신만이 알지 않을까.

“그래, 그랬었지.”

태연한 대답 이후 질문을 이어 주지 않는 리디안 때문에 미디에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다섯 걸음 만에 그의 앞에 서서는 긴장을 숨긴 채 그의 얼굴을 바라봐야 했다.

황후의 외출이 흔한 것은 아니어서 사실 긴장을 좀 하기는 했다. 며칠 동안 마음을 다잡고 오히려 태연하고 뻔뻔하게 통보를 남겨 놓은 채 마주칠 틈도 없이 나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돌아오는 시간이 딱 맞춰 그가 자신을 맞이하고 서 있으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귀신같이 귀가 시간을 안 것인지, 아니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어떻게 여기 계세요? 제가 지금 돌아올 걸 알고 계셨어요?”

미디에나는 그럴수록 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세게 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전에 없이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것이었다.

리디안은 다시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에는 평소 머금고 있던 미소조차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쩜 부정적인 표정이 도드라지지도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점점 손끝이 떨려 오는 것이 느껴졌다. 제 앞에선 언제나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그의 표정에 오금이 저렸다. 이게 황제의 카리스마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스쳤다.

“어떻게…….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인지, 아니면 황제의 궁에서인지 정확한 것은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에서 미디에나는 심장이 덜컹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을 들었다.

“아…… 언제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지 않았는데, 오래 기다리셨나요?”

언제 올지도 모르는 사람 오래 기다렸느냐 책망하는 말이었다. 그는 은근한 부담을 주기 위해서인지 아닌지,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무작정 기다리고, 말없이 기다려 주고. 그녀를 챙기느라 그런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게 그녀에게는 꽤나 큰 부담이었다.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함부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를 이렇게 바라보는 것도 거의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무섭고도 없었으면 했던 황제고, 제게 항상 많은 것을 해 주는 사람이었지만 함부로 다른 이를 담지 못하고 떠나지도 못 한다는 생각에 항상 거리를 두려 했던 이였다.

그래서 금발과 벽안 전형적 미남인 리디안의 얼굴을 하나하나 찬찬히 뜯어본 적이 없었다. 긴장이 조금 가라앉고 나자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미디에나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얼굴은 카일러였는데, 리디안의 분위기는 그와 천차만별이었다. 피부도 하얗고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도 그와는 아예 다른 색채인 양 눈이 부실 정도였다.

카일러가 거친 느낌을 간직한 야성의 모습이라면, 리디안은 곱게 빚어 놓은 조각 같은 얼굴이었다.

이곳 수도에서 만난 여인들이 어째서 그렇게 공작과 황제만 외쳐 대는지 사실, 미디에나는 지금에서야 알아차리게 되었다.

리디안 하면 똘끼 가득한 황제, 밤일을 즐긴다는 황제, 이야기만 돌지만 그 어떤 말도 그를 대변해 주지 못했다.

리디안은 카일러 못지않은 미모의 소유자이며 황제다운 카리스마에 무시무시한 폭군에, 부드러운 똘끼까지 장착한 그는 명실상부 이 데르마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이제껏 그가 없는 자리에서도 욕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미디에나가 잠깐 자신의 대한 생각에 골몰하고 있을 때 그는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어와라. 저녁을 준비해 두라 일렀으니 천천히 밥 먹으면서 좀 더 이야기 나와 나눠 보지.”

그는 별다른 대꾸도 없이 그녀의 위기를 느끼는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뒤를 돌아 보이자 잠깐 당황한 듯 멈칫거리던 그녀가 재빨리 그의 뒤로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듯했던 리디안의 등은 생각보다 빠르게 사라지지 않았다. 멀어지는 듯, 눈앞에 있었고 부딪치는 기척도 없이 그녀의 손만 안 스쳤다 뿐이지 거의 나란히 걸을 때도 있었다.

황후전의 식당이 아닌 다시 유리 온실이었다. 그리고 밤에 만난 그는 여전히 분위기 있고 이 유리 온실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식탁에는 기력 보충을 위한 닭요리가 크게 올라와 있었다.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튼실한 고기에 곁들이는 샐러드까지 먹음직스러운 음식은 닭 요리를 즐겨 먹는 메딜란 공작가의 음식 취향을 반영한 듯했다.

“늦었지만 함께 들지.”

