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우와…….
돌아오는 길에 사샤는 넋이 빠져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무슨 일을 하고 온 것인지 전혀 실감이 나진 않았다.
카일러 또한 그 일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넋이 나간 사샤와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자리에 앉아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카일러.
“어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제가 돌아가라고 하니까 간 거 맞아요? 막…… 마물은 막 싸움을 하다가 문득 산맥으로 도망치듯이 돌아가는 경우도 있어요?”
사샤는 아직도 넋을 좀 빼놓은 채로 카일러의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일러는 묵묵히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런 경우는 처음 보았다. 마물은 기본적으로 호전적이라 사람을 보면 공격한다. 그리고 도망가는 일은 현저히 드물다. 특히 아까처럼 이길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는 싸움에선…….”
그 장면은 누가 보아도 마물과 대화를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이지? 마물의 존재를 소음으로 전해 듣는 자신의 능력 아닌 능력도 기록으로도 남은 게 없는 것이었는데, 마물과의 대화라니 듣도 보도 못 했었다.
“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네요. 저, 괜히 나선 걸까요?”
신기해하는 멍한 타임이 지나가자 그녀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드리웠다. 카일러는 씁쓸한 미소를 띠우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네가 뭘 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어. 괜찮다.”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그 또한 사샤가 하고 있는 걱정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도 그의 말은 안심이 되었다. 만약 그녀가 마물이라면 고통 없이 단숨에 죽여주거나, 그런 정체조차 미뤄 두고 자신을 지켜 줄 사람이었으니까.
이렇게 믿음직스럽고 멋진 남자라니. 사샤는 이 와중에도 그를 향해 하트를 날리고 있었다.
“응. 고마워요. 내가 좀 더 명확하게 그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면 도움이 되었을 텐데요. 그렇죠?”
그런 부분은 조금 아쉬웠다. 저의 말을 그들이 알아들어 준다는 것 또한 어느 정도의 일인지 감도 잡지 못할 지경이었지만 그들의 말을 온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매우 아쉽게 느껴졌다.
“정말…… 아쉬워요. 말이 제대로 통하면 어디서 생성되는지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직도 넋을 놓은 듯이 몽롱하게 말하는 사샤의 말에 카일러는 슬쩍 미간을 좁혔다.
생각보다 기억을 잘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처럼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카일러는 황제의 알현실 소파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진지한 얼굴로 맞은편의 백발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과 수염 때문에도 눈이 부실 것 같은데 옷까지 하얀색으로 갖춰 입은 마법사를 강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자 그 노인네는 그 눈길에는 아랑곳없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마물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면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고 울음소리의 끄트머리를 올리면 질문하는 것 같고?”
점잖아 보이는 외모에 비해 장난기 많고 비아냥이 가득 담긴 마법사의 얼굴에 카일러는 한층 더 미간을 찌푸렸다.
“그딴 태도로 일관하면 마법사의 탑이고 뭐고 부숴 버리는 수가 있어.”
그때 상석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황좌에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리디안의 목소리였다. 편안하게 앉아 카일러가 전한 이야기를 듣고 비웃음을 머금고 있던 마법사의 얼굴이 자신의 수염이나 옷처럼 하얗게 질려 버렸다.
얼굴까지 하얘지니 그냥 하얀 덩어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폐, 폐하.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의 탑을…… 애초에 그 탑을 무슨 수로 부수시려고……. 하, 하하.”
“무슨 수? 지금 무슨 수라고 했나, 내게?”
리디안의 한쪽 입꼬리가 무섭도록 위로 올라갔다. 평소에 잘 볼 수 없었던 리디안의 ‘무서운’ 면모가 오랜만에 아주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이게 아는 사람들을 안다는 리디안의 무서운 면인데, 실제로 본 사람은 많지 않다는 일명 ‘미친 황제’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무시무시한 말을 하는데, 그게 거짓말이 아닌 것이다.
그가 내뱉은 말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끔찍한 일이었는데……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계속 그의 마음을 풀어 주지 못한다면 그 끔찍한 상상을 현실로 기어코 만들어 내는 이였다.
“오랜만에 내가 아주 즐겁게 웃는 얼굴을 자네가 끄집어내 줄 요량인가 보지?”
눈동자까지 형형하게 빛나자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는지 늙은 마법사는 바로 눈을 피하고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아니, 뭐……. 예, 부술 수 있는 분이시죠, 충분히…….”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웃으며 다시 카일러를 보았다. 그는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도 않고, 면전에서 황제에게 까인 자신을 측은하게 본다든가 놀리는 얼굴 또한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제까지 계속해서 진지했을 뿐이었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마법사는 황제의 눈을 한 번 의식한 후로 진중한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그러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었어요.”
