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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97화 (97/128)

97화

마법사가 황궁으로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수도로 향했던 카일러는 해 질 녘이 되어 돌아왔다.

환하게 웃으며 맞이해 주는 그녀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 없이 머리만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가 궁금해하는 마물의 이야기를 마법사는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별개로 전해 줄 만한 정보를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저택 입구에 서서 마주 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만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왠지 아무것도 전해 주지 못하고 있는 지금 상태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녀오느라 수고했어요. 들어가요, 어서.”

요즘 마물에 휩싸여 버린 것 같았다. 이제까지도 그거 없이 잘 살았는데 말이다. 그녀가 다치고, 또 마물과의 미묘한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바람에 자꾸 그를 마물과 엮어 버리는 것만 같아서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해결은 무슨 해결이냐. 그냥 저택에서 조용히 살면 되고, 많이 힘들고 괴롭다고 하면 그의 손을 잡아 주면 되는 거다.

그래서 카일러를 향해 더 환하게 웃어 준 뒤에 그의 손을 더 꽉 잡아 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보호해 줄 수 있는데 뭐가 문제겠어.

카일러는 차마 그녀의 환한 얼굴을 보고 황궁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전해 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선은 이런 식으로 마물과 소통하는 이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없다는 것은 그녀가 특별한 케이스라는 것이고, 그것은 그 능력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혹시나 자신이 나쁜 무엇일까 봐 걱정하던 사샤가 떠올랐다.

게다가…….

“그겁니다! 제가 드리려 했던 좋은 정보 말입니다! 게라넬의 수장이 누구인지를 알아냈습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은 그것은 바로 게라넬의 수장의 정체 때문이었다.

어떻게 말을 전해 줘야 할까 걱정하던 카일러는 자신에게 대입해 보았다. 자신이 그녀의 입장이 된다면, 과연 어떤 느낌이 될까.

물론 그녀는 자신의 부모에게 애정 같은 것은 한 터럭도 남지 않은 느낌이었다. 이 집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가족들을 초대하고 싶다고 했지만 그들을 이 집에서 다시 찾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그때, 이베른 후작은 오지도 않았었다.

이런 분위기에 빗대어 이 이야기를 전해도 될까. 이미 깊어서 메울 수 없는 골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까, 아니면 그 깊은 상처가 더욱 깊게 파이는 절망을 느끼게 될까.

“씻고 나올래요? 저녁 먹기 전에 우리 테라스에 앉아서 해지는 거 봐요. 카일러 방에서 노을 보는 거 되게 멋있던데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2층까지 올라온 그녀는 뒤에 따라오는 로제에게 눈짓해서 욕실의 뜨거운 물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그런 일련의 움직임이 정말 이 공작저에서 살고 있는 주인의 모습처럼 자연스러워 보여서 뭔가 불안하게 일렁이던 마음이 한층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카일러가 씻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을 때 테라스로 나가는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금발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바람에 맡긴 채로 의자에 앉아 있는 사샤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녁 먹기도 전에 이렇게 군것질을 하는가.”

“아, 카일러! 식전주예요. 로제가 좋은 술이 들어왔다고 말해 줘서 부탁했어요.”

의자에서 살짝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돌려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보는 것은 꽤나 가슴이 부드러워지는 느낌이었다.

카우치에 앉아 있는 그녀의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건네주는 식전주 잔을 들었다. 선명하게 투명한 분홍빛의 음료가 든 잔 안에서 얼음이 청량한 소리를 내며 짤그랑거렸다.

“노을 색깔이군.”

카일러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리기 전에 살짝 잔을 위로 더 들어 보였다. 이제 막 지기 시작하는 노을과 겹쳐져 더욱 붉어진 그의 잔을 돌아보며 사샤도 웃어 보였다.

“색깔이 정말 예뻐요. 맛도 좋고. 여기 와서 술도 처음 마셔 보는데, 로제가 맛있는 걸로 골라 주는 거겠죠? 다 너무 맛있어서 큰일이에요.”

장난기 담은 목소리로 조잘거리는 사샤의 머리를 빗듯이 쓰다듬어 주었다. 부스스하고 푸석하던 머리카락 대신 손바닥이 미끄러져 내릴 듯이 윤이 나고 부드러웠다.

“마법사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네요.”

술을 홀짝홀짝 마시며 더욱 붉어지는 하늘을 바라보던 사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너무 무거워지지 않게, 되도록 밝은 목소리로.

카일러는 어쨌든 아무런 말도 없이 지나갈 수 없는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따뜻한 물에 씻으면서 머릿속을 정돈했다.

“마법사는 게라넬의 시초가 되는 모임의 일부였을 뿐이다. 지금의 게라넬이 만들어지고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될 때…… 처음에는 황실의 지휘 아래 시작되었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지혜만 나누어 준 채 슬쩍 발을 뺐지.”

“으음…….”

카일러는 조곤조곤 느리게 말을 이었다. 자칫 역사 수업처럼 들릴 수도 있을 듯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가 나한테는 딱 좋은 듯했다.

