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두 사람은 그렇게 거리를 유지한 채 살짝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정자를 나서 서로의 시야에 손가락만 하게 보이는 정도의 거리를 두고 저쪽 편에 딜런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바라보고 있는 방향도, 딜런이 서서 바라보고 있는 방향도 모두 산맥이 있는 방향이었다.
“혹시 내려오면 물리치는 게 아니라 붙들고 있어 줄 순 없어요?”
“……아직도 그 소리.”
사샤는 입술을 비죽였다. 카일러는 그저 마물이 내려오는 기척만 확인하고 갈 것이라고 했다. 처리는 딜런이 해 줄 것이고, 그사이 사샤는 카일러의 품에 안겨서 유유히 숲을 빠져나갈 것이었다.
그게 그의 계획이었지만 사샤의 계획은 전혀 달랐다.
“으음,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카일러랑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좋긴 하지만…….”
“안 오는 게 더 좋지 않겠는가.”
“안 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잖아요.”
긴장되는 침묵은 싫어서 사샤는 또 발랄한 척 말했다. 사실은 심장이 정말 방아를 찧듯이 쿵덕쿵덕 찧어 대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녀가 종알종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어필하고 있는 동안 카일러의 귀에는 점점 못으로 긁는 듯한 날카롭고 신경을 마구 거슬리는 소리가 커졌다.
눈앞의 이 여인은 정말 해맑고 예쁘게 웃고 있는데, 그녀를 향해서 마물들이 모이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다행히도 여럿은 아닐 것 같았다.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기에 소리가 커지긴 했지만 그게 여러 개는 아니었다. 이렇게 소리의 디테일을 느끼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세세한 전달에 오늘만큼은 고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키이이익!
왔다.
같은 곳을 보고 있었지만 두 사람 다 옆의 사람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저 앞의 딜런은 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와…… 진짜 왔네요?”
“확인은 끝났다. 가자.”
카일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사샤는 몸에 힘을 주어 자리에 붙박인 듯 멈췄다.
“사샤!”
“잠시만요!”
카일러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사샤도 지지 않았다. 사샤는 쐐애액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마물을 지켜보았다. 쾅!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 마물이 날개를 휘둘러 단번에 딜런을 뒤로 날려 버렸다.
“사샤! 가야 한다!”
카일러가 그녀의 앞을 막으며 외쳤지만 사샤는 굳이 그의 몸을 붙들고 옆으로 고개를 한껏 내밀었다.
뒤로 물러난 딜런을 마물이 쫓아오느라 마물 또한 한껏 가까워져 있었다.
지난번 사샤의 앞에 나타났던 것보다 크기가 훨씬 큰 것 같았다. 귀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는 그 생명체를 바라보는데, 카일러의 뒤에 있어서인지, 아니면 뭔가…… 정말 느끼는 것이 있는 건지 무섭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마물의 크기가 컸다. 원래 보통 보아 오던 마물 정도였으면 딜런이 뒤에 지킬 사람들을 두고도 안적정인 제압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앞서 있지만 비교적 가까이에 있었고, 카일러가 사샤를 맡고 그가 혼자 마물을 상대하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려온 마물이 상상 이상으로 크기가 컸다. 이 정도면 카일러쯤 되어야 혼자서 제압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사샤를 데리고 도망을 갈 타이밍도 애매해진 데다가 딜런이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자 카일러는 칼을 뽑아 들었다. 지금 나가면 두 사람을 지킬 수 있을까, 딜런을 놓고 사샤를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 맞는가.
한 번의 선택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찰나의 순간, 검을 뽑아 드는 그 순간에 카일러의 머릿속에서 짧은 고민이 스쳐 지나갔다.
“멈춰어어어!”
그때였다.
고민을 마치고 앞으로 튀어나가려던 카일러는 자신의 뒤에서 커다랗게 터져 나오는 고함 소리에 숨을 흡 들이쉬었다.
사샤가 자신의 뒤에서 앞을 향해 소리를 빽 지른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몰라 카일러도, 저 앞에서 버겁게 싸우고 있는 딜런까지도 어깨를 흠칫할 정도였다.
사샤는 무슨 생각인지 비장한 얼굴을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흡, 잠깐 숨을 머금은 사샤는 다시 한번 두 눈을 질끈 감고 소리를 질렀다.
“멈추라고오!”
키이익거리던 마물의 소리를 잡아먹은 사샤의 한껏 지른 목소리가 숲에 우렁차게 울렸다. 카일러는 사샤의 외침대로 멈춰 버렸고, 딜런마저 멈춰 버릴 뻔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일이 일어나 버렸다.
키이…….
한껏 딜런을 향해 내리찍었던 날개 끝의 발톱이 딜런의 칼에 챙하고 부딪쳐 튕겨 나간 뒤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로 내리찍으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이 마물의 날개가 허공에 멈춰 있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며 멈춰 있던 마물이 고개를 슬금슬금 돌렸다.