리디안은 손을 뻗어 그녀가 앉아야 하는 의자를 빼서 앉았다. 그녀가 엉덩이에 의자를 붙이고 앉아 살짝 당겨 자리를 잡는 것까지 모두 지켜본 다음에야 리디안이 그녀를 보았다.

아마 그는 이 이야기를 먼저 끝내 놓고 가서 쉬는 게 더 편히 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맛있게 드세요.”

미디에나는 아주 잠깐 간소한 듯 화려하게 차려져 있는 식탁을 보고 망설여 버렸다. 하나같이 그녀가 즐겨 먹는 것들뿐이었다.

그녀는 겨우 마음을 정하고 닭고기를 조금 떼어 와 입에 넣었다. 살짝 달큰한 맛의 양념이 메딜란에서 먹던 것과 비슷해서 살짝 찡한 느낌이 들었다.

“음식이 아주 맛이 있군. 바깥에 나간 것은 즐거웠는가.”

미디에나는 잠시 감상에 빠졌다가 리디안의 물음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뭔가를 알고 물어보는 것일까, 아니면 던져 보는 것인가. 이 미끼를 제대로 물어 버릴 생각은 없었다. 미디에나는 살짝 입술에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기분이 좋은 것 같습니다.”

리디안은 그런 그녀를 보더니 한쪽 입술을 씨익 올려 웃었다. 간혹 그의 미소를 보면, 이상하게 진짜 안도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자신이 걱정이 되어서 기다렸던 것은 아닐까. 통보하듯이 얘기만 던지고 나간 제가 어디에 갔는지를 몰라서, 그사이 일정에 대한 이야기가 올까 하여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종종 나가 보려 합니다. 기사분은 꼭 한 명씩 동행할게요. 위험하지 않게.”

그러나 촉촉하게 넘어가려던 미디에나는 마음을 다잡았고, 그녀가 어떤 조연인지 모를 자신의 삶에서 알아서 살겠다는 말을 꺼냈던 것이다.

“되도록이면 외출은 자제하라. 내가 언제나…… 그대의 곁에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녀의 계획을 그가 밟았다. 말투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런 자신을 놓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리디안에게 이상한 혼란이 찾아왔다.

그가 지금 별다르게 특별한 것을 해 준 것은 아니었다. 식사를 항상 챙겨 주었고, 그녀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그녀의 돌발 행동에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어떻게 다녀왔는지 어떤 생각을 하게 됐는지 궁금해했고, 다음을 말하는 제게 충고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왜요……?”

생각에 잠겨 몽롱한 그녀의 목소리에 리디안이 두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근 마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카일러와 마법사가 오갈 정도로 심각한 일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

마물이라는 말에 닭을 썰고 있던 이의 눈에 휘둥그렇게 떠졌다.

“저는 단지…… 수도에 있을 뿐이었는데.”

“그래. 지금은 여기까지 오진 않았고 우할린 숲에까지 나오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겠나. 이미 결계 같았던 산맥의 선을 뛰어넘어 득실대는 거라면, 그게 게라넬의 짓이 아니라면 굳이 바깥을 나서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의 말대로가 맞았다. 뭐가 어디까지 내려올 줄 알고 어슬렁거린단 말인가. 마물은 사람을 가리면서 공격하는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중을 날아가다 휙 사람 하나 낚아채 가는 상상을 하게 만들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다음 음식을 기다린 것이 얼마 만의 일인지 잘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가 주는 따스한 음식으로 점심을 채우면 식탁을 일어나는 미디에나는 온기를 가지고 남은 하루를 살았다.

그가 이 점심 식사를 통해 얻으려 하는 것이 자신과의 친목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아무 말도 없을 때도 있고, 걱정 같은 잔소리를 할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일단 그렇게 식사를 하고 유리 온실을 나갈 때 기분이 나빴던 적은 없었다. 따스한 음식을 배에 가득 품고 나가는 것인데, 뭔가 빈틈없이 내가 꽉 차 있는 느낌이 들어 그것이 좋았던 거다.

“그렇게나…… 위험한 상황인가요?”

미디에나는 자신이 오늘 하고 온 이야기에 대한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자신의 할 일은 리디안의 눈을 피해 재산을 조금씩 빼 그들에게 보내 주는 것 정도였다.

그럼에도 술렁이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그렇게나 위험한 상황이니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리디안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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