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어지간히 급하셨던 모양이십니다. 이런 곳까지…… 다 찾아와 주시고 말이죠.”
한 저택의 식당, 기다란 테이블 끝 상석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이베른 후작이 맞은편 끄트머리의 의자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이곳은 산맥 너머 이베른 후작의 집, 식당. 바깥에는 힘센 고용인들의 철저한 감시 아래 은밀한 만남이 이어지고 있었다.
얼굴을 베일로 가린 채 고요히 앉아 있던 여인은 그의 등장에도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혼자 이야기를 하던 이베른 후작은 건너편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신을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시간을 내주어 고맙네.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지.”
그녀는 꼿꼿한 자세에 우아를 가장한 오만으로 목소리를 무장한 채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누가 보면 황후전인 줄 알겠단 말이지. 이베른은 저쪽에서는 안 보일 만큼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테이블 위에서 맞잡았다.
“편지를 받았을 때 이미 제가 누구인지를 알고 보내셨더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베른은 이인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녀가 이제 말할 차례였다. 다시 입이 열리기 전에 10분쯤 시간을 보냈지만 이베른은 다른 말을 덧붙이지도 않았고 자신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시선에서도 태연했다.
베일 뒤에서 눈살을 한껏 찌푸린 여인은 짜증을 억누르며 겨우 입을 뗐다.
“그럼 도와줄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인가 황실 차원에서 도움이 될 일이 분명 있을 텐데?”
게라넬 또한 단체. 그렇다면 역시나 할 일이 없었다. 그 계속 상승을 위해서 황실과 이런 뒷줄이라도 잡아 놓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눈앞의 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엘리나를 황후로 만들면 되는 거였는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 이베른은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다시 맞은편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원하시는 것인지 말씀을 해 주셔야 저희도 도울 수 있는지 없는지 보지 않겠습니까.”
이베른은 나긋나긋하게 이번에는 곁에 마련되어 있던 찻잔에 손을 댔다. 그가 이렇게 여유로운 자세로 그녀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그 뒤는 끌려가는 일밖에 남지 않을 것이었다.
여인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곱고 붉은 입술이 짓이겨지는 것을 보니 오히려 이베른은 살짝 더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그녀가 해야 할 말이 무엇이 있다는 것인가.
“게라넬에서 조금 탐내지 않을까 싶은 사람이 하나 있어서 말이지.”
이베른은 생각했던 그 어떤 예상안과도 전혀 다른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그녀가 꺼낼 만한 이야기도 아닐뿐더러, 그 어떤 누구도 그에게 제안할 법한 애용이 아니었다.
탐을 낼 사람이라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면 마물과 관련된 일일 텐데, 그런 사람들은 알아서 찾아내고 훈련하여 잘 써먹고 있었다.
“지금 게라넬은 나름 친절하게 굴고 있지만 어디 누구를 믿어야 할까요, 저희가? 특히나 황궁에서 나온 그저 그런 심부름꾼도 아니고 말이죠.”
이베른의 머리에는 그녀의 말이 별로 와서 꽂히지는 않았다.
심드렁한 그의 반응에 당황한 듯 보였던 그녀는 이내 입가에 본래 여유롭게 짓고 있던 미소를 올렸다.
얼마 전 마물이 통제를 벗어나 숲에 내려간다고 들었다. 그런 면에 있어서 분명 혼란을 겪고 있을 터였다.
“마물 통제에…… 요즘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은가?”
이베른이 미간을 훅 찌푸리면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그런 소문은 대체 어디에서 나느냐 이 말이지.
이베른은 헛기침을 하고는 똑바로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게라넬이 이어져 오는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 사실이라면…… 정말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게 정말이라면……. 보여 주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인지 말입니다.”
그가 진지하게 받아치자 그제야 그녀가 씨익 웃었다.
“아마 정체를 들으면 깜짝 놀랄걸. 바로 이그노트 공작저의 공작부인, 사샤다.”
이베른은 날숨을 들이쉬며 그녀가 꺼낸 말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사샤……. 사샤.”
“그래, 사샤. 이 집안에서 나온 영애겠군.”
안 그래도 초입에서 보았던 숲의 분위기를 떠올리자 그 평온함이 그녀의 속을 뒤집고 있던 참이었다. 이베른이 커다란 동요를 보이는 것이 꽤 마음에 들었다.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야. 황제 폐하와 카일러 공작, 그리고 마법사가 조용히 나누는 이야기를 지금 들려주고 있는 거라고.”
“그래서…… 부탁하고 싶으신 것이 뭡니까?”
“이런, 다 알고 있으시면서 이젠 특별히 설명을 다 해 드려야겠어?”
그녀는 어느샌가 입을 귀 끝까지 올려 웃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산맥으로…… 길을 안내해 줘. 그녀가 들어갈 수 있도록.”