카일러는 마물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보고 흠칫했다. 자신은 지금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판단을 빠르게 해야 했다. 이쯤에서 도망을 칠지, 아니면 지금 제 귀를 긁듯이 울리고 있는 소음을 믿고 뛰쳐나가서 저 마물을 처리해야 할지.
그런데 사샤가 주의를 끈 것인지 마물이 움직임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을 세워 쥔 카일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마물의 고개가 슬금슬금 오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엇을 보고 있길래 움직이는가 하고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카일러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자신의 허리춤을 붙들고 뒤에 서 있던 사샤의 인기척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움직이는 방향이 정확하게, 마물의 고개가 움직이는 방향이었다.
“좋아! 자, 이제 말해 봐!”
“사샤 님!”
딜런이 크게 소리쳐 보았지만 사샤도 카일러의 뒤로 다시 숨지 않았고 마물의 관심도 돌릴 수가 없었다. 마물은 이미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정신이 온통 거기에 쏠려 버린 듯했다.
카일러는 그저 조심스럽게 사샤의 옆으로 가서 섰다. 어차피 마물은 그녀에게 온 신경을 집중한 참이었다. 그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사샤의 곁으로 붙었다. 딜런도 카일러의 움직임을 읽고 마물을 막고 선 몸을 서서히 움직여 살짝 이쪽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이 마물이 갑작스럽게 움직이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 거리를 확보하고 있을 때 마물이 한 발 이쪽으로 다가왔다.
사샤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가 보아도 딜런에게는 좀 버거운 상대처럼 보였다. 카일러가 얼른 달려가서 도와주면 금방 끝날 듯했지만 그는 지난번처럼 싸우고 있는 와중에 다른 마물이 사샤의 앞을 가로막을까 걱정하는 것인지 신중해져 있었다.
사람 앞에 나타나기만 하면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공격부터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밑져야 본전, 사샤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큰 소리로 외쳐 보았다. 지난번 자신을 향해 키이이, 하고 울던 마물을 보며 겁을 먹은 게 아니라 네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겠다 중얼거렸었다.
실제 마물이 눈앞에서 그런 소리를 내고 있으면 보통을 ‘마물이 운다’고 하면서 겁을 집어먹었겠지, 그녀처럼 생각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정도뿐일지라도, 소통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그녀의 목소리에 마물이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움찔대는 그 마물이 단순히 소리에 멈춘 건가 싶어 다시 외치자 마물은 정말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기까지 했다.
카일러와 딜런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샤는 카일러의 뒤에 숨어 있던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마물의 시선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보며 확신했다.
“너! 돌아가!”
최대한 또박또박 큰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숲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숲 본연의 소리, 졸졸졸 물소리와 나뭇잎이 스삭이는 소리만이 흘렀다.
키이-!
마물이 살짝 소리를 내며 울었다. 마치 그녀에게 ‘그렇지만……’ 하는 말로 대꾸하는 듯이 느껴졌다. 그냥 느낌인 걸까.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이렇게 대답할 거야 하는 추측일 뿐일까.
키익, 키이이.
마물이 정말 뭔가 말을 거는 듯이 소리를 냈다. 사샤의 곁에 바짝 붙어선 카일러와 마물의 몸이 한눈에 들어올 만큼 이쪽으로 물러선 딜런 또한 그 미묘한 분위기를 읽었다.
그냥 짐승의 소리를 낸다기보다는 대화를 시도하려는 듯한 그런 느낌.
“그치만, 그치만…… 미안해! 지금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여기 있으면 죽으니까! 산맥으로 돌아가!”
하지만 사샤도 명확하게 그 뜻까지 이해를 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키이……. 하는 수그러드는 마물의 소리를 들으며 사샤는 미간을 찌푸리곤 눈썹을 늘어뜨렸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대치해 보자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마물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간단한 액션 같은 것은 알 수 있을 거 같은데 명확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았지?
하지만 그것마저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저 느낌으로 대화하고 있는 듯했다. 그 와중에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마물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
키이익!
마물이 한 발짝 더 이쪽으로 다가왔다. 딜런이 다시 한번 검을 고쳐 잡고 휘두르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마음이 급해진 사샤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여기가 아니야! 산맥으로! 산맥으로 돌아가!”
팔을 휘저어 저 뒤쪽, 마물이 날아온 방향을 가리키며 외쳤다.
카일러와 딜런은 사샤의 외침을 들으면서도 검 손잡이를 쥐어 잡은 손에 힘을 꽉 쥐었다.
곧 그 마물이 튀어나올 것을 예견한 두 사람은 사샤도 마물도 눈치채지 못하게 공격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키익!
마물은 사샤를 향해 고개를 빼 가며 크게 울고는 작은 날개를 있는 힘껏 펼쳐 올렸다. 펄럭, 몸집에 비해 작다고 생각했던 날개가 쫙 펼쳐 공기를 한번 내리치자 그 몸이 공중에 훅 날아올라 버렸다.
“그래! 가!”
사샤가 끝까지 인사를 잊지 않는 그사이, 마물을 휙 공중에서 회전해서는 엄청난 빠르기로 날아 산맥 방향으로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