“그래도 초창기에 함께했던 사람들이라면 오히려 자기네들한테 그런 중요한 기록 같은 게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좀 게으르신 모양이네요.”

입술을 삐죽이며 하는 대답이 귀엽다. 카일러는 낮게 웃음소리를 내며 그대의 말이 맞다, 동조해 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그 마물을 만나러 가 보겠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것은 모험이었다. 그때 만난 그 마물 둘이 우연한 일이라면, 다음에야말로 방심한 틈에 당해 버릴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이다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두 사람 다 이렇다 할 결정이 없었다. 해결을 목적으로 앞만 보고 달려갈 것인가, 아니면 긴 인생의 목표 정도로 생각하고 안정적으로 싸워 나갈 것인가 그도 아니면…… 이제까지처럼 마물이 위험할 때에만 나가서 그들을 처치하고 말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게라넬과의 싸움이 될 수도 있고, 여기저기서 호시탐탐 반란을 노리는 자들과의 싸움일 될 수도 있었다.

마물을 처치하는 것만이 그의 모든 일은 아니지만 카일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마물로 인해 괴롭혀지는 그의 청각일 테니까 고민은 깊어졌다.

사샤의 손을 감싼 커다란 손. 저택으로 돌아와 씻는 사이 외에는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있어서 귀로는 들려야 할 것들만 들리고 있는 아주 평온한 상태였다.

“내가 공작저를 안 나가면 돼요. 이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사샤는 자신의 손을 감싸는 힘을 느끼며 그렇게 말했다. 대수롭지 않게 꺼낸 사샤의 말. 그런데 갑자기 그 말에 카일러와 사샤 모두의 머릿속으로 핑, 깨달음이 울렸다.

‘게라넬의 수장, 마물을 컨트롤하는 집단, 다락방에 딸을 숨기고 키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 설마 그놈, 알고 있었던 건가.’

‘본래 후작저에서 살던 때에도 다락방에 가둬 놓고 못 나가게 했었는데…… 설마, 아니야……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녀가 어딘가를 나갈 때, 특히나 우할린 숲으로 갈 때 마물이 나타나는 확률이 높다는 부분 때문에 공작저 안에서 지내겠다고 자발적으로 말한 것을 보며 그녀가 다락방에서만 지내야 했던 것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것이다.

심지어 카일러는 이베른 후작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마물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강한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각자의 생각 때문에 둘 사이에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각자의 가슴에 품은 의심을 내보이지 않은 채로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을 애틋하게 빛낸다.

붉었던 노을은 이제 점점 군청색으로 청명하게 물이 들고 있었다. 착잡한 생각일랑 잠시 접어 두고 사샤는 테라스 너머 펼쳐져 있는 공작저의 후원을 바라보았다.

“저기 너머에 작은 연못 하나 만들어 볼까요?”

자신의 방에서도 아주 잘 보이는 저기 저쪽에, 자주 가는 회양목 벽이 바라다보였다. 이제 해가 많이 기울고 붉은 기도 거의 사라진 하늘 아래 어둠이 제일 먼저 삼킨 숲을 바라보았다.

분수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것도 좋았지만 좀 더 자연스러운 것이 보고 싶었다. 연못 또한 인공으로 만드는 것이지만…….

“그건 어렵지 않지. 음…… 그보다 시냇물은 어떤가. 그저 고요히 고여 있는 것보다는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좋던데.”

그녀는 거의 농담으로 꺼낸 말이었는데 그는 심지어 스케일까지 더 키워 버렸다. 그가 말하면 진짜 공작가 후원에 물길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우할린 숲을 떠올리는 듯한 그의 말에 사샤의 얼굴에도 배시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하얀 정자도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아예 우할린 숲의 그곳을 여기다가 만들어요.”

밝은 톤의 목소리에 진짜 기대가 담긴 것을 그도 느꼈는지 입꼬리를 슬쩍 올려 웃었다.

“그곳을 정말 좋아하는군.”

“우리 첫 데이트 장소 중 하나니까.”

그 기분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 게 흠이었지만 그렇다고 그전까지 그와 함께 그 신비한 숲을 걸으며 좋았던 감정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시 또 마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뻔한 것을 누르고 거기서 말을 멈추었다. 그 전까지의 기억이 아름다웠듯이 기억도 거기까지만 하고 싶었다.

밀고 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부분만 퇴색하여 사라져 주지 않을까 하는 살짝 귀여운 바람을 담아서.

카일러는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머리에 살짝 입을 맞춰 주었다. 쿡쿡 웃으며 머리통에 입 맞추면 어떡하냐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것은 몰라도 되겠지. 평생 몰라도 손해되지 않을 일은 굳이 이야기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카일러는 그렇게 그녀를 보듬어 준 채로 이 일을 넘겨 버렸다.

정말 단순하고도 단순하게, 그저 두 사람이 함께하는 앞으로를 바라면서, 지금 눈앞의 이 미소를 지켜 주겠다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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