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그거, 신경 쓰였어요? 잊고 있었던 것 같은데.”
사샤가 오히려 짓궂게 그렇게 물어 왔다. 큼큼,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던 그를 대신해 사샤가 또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큼, 이런 말 하면 좀 많이 쑥스럽지만…… 처음엔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면서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점점 너무 좋은 거예요. 그게 아마 카일러가 굉장히 조심스럽게 절 대해 줘서였던 거 같아요.”
“큼, 내가…… 그랬던가.”
조심스럽게 꺼내 올린 그날의 기억은 카일러의 목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는 사샤가 용감해 보일 정도였다.
그도 단순한 의무감으로 시작한 것이었는데 중간부터는 살짝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그래서 잠깐 동안 헷갈렸던 적도 있었다. 정말로 이 여자의…… 몸을 원하는 것이었나 하고 말이다.
그렇게 깊게 닿아 있지 않아도 귀는 잠잠해지니까 그것 때문도 아닌데, 어째서 사흘에 한 번씩 무리해서 돌아와서 그녀를 안고 잠이 들었던 것일까.
지금에야 자신의 마음이 움직였고, 이 눈앞의 여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다시 생각을 해 보자니, 사샤가 그때의 자신을 어떻게 회상할지가 걱정이 되었다. 그걸로 지금의 마음을 의심한다고 해도…… 속상할 것 같았다.
사샤는 창밖을 바라보도록 놓인 의자에 똑바로 앉아 밝은 달과 주변에 퍼져 있는 별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그 얼굴에 그늘은 없어 보였다.
“내 마음을 의심하지 말아 줘.”
갑자기 첫날밤을 이야기하다가 자신의 마음을 의심하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그를 사샤가 돌아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카일러는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달밤에 비추는 빛은 촛불뿐이라 얼굴이 붉어진 건 보이지도 않을 텐데.
“처음 시작은 그러했지만…… 절대 그대의 몸만 원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은 정말로 온전하게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다시 그녀를 바라보고는 심장 떨리는 고백을 무심히도 던졌다.
촛불이 일렁이는 선이 깊은 얼굴과 달빛이 비추는 공작저의 홀을 배경으로 그의 고백이 함께 사샤의 가슴으로 화악 박혀 들었다.
“이 밤 또한……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아요.”
그와 밤을 함께 떠올리면 대체적으로 살짝 부끄러운 기억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카일러 또한 가슴이 설레도록 멋있었다.
사샤는 그를 향해서 와인 잔을 들어 보였다. 처음 먹어 보는 것인데 술 마시는 걸 본 적이 없어서인지 붉은 와인이 아니라 단 맛이 나는 와인을 준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던 카일러는 자신의 잔을 들어서 짠 하고 부딪혀 주었다.
“이전에는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가족 간의 사랑이라는 것마저도…… 모르고 살았었으니까.”
약간의 중요한 부분만 빼면, 이전의 사샤와 자신의 삶은 어느 부분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있음에도 받지 못했고 제게는 애초에 없었다.
부모의 사랑이라는 걸 모르고 자란 것은 매한가지였네.
“그래서 좀 서툴지도 모르고 이게 정확하게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내가 느끼고 있는 그대로를.
“나도 카일러를 정말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내가 지금 그를 향해 짓는 미소가 어여뻐 보이기를 바라면서 환하게 미로를 지어 보였다.
전날 밤에는 좀 더 길게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줄 알았는데, 서로의 사랑 고백을 끝나고 나서는 얼마 못 가 카일러의 방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서로가 서로를 온전하게 원한다는 것을 알고 서로를 품는 것은 이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감각이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격정적이었던 느낌에 아침에 눈을 뜬 사샤는 잠이 다 깨기도 전에 얼굴부터 붉어져 버렸다.
정신이 들자마자 그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감각이 화르륵 살아난 것이다.
“일어났군.”
그리고 카일러는 사샤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곧바로 알아채곤 말을 걸어왔다.
“정말…….”
목소리마저 너무 섹시해 버리며 어떡하라고 정말……!
주책이다 싶을 정도로 얼굴을 가린 채 속으로 꺅꺅 내적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샤의 위에서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지도 말아요. 뭐 이렇게 안 멋있는 데가 없지.
그는 아침부터 자극하려 들지 않고 그저 사샤의 동그란 맨 어깨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사샤, 오늘 계획한 일이 있었나?”
어깨를 쓰다듬다 그 언저리를 토닥이기를 반복하면서 카일러가 부드럽게 물어 왔다. 사샤는 그의 손길에 다시 잠들 듯이 두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느리게 대답했다.
“오늘…… 아무 일도 없어요. 도서관에 갈까…… 했는데.”
나른한 햇살과 나른하게 만드는 체온, 손길, 그리고 목소리. 사샤는 행복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괜찮으면 나와 함께 우할린에 가지 않겠나.”
그런데 사샤의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 내가 뭔가 잘못 들은 걸까?
