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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91화 (91/128)

91화

“와……. 오늘은 뭐예요?”

사샤는 카일러와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내려왔다. 그의 손을 꼭 잡고 내려오는데 식당의 분위기가 뭔가 다른 날과는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다.

항상 밝은 조명이 있던 식당에서 은은한 주홍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어두운 곳에서 촛불이 밝히는 공간은 느낌이 너무 달랐다.

이전 삶에서라면…… TV 드라마에서나 봤던 아주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느낌이었다.

화려한 상차림보다는 음식이 매우 고퀄리티인 식사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너무나도 분위기 좋은 식당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여자들은 이런 걸 좋아한다기에.”

카일러는 아직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당겨 이끌어 갔다. 살짝 어버버한 얼굴로 그에게 이끌려 걷는 사샤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식탁 위에 예쁜 꽃과 냅킨, 그리고 화려한 촛대까지 갖추어 너무 아름답게 세팅이 되어 있었고 주변에도 꽃과 천을 가지고 예쁘게 꾸며 두었다.

카일러에게서 나왔을 거라곤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그런 감성이랄까? 사샤는 둘러보다가 마치 딴 집에 와 있는 것만 같아서 그를 한 번 올려다보고, 다시 식당을 둘러보고를 몇 번 반복했다.

“내가 직접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안 믿기는 건가.”

약간 시무룩해졌다 생각하는 게 자의식 과잉은 아니겠지? 쿡쿡 웃음을 지으며 사샤는 그에게 훅 다가갔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다물린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춰 주었다.

“물론 직접 하진 않으셨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이렇게 해 달라고 직접 얘기를 한 거예요?”

입을 맞추자 카일러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는 않은 채로 두 눈을 크게 떴다. 주변에 누군가 분명 보고 있었을 텐데, 과감한 그녀의 행동에 그가 놀란 것이다.

“그래. 다른 부인들은 사교계 모임 같은 것도 나가고, 친구도 만나고, 드레스나 보석도 사고…… 하는 일이 많다는데, 그대는 항상 저택에만 있고 나가 봐야 번화가 잠깐 돌고 마는…… 그런 것만 하지 않았나.”

듣다 보니 결국은 다 놀았다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아, 그렇게 여러 가지를 하고 있다는데 나는 집에만 있는 게 걱정이라는 얘기였구나.

그래서 이런 걸 준비해 준 거라고? 혼자 집에서 심심할까 봐?

대체 그를 누가 무뚝뚝하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항상 저를 생각해 주고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까지 열어 주는 남자가 어떻게 무서울 수 있을까.

“나야말로요. 다른 귀족 부인들은 각자의 집안 살림도 하고 있다는데……. 점차 로제에게서 받아 오려고 해요. 온전히 이그노트 공작부인의 역할을 하려고 노력 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래서 더더 뭔가 하고 싶고 해 주고 싶어진다. 행복하게 사람의 온기를 받으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은 가족과도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지금 그는 자신의 남편이니 가족이 맞기는 하지만…….

그와 함께 예쁘게 꾸며진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더 아름다웠다. 커트러리를 감싼 냅킨에도 끝에 꽃이 달린 꽃줄기가 묶여 있었고 이미 컵에 담긴 식전주는 촛불을 받아 아름다운 황금색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이런 예쁜 식탁에 호사스러운 분위기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 사샤였기 때문에 보고 또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채부터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서빙을 맡은 니나와 새라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두 사람 앞에 접시를 내려놔 주었다.

음식도 언제나 먹던 것에 비해 보기에 더 화려해진 모양이었다. 언제나 맛있고 고급스러웠던 음식도 더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우와아…….”

사샤는 음식이 나올 때 한 번 음식을 입에 넣을 때 또 한 번 그렇게 감탄사를 흘렸다. 두 번째 전채가 왔다 나가고 메인이 들어올 때까지도 반복되는 것은 듣고 있던 카일러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그렇게 음식이 맛있는 건가.”

“그럼요! 평소보다 더 맛있는 거 같아요. 음…… 이거 혹시 최후의 만찬 같은, 뭐 그런 건가요?”

웃는 얼굴로 던지는 농담인데도 그것 들은 카일러의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그녀의 얼굴이 나쁘지는 않았기 때문에 살짝 마음을 놓았다.

“최후라니. 그냥…… 잘해 주고 싶었다. 뭔가 기뻐할 만한 걸 해 주고 싶었어.”

“그런 거라면 더 감동이에요. 고마워요.”

그냥 식사하는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일 뿐인데 너무 좋아해 주는 그녀가 더 고마웠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이 있고, 특히 오늘 할 이야기처럼 제가 스스로 그녀를 힘들게 만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이 좋았다면…… 떠올려 주면 좋겠다. 제가 얼마나 그녀를 좋아하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아주면 좋겠다.

“그대가 오고부터 많은 것이 달라졌다. 처음엔 내 욕심으로 데려온 것이었는데, 그 욕심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을 받고 있어.”