마법사가 하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옛날에야 마물을 통제하는 방법들이 활발하게 새어 나가 각종 필드를 장악하고 게라넬이라는 집단까지 생성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곧 마물들이 귀찮아지기 시작한 마법사들은 그들이 머나먼 산맥에서나 살고 있는 것을 핑계로 마물들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아졌다.
그렇게 게라넬이 몇 대를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원리를 잃어버린 틈에 마법부에서도 마물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 그간의 기록들이 허술하기까지 했다.
“기록은 빼먹은 것인가 아예 없었던 것인가.”
카일러가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 마법사에게 확인차 물었다. 친근하게 밀고 들어가는 것까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대신에 최대한 부드럽게 질문을 이었다.
“탈락된 흔적 같은 것은 없습니다. 아예 없었습니다.”
마법사는 카일러의 물음에 대답하고는 당사자인 사샤를 바라보았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조사하게 만든, 독특한 능력을 보이는 여인은 작고 아름다웠다. 겉으로 보기엔…… 그것이 전부였다.
“흐음…… 굉장히 독특한 상황인 것은 분명해 보이는군. 마물의 소리를 듣는 남편에 마물과 소통하는 부인이라니. 그럼 마법사 또한 이 마물이 어떻게 생성이 되는지, 어떻게 해야 이들을 모두 산맥에서 없앨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의견이 없다는 것인가? 전혀?”
리디안이 다시 한번 끼어들자 마법사는 눈치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모른다고 하면 아마 그를 마탑의 꼭대기 방에 가둬 버릴 것만 같았다.
“그, 그렇습니다. 없애기 위해선 생성의 원인을 알아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는 말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찾아보는 것은 어떻겠나. 아주 오래전의 기록이 남아 있을지 누가 아는 것이지?”
카일러는 리디안 못지않게 서늘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의 목소리는 리디안만큼이나 얼어붙을 만큼 차가워서 마법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거야 맞는 말이다. 찾아보면 언젠가의 책 하나는 나올 것이었다. 물론,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는 전제하에.
“기록은 언제나 살펴보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발견하면 연통을 넣겠습니다.”
“음……. 좋다. 폐하, 저 는 이길로 돌아가면 마탑의 산으로 움직이겠습니다.”
카일러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뭐 불치병에 걸리거나 시한부가 된 것은 아닌지라 시간이 얼마 없고 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마물을 끌어들이는 체질이라면 지금을 지체해서 좋을 것은 없겠다는 판단이었다.
“마법사의 도움은 이제 필요가 없는 것인가. 그럼…….”
“아이고, 저희가 어떻게 도움을 안 주고 그러겠습니까? 그게 그러니까……. 아, 좋은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리디안은 얼른 이야기를 마치고 다음을 진행하려고 했을 뿐인데 제 발 저린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그냥 아무 말이나 꺼낼 거면 그냥 가 주면 좋겠는데. 리디안의 표정은 딱 그것이었다.
호기롭게 꺼낸 말이 왠지 먹히지 않는 분위기에 마법사는 엉덩이가 들썩였다.
사실 그는 황궁에서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황실에 도움이 되어 연구비 명목으로 돈을 좀 받으러 온 참이었다. 최근 재정이 좀 좋지 못한 것이 계속 그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물 이야기를 꺼내질 않나, 심지어는 마물과 대화가 통한다는 여자의 이야기를 꺼내질 않나…….
마물과 말이 통하면 마녀겠군요, 하고 말하려다가 분위기를 보아 참았던 것인데 살짝 비꼬는 말 좀 꺼냈다고 미친 황제가 튀어나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말이다.
돈 좀 벌어 가려다가 마탑이 부서지는 꼴을 볼 뻔했다.
결국 그가 꺼내 든 좋은 정보가 있다는 이야기에 다시 한번 황제와 공작의 눈이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미친 황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음송곳 카일러의 눈동자를 슬쩍 피해 그의 코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마물에 대한 정보는 마물을 오랫동안 다뤄 온 이들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법사들이야 아주 처음 마물을 다루는 일에 도움을 줬을 뿐이지 꽤 초반에 손을 뗐던 일이라 말입니다.”
마법사가 꺼내는 말에 두 사람은 김이 새는 듯 얼굴도 눈동자도 미동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살짝 위기감을 느낀 마법사는 손을 내저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게라넬을 모르십니까?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마물을 다뤄 왔는지, 무시할 수 없는 집단일 것입니다.”
쓰읍, 흥분하는 마법사를 가라앉힌 것은 황제였다. 그가 허리를 앞으로 수그리자 마법사가 슬쩍 쪼그라드는 것이 보였다.
“게라넬을 모르는 이가 있는가. 문제는 그 수장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지.”
“그겁니다! 제가 드리려 했던 좋은 정보 말입니다!”
게라넬이야 유명한 이름이었지만 그 수장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맡아 오는지조차 모를 정도다.
황제와 공작의 시선이 고요히 그를 향했다. 마법사는 입을 열기 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