이베른은 이 무시무시한 제안을 하는 그녀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이 이베른 후작이라는 것을 알고, 그 이그노트 공작부인이 제게 이런 부탁을 하려는 거라면…….
“지금 말씀하신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하는 말씀이십니까.”
이베른의 목소리가 방금까지보다 현저하게 낮아져 있었다. 그런 반응쯤이야 짐작하고 있던 그녀는 그저 입술을 끌어 올릴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마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 전해 들은 것이지만 그는 딱 그 정도만 버텨 주면 되는 일이 아닌가. 들어가서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게라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될 거냐는 말이야.”
그녀는 슬슬 눈을 빛내면서 설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베른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도 모른 채로.
“아…… 그렇지. 그러한 능력이 있던 걸, 혹시 알았던 것은…… 아닌가, 이베른 후작?”
“예? 그게 무슨…….”
그녀가 꺼낸 난데없는 말에 이베른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능력? 제가 알고 있었다고?
“마물과의 그런 미묘한 교류가 의심되는 가운데…… 그대는 게라넬의 수장으로서 그녀를 그대로 둘 수가 없었던 것이지.”
가문을 위해, 게라넬을 위해, 더 나아가 제국을 위해서…….
“그래서 그녀를 감추기 위해 다락방에 가둔 것 아니겠나?”
그녀의 붉은 입술이 이렇게 사악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베른은 살짝 머리가 띵할 정도였다.
정작 당사자인 이베른 후작, 후작부인마저도 쉬쉬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 자세한 부분까지 생각해 주지 않았어도, 엘리나 역시 언제든 달려들어 뭐든지 언니에게서 빼앗아 가곤 했었다.
하지만 그런 후작부인과 동생이라고 해도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이었다. 그게 혈혈단신이 된 그녀에게 손도 대지 않는 이유였는데, 일이 위태롭게 흐르고 있었다.
“하면…… 무엇이 제게 좋은 것입니까.”
이베른은 한껏 무너지려는 표정을 붙들고 테이블 위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누군가. 자네도 잘 알고 있다시피 나는 황후야. 황제의 총애를 받아서,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도 사랑받고 있는 황후라는 말이지.”
그녀, 미디에나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이베른은 심장이 싸하게 식는 게 느껴졌다.
리디안이 좋아해 마지않는 황후, 그런 황후가 자신의 위치도 망각한 채로 마음을 흘리고 다니는 카일러 공작, 그리고 그런 카일러가 선택한 여자 사샤 이베른.
그녀의 후원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제는 사샤에 대한 이야기가 얽히기 시작한 것이다. 섣불리 시작하지 못하는 지옥에서 살아 나간 아이의 말은 누구든지 들어줄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지금 등에 이그노트의 이름마저 업었다.
이베른의 표정 변화를 즐기고 있던 미디에나는 앞으로 몸을 조금 숙였다.
“사샤 그 여자의 일…… 새어 나가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베른 후작님께서 게라넬의 수장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쌓아 온 이미지인데 말이죠. 부드러운 카리스마라 하던가?”
맑은 웃음소리가 식당을 스쳐 지나갔다. 웃음소리가, 그녀가 얼마나 어린지를 증명해 주어 이베른은 약간 더 깊은 고민에 빠져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긴 합니다……. 세상에서 이베른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제게는.”
미디에나의 입술에서는 미소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붉은 입술을 놀렸다. 이베른이 보기엔, 그녀의 입술이 오히려 마녀 같았다.
이베른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뭐 불치병에 걸리거나 시한부가 된 것은 아닌지라 시간이 얼마 없고 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마물을 끌어들이는 체질이라면 지금을 지체해서 좋을 것은 없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꼭꼭 가둔 것 보면…… 단순히 없앨 수도 없었나 보지? 괜찮으면 나와 함께 나가요. 내가…… 도와줄 테니까.”
미디에나의 제안은 너무 솔깃한 것이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 있듯이 사샤의 존재가 그런 것이었다.
마물을 밀어내는 줄로만 알았는데 마물을 당기기도 하여서 그녀를 쫓아 저택까지 들어오는 마물들 때문에 위협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당장 죽일 수도 없고 멀리 보내 버릴 수도 없었다.
어려서 통제가 가능했을 때에야 다락방에 두고 살 수 있었지만 하루하루 날이 지나고 저 눈 밖 어딘가에서 성장하고 있을 생각만으로 소름이 끼쳤다.
솔직하게 그는 이그노트가 데려간다 했을 때 환호했다. 이렇게 정리가 되는구나, 하고.
그런데…….
“산맥으로…… 그녀를 보내라는 말씀이시죠?”
“그래. 좋게 살아 돌아오면 좋은 건데…… 그럴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녀의 진심으로 기분 좋은 입꼬리를 보며 이베른은 그저 눈살을 찌푸릴 수박에 없었다. 지금 이 제안을 끝내 자신이 뿌리치지 못할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