그는 표정이 없고 감정 표현을 많이 하지 않는다 뿐이지 속에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이였다. 항상 진심으로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를 믿어 주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스스로가 막 뿌듯해지려고 했다. 볼이 씰룩거리는 걸 참고 음식을 와앙 한입 가득 넣은 채 우물우물 맛있게 먹었다.

“내게 와 주어서 고맙다. 그대는 ……평생 내가 지켜 주겠다.”

그의 지켜 주겠다는 말이 너무도 믿음직스러워서 사샤는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후에 어떤 말을 듣게 되더라도 결국 그는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상기시키자 그 끄덕거림이 후회가 되지도 않았다.

“카일러, 먹고 있어요? 나만 보고 안 먹는 거 같아요.”

“나는 괜찮다.”

“내가 안 괜찮으니 얼른 먹어요. 헛, 혹시 음식을 많이 먹으면 몸이 어디 힘들어지거나 아프거나 하나요?”

카일러에 대한 것은 모르는 게 많아서 이럴 때 혹시나 실수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문득문득 들기도 했다.

“그런 거 아니다.”

“그럼 많이 드셔야죠. 남자면서 왜 이렇게 잘 못 먹어요. 먹는 게 다 힘으로 가는 건데.”

잘 못 먹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야 하는데. 사샤는 열심히 음식을 먹고 또 감탄해 가면서 카일러의 음식 먹는 모습까지도 살펴보았다.

조용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식당에서 그와 함께 먹는 음식은 정말 새로웠다. 게다가 그 모든 것이 그녀 혼자만을 위한 것이라는 것도 감동적이었다.

오롯이 자신을 위한 자리가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행복했다.

식사가 끝나자 로제는 이번엔 그들을 2층으로 안내했다. 사샤는 잘 쓰지 않는 2층 계단의 오른쪽으로 가면 넓은 홀 같은 공간이 나왔다.

“여기까지요……?”

그곳은 층고가 높아 벽에 난 커다란 창문이 멋들어진 곳이었다. 오늘따라 달도 밝고 커서 굉장히 아름다운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중 한 창문 앞에는 와인과 약간의 음식이 올라와 있는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있었다.

자리를 잡고 나서도 한참 주변을 바라보는 사샤를 카일러는 좀 뿌듯해지는 가슴을 느끼며 지켜보았다.

“그대의 이 반응을 전해 주면 꾸며 준 이들이 많이 좋아할 것이다.”

정말 열심히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우와, 하는 감탄사를 잊지 않는 그녀의 모습을 하녀들에게도 보여 주고 싶었다.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요, 마물은 어떻게 됐어요?”

서로 잔들 들고 어색하게 짠, 소리까지 내서 부딪히곤 입에 가져다 대는데, 한 모금 먼저 마신 사샤가 그렇게 물었다. 카일러는 입술에 붙였던 잔을 떼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 분위기를 즐기기에 그 이야기는 좀 안 맞는 것 아닌가.”

카일러는 그냥 편안하게 놀 시간을 만들어 주려고 했을 테지만 사샤는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이 가장 궁금했다. 뭘 하고 있고, 오늘은 뭘 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일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선이 아니라면, 자기 일을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여러 생각을 거친 다음에 물어보는 것이었다. 사샤는 미소를 지으며 그런 그를 마주 보았다.

“카일러가 하는 일이 궁금해요. 게다가 지금 하는 게 결코 쉬운 일도 아니잖아요. 그쵸?”

술을 한 모금 먹은 그의 입에다가 작은 치즈 조각 하나를 들어다가 입 앞으로 쑥 내밀었다. 잠시 주춤한 그의 입이 살짝 벌어지자 사샤는 그 조각을 입 안에 쏙 밀어 넣고는 씨익 웃었다.

입술을 다문 카일러는 치즈 향이 퍼지는 것을 느끼면서 제 입 앞으로 온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손을 조금 움직이자 거친 손안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는 손이고, 얼굴이고, 몸이고, 손이 닿으면 어디든 부드럽게 감겨 왔다. 거칠고 딱딱한 카일러에게도 부드러움과 따스한 온기를 주는 것이다.

조금씩 손을 움직이며 그 감각을 좀 더 느껴 보았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전해지는 온기를 내맡기고 사샤 또한 고요히 그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지금 여기 와서 억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심지어 처음 카일러의 침대에 들어갔을 때에도…… 이곳에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거라고 스스로 납득하고 받아들인 것이었어요.”

그녀가 그 밤을 떠올리자 손을 매만지고 있던 카일러의 손이 우뚝 멈춰 버렸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한 방울 흐르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사샤가 꺄르르 소리 내어 웃었다. 고요한 홀 안에 울리는 웃음소리가 맑아서 카일러는 어리둥절해져 그녀를 보았다.

어떻게 그 밤을 회상하면서 그렇게 웃을 수 있을까. 계약이라고 해 봐야 그렇게 구체적인 내용이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하지만 웃음을 짓는 그녀의 얼굴 또한 거짓이 아니었기에 카일러는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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