사샤는 그의 품에서 나와 그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자다 일어난 아침인데 어떻게 이렇게 흠결 없이 멋있을까. 너무 멋진 얼굴에 잠시 딴생각에 빠졌던 걸 다시 되돌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걱정이라든지 하는 부적정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좋아요. 카일러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녀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그에게 대답했다. 마음은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듯하지만 아마 제게 그 말을 꺼내기까지 고민도 많았을 거고, 지금도 내심 떨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흔쾌히 대답해 주자 그제야 카일러의 짙은 눈동자가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눈동자마저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 배시시 웃음이 흘렀다.
“그럼 이제 나가야 하는데, 언제 놔줄 거예요?”
몸을 떨어뜨려 그를 올려다보느라 어깨를 감쌌던 손은 떨어졌지만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는 다른 한쪽 팔은 여전히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카일러는 사샤의 능청스러운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밝은 모습으로 그렇게 대답했던 사샤마저 그의 눈빛을 받고 있자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뭐……예요. 안 나갈 거예요? 딜런이 기다리지 않을까요?”
“음, 만약 기다리게 된다고 해도 왜 우리가 늦게 나오는지…… 알지 않을까.”
사샤는 갑작스럽게 능글맞아진 그의 대꾸에 두 눈이 휘둥그레져 버렸다. 기어이 터질 듯이 얼굴이 화끈해진 사샤는 푹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에 이마가 툭 떨어졌다.
“그게 뭐예요. 그럼 더 빨리 나갈래요.”
카일러가 웃는 게 어깨의 들썩임으로 전해졌다.
여러모로 핑크빛이 감도는 공작저의 아침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사샤 님.”
딜런은 거의 점심때가 가까워져서야 나오는 주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허리를 숙였다. 멋쩍게 웃는 사샤에겐 미소를 지어 주고는 카일러를 건너다보았다.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눈빛에도 끄떡없이 눈을 마주치는 그를 보며 딜런은 눈빛을 거두고는 큼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함께 우할린 숲으로 갈 것이다.”
하지만 카일러가 꺼낸 말에는 그를 다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딜런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이 공작부인께서도 알고 계신 걸까.
“출발한다.”
“예…… 예!”
딜런은 곧장 마차 뒤에 있는 말을 향해 달려갔고, 카일러는 사샤에게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해 주었다.
두 사람은 마차에 올라타고서도 나란히 앉아 손을 붙잡고 있었다.
“공작부인은 할 일이 많나요? 이베른 후작부인은 낮에 뭘 하는지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해맑을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침울하게 할 말은 아닌 거 같아서 덧붙여 말했다. 그의 손을 잡고 있긴 하지만 그걸로도 모자라는지 그의 목소리까지 듣고 싶었으니까.
“나도 너무 어렸을 때라 어머니가 무엇을 하셨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의외로 그의 입에서 나온 ‘어머니’라는 소리가 사샤의 머릿속에 탁 꽂혀 버렸다.
“어머니…… 어떤 분이셨어요? 드레스를 보면 굉장히 우아하고 아름다우셨을 거 같아요.”
무슨 근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드레스를 보고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새 드레스보다는 이곳에 원래 있던 드레스들을 입으려고 했던 것 같다.
제게도 잘 어울렸으면 하는 생각으로.
“어머니는 굉장히 아름다운 분이었다. 내 눈이 바로 어머니를 닮았었지.”
“우와…… 그럼 아버지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분이셨겠네요. 멋있다…….”
다행히 부모님에 대해 회상하는 카일러는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픔을 겪고 이겨 내고, 혹은 누르고 묻어 둬야 했을까.
그것은 사실 가져 보지 못했다 해서 짐작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더 환하게 웃으면서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머니는 굉장히 쾌활한 분이셨다. 아버지는…… 나와 비슷하셨고. 다들 어머니를 아깝다 했던 걸 기억한다. 저런 성격과 살면 답답하지 않냐, 화나지 않냐…… 그렇게 물어보던 귀족 부인도 있었어.”
사샤는 조곤조곤 낮은 목소리로 하는 카일러의 말이 참 듣기 좋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의 넓은 어깨에 톡 하고 어깨를 기대어 보았다.
그가 스윽 내려다보다 미소를 짓는 게 느껴졌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끔 아버지를 너무 닮은 성격을 좀 좋아하지 않았었다. 말을 꺼낸다는 것부터가 어렵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너무 무서워하고 멀리하는 것도 어렸을 땐 싫었다.”
“지금은 그게 더 편하지 않아요? 카일러 보기보다 굉장히 다정한 사람이라는 거 영애들이 알았어 봐요. 얼마나 귀찮게 하겠어요.”
또 꺄르르 웃으면서 그의 말에 끼어든 사샤의 말에 카일러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저 한마디에 자신을 떨리게 하는 말이 몇 개나 되는지.
아침부터 달달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을 실은 마차는 꾸준히 달려 우할린 숲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