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번화가의 끄트머리를 슬쩍 지나 숲의 입구에 도착하는 길이 이제는 좀 눈에 익을 거 같았다.
“오늘은 근처에 있겠습니다.”
천천히 사색하듯이 걸어 하얀 정자 앞에 도착하자 딜런이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뒤로 빠졌다. 저번에는 아예 숲의 입구에서부터 헤어지더니, 오늘은 따라온다 했다.
두 남자의 시선이 슬쩍 엉켰지만 별다른 그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정도의 일이라고 생각한 사샤는 카일러를 따라 정자로 들어갔다.
공작저이 회양목 뒤에 앉아 공기 중에 부서지는 물방울을 보는 것도 꽤 마음에 들어 했는데, 아무래도 나는 물을 보는 것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곳은 역동적인 물의 흐름이 있는 곳도 있고, 거울처럼 잔잔한 물의 표면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멋들어지게 자라난 나무들과 물이 어우러졌을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여기에서 처음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풍경을 감상하는 중간중간 자꾸 눈길이 다른 쪽으로 쏠리려고 했다.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옆얼굴이 짙은 시선에 따끔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샤는 밖을 내다보던 시선을 거두어 옆을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시선 전환에 그의 푸른 눈동자가 살짝 떨리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세요?”
웃지도 않고 그렇게 물어보니 아까보다 눈동자가 좀 더 세게 떨렸다. 왜 쳐다보냐고 따지는 것처럼 보였을까. 그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잠깐 동안 그렇게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런데 뭔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할린 숲으로 먼저 오자 말한 것이 카일러라는 것에서 이미 눈치를 챘어야 하지 않았을까.
방금 근처에 있겠다며 눈빛을 주고받은 것까지 생각하면 의심이 아니라 거의 확신인 셈이었다.
“이제 보니 할 말이 있는 얼굴이네요.”
“……보이는가.”
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움직였다. 이제 곧잘 웃는 것 같은 카일러는 짓궂은 듯 미안한 듯 눈썹을 찡그린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사샤는 얼핏 긴장한 듯도 보이는 그의 미간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톡, 톡, 건드려 보았다.
얼굴의 근육 하나하나가 매끈하고 멋진 선을 만들어 주는 듯한 얼굴에서 가장 멋진 선은 역시 콧날이었다. 베일 듯하다는 말에 코웃음을 치던 어린 날의 나를 실컷 비웃어 주어야겠다.
그 말의 실물을 나는 확인해 버렸으니까.
“그러게요. 몰랐는데 보이네요, 그게.”
사샤는 그의 얼굴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흐르는 물을, 잔잔한 물의 표면을 하염없이 바라보듯이, 그를 바라보는 데에도 질림이 없었다.
“돌려서 말하는 것은 못 한다. 그래서 나는 진실만 말해 줄 것이다. 무섭다면…… 얘기해야 한다.”
‘해도 좋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고?
대충 무엇일지 감을 잡은 사샤였지만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
“…….”
어지간히도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 하는 모양이다. 사샤를 바라보는 카일러의 눈에 처음으로 망설임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 굳건하던 그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나도 같이 두려워져야 하는 것 아닌가.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와 다르게, 이상하게 사샤는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피었다.
“정확하지는 않다. 그대가 아무래도…… 마물을 끌어당기는 무엇을 가진 듯하다.”
“아…… 그래서 지금 저더러 미끼가 되라는 말씀이세요?”
사샤가 그의 말에 얼굴에서 미소를 싹 거둬들였다. 환하게 피어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한 카일러는 점점 얼굴이 굳어 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을 물리거나 섣불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거나 하지 않았다. 사샤는 그런 그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자신을 내려다보는 위치의 사샤를 바라보며 카일러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래. 그대가 그렇다면…….”
카일러는 사샤의 생각을 받아들이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데려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뭐가 내려오든 내려오지 않든 문제가 안 된다. 방법은 찾으면 되는 것이고, 지금 당장 안 된다고 해서 포기 하……지도…….
“……사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의 어깨를 사샤의 두 손이 꾸욱 눌렀다. 그녀를 올려다보자 역광은 받은 그녀의 얼굴에 다시 아까의 그 배시시한 미소가 퍼지는 것이 보았다.
순식간에 굳었던 심장이 다시 녹듯이 찡하게 저려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굳건하게 맘먹고 데려왔으면서 한마디 했다고 그냥 가는 게 어디 있어요.”
정색했던 얼굴이 거짓말인 양 아까보다도 더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카일러는 더 어색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 같았던 사늘한 그녀는 온데간데없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는 비난의 기색도 긴장하는 기색도 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움직이지 못하게 꾹 누르고 있었다.
카일러는 자신에게 닿아 있는 그녀의 손을 떼어 가지런히 내려 주었다. 그녀가 닿아 있으면 마물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테니까.
“좋게 말해 데려온 것이지, 그대 말마따나 미끼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은 말이다. 저택에서부터 말하고 데려왔어야 하는데, 그대에게 긴장을 오래 주고 싶지 않았다. 여기까지 나오는 길이라도 즐거웠으면 했다.”
조금 어설프다 하더라도 자신을 생각하는 그 마음은 제대로 전해져서 사샤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세상 무너질 듯 긴장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게 이런 이유였다니 조금 웃음이 났다.
“이미 당신이랑 마물 마주쳐 봤고, 그때 날 어떻게 구해 줬는지도 다 아는데요, 뭐. 제국에서 제일 강한 남자랑 아마도 두 번째쯤 되는 남자가 지켜 주겠다고 버티고 있는데 뭐가 무서워요.”
아직도 자신을 탓하며 무거운 눈을 하고 있는 카일러에게 더 방긋방긋 웃었다. 너무 심각해 보이길래 장난 한번 쳐 보려던 거였는데 너무 핵심을 찔러 버렸나 보다.
그가 자신을 떨어뜨려 놓은 이유를 알고 있으니 괜히 더 손대지 않고 근처에 다시 자리 잡고 앉으며 사샤는 조용히 말했다.
“사실은 마물이랑 한 번 더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해 볼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그때, 절 보고 있던 마물이 자꾸 생각이 나더라고요.”
사실은 사샤가 이 숲으로 또 오자고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왠지 그 마물이 자신에게 뭔가 말을 하려고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그녀를 위기에 빠뜨렸다고 생각한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봐 왔기 때문에 섣부르게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마물에 대해 할 만큼 하고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그럴 때 한번 실험해 볼 만한 일은 되지 않을까 하고, 이야기해 보고 싶었었다.
그런 것 외에도 뭔가 자신이 쓰임새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의 말을 듣고 사샤는 오히려 약간 신이 났었다.
그냥 다른 세계에 와서 아무런 대가도 없이 안락한 생활과 심지어 다정하고도 멋진 남편의 사랑까지 받으면서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괜한 부채심이라기보다는, 받는 것만큼 돌려주고 싶은 자연스러운 마음 하나와,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뭔가 해 주고 싶어지는 그런 마음 하나. 그것이었다.
“그렇게 신경 쓸 것 없다. 나는 마물 앞에 그대를 데려가는 일까지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뭐 그 마음이 어떤 건지는 이해한다. 위험 앞에 내놓을 수 없는 마음 때문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때, 마물이 내 눈앞에까지 다가왔을 때, 나는 카일러를 보고 있었어요. 카일러가 이를 악물고 저 멀리서부터 엄청나게 빠르게 다가오는 걸요.”
그땐 너무 놀라서 잘 몰랐는데 다시 그때를 생각하면 할수록 그 얼굴이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정말 죽을 듯이 이를 악물고 달려오던 그 얼굴이 떠오르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지금은 이렇게 제 옆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 심지어 귀도 이렇게 열어 두고.”
사샤가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귀 뒤로 넘겨보았다.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손길에 카일러의 굳었던 얼굴이 살짝 풀렸다.
굳게 마음먹고 데려온 만큼 맘먹고 실행해 줬으면 했다. 심지어 마물과 마주 보게 놔두지도 않을 거라고 하면서 걱정은 되는 모양이었다.
“진짜 이런 모습 절대로 나만 알 거예요.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도 아끼고, 할 일에는 또 열심히 하고. 얼마나 멋있어.”
사샤는 긴장하는 그의 앞에서 아무 말이나 막 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 또한 사람을 잘 다루는 사람은 아니었다. 카일러가 주는 이 순수하고도 직선 같은 사랑을 받는 것에도 조금 어색하고 어설픈 상황이었다.
이런 거 저런 걸 해 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어쩜 조절이 잘 안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저를 위해 마물을 토벌하겠다고 황제한테까지 달려가 으름장을 놓는 카일러나 그런 그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마물 앞에 서겠다고 자처하는 사샤나.
차라리 그래서 더욱 서로를 잘 만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그대는 무조건 지킨다.”
“아무렴도. 카일러가 안 지켜 주면 누가 지켜 줘요.”
괜히 더 능청을 부리는 사샤를 보며 카일러는 피식 웃음이 새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제게 머물러 있기에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안전하게 지켜 주고 싶었다.
마물을 불러들이는 그녀에게 언젠가 위험이 오지 않도록, 귀가 예민한 그가 고통을 이기지 못해 그녀에게 해를 주지 않도록…….
그는 공작이 된 뒤로도 뭔가 직접 능동적으로 나서서 해결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주어진 것만 충실히 하던 카일러가 능동적으로 무언가의 끝을 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의 눈빛이 어느새 비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