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이번에 나가신 김에 드레스 한 벌 사 오시지 그러셨어요.”
로제는 마차 안에서 맞은편에 앉은 어여쁜 아가씨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마차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눈부시지도 않은지 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녀의 다갈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로제의 말에 그녀는 눈동자가 가려질 듯이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입을 드레스도 많이 있는데 뭐하러. 진짜 안 사도 돼.”
그녀가 보기에 사샤가 입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전 공작부인이 입던 것들이라 조금 낡기도 했고 시대에 많이 뒤떨어진 것 같기도 했다.
다행이라면 그다지 나이 들어 보이는 디자인은 아니라는 것 정도?
자신의 대답에도 로제가 빤히 드레스를 바라보고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자 사샤는 그 시선을 따라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이렇게 고급스럽고 예쁜데. 카일러도 로제처럼 생각할까 싶어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
“나 정말 이거 마음에 들어서 그래. 아, 혹시나 전 공작부인의 옷을 입는 거 자체가 문제가 돼서 그런 거라면 얘기해 줘. 새로 샀던 드레스만 입을게.”
사샤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자 로제가 손까지 동원해서 그 말을 부정했다.
“그런 건 절대로 아닙니다.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했었는데, 공작님께서 괜찮다고 해 주셨던 거예요.”
로제의 반응에 사샤는 오히려 더 궁금증이 많아졌다. 사샤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이야기가 내 일이 아닌데도 조금 궁금해진 것이다.
“처음에는…… 나에 대해 그냥 별로 신경 많이 안 쓰셨을 거 같은데, 전 공작부인의 옷이면 중요한 거 아니야? 그걸 그냥 입어도 된다고 해 주셨어?”
그러고 보면 제 방도 참 깔끔하고 예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처음엔 그냥 깔끔하게 관리를 잘한 것 같다는 느낌만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 방도 혹시 전에 공작부인이 쓰시던 방 그대로인 걸까?
내 어머니가 쓰던 방……. 가족애가 뭔지 모르는 사샤지만 그 말에는 좀 애틋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선뜻 내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 그의 귀를 잠재워 줄 수 있는 사람이 오는 거니까, 그래서 신경을 좀 많이 써 준 것일까?
“처음에는 동요가 없으셔서 잘 모르겠습니다. 평소와 같으셨어요. 다만 본인이 전 공작님의 방을 쓰듯이 바로 전 안주인님의 방을 정리하라고 일러 주셨어요. 그리고 낡은 것들은 새로 교체하고…… 아무튼 새로 오시는 분 불편하지 않도록이요.”
오히려 사샤는 이 대답에 속이 편해졌다. 그때의 사샤는 제가 아니었으니까. 그때부터 이미 애정이 보였다거나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써 그녀를 맞이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그건 또 나름대로 신경이 쓰였을 것 같다.
어머, 세상에…… 마치 나를 질투하는 것 같잖아.
사샤는 자기 생각에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앞에서 보고 있던 로제는 그녀의 그런 반응에 왠지 흐뭇해했지만.
마차는 금방 공작저로 도착했다. 그리고 어째선지 사샤는 아침 일찍 나갔던 카일러가 돌아와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왠지 두근거리는 마음까지 차분히 가라앉히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나갔다가 별 소득 없이 돌아와 가라앉아 있는 상황이라면 괜히 쓸데없이 밝은 모습은 또 별로일 수 있으니까…….
“아, 사샤 님. 공작님께서 도착하신 모양이에요.”
로제도 그가 돌아온 것을 알았는지 목소리가 살짝 들뜬 것 같았다. 그러고는 환하게 미소가 지어지려는 걸 살짝 누르고는 마차에서 서둘러 내리는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사샤 님이 오셔서 다행이에요.”
“응? 뭐라고 했어, 로제?”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서 들어가 보세요.”
로제가 말을 걸자 한 번 돌아본 사샤는 들어가 보라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뒤돌아 집 안으로 들어갔다.
로제의 입가에서는 흐뭇한 미소가 한동안 머물렀다.
공작 내외가 사고로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 공작저는 어둡기 그지없었다. 본래도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다니거나 저택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다니는 아이가 아니었던 카일러는 그렇게 공작위를 이어받고 나자 거의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기척조차 내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 웅장하고 거대했던 이그노트 공작 저택은 마치 암흑기 같은 시간을 보냈었다. 한 사람만이 있으니 인원도 최소화되었고, 당시에 있던 이들은 대부분 다른 귀족 가문의 일자리를 찾아 나가고 어린 하녀들만 남아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로제는 그렇게 하녀로 남아 이곳을 지키고 있느라 몰랐던 것이지만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나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사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처음 결혼식을 위해 저택으로 왔을 때만 해도 다 죽어 가는 듯 생기도 없었던 그녀는 어떤 마음의 결심이라도 섰던 것인지 순식간에 살아났다.
거울을 통해 보았던 그녀의 반짝이는 다갈색 눈동자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요즘 두 분 분위기가 다시 좋아져서 너무 다행이야.”
위기가 오더라도 잘 헤쳐 나갈 것 같은 두 사람을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가던 로제는 2층 계단 끄트머리에 옹기종기 모여 뭔가 훔쳐보듯 엉덩이만 보이고 있는 어린 하녀들을 발견했다.
“너희들!”
*
“저, 오늘은 로제와 함께 번화가에 다녀왔어요. 뭐 사러 갔다 온 것은 아니고요. 그냥 한번 둘러보고 싶어서…….”
사샤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를 복도에서 만났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카일러가 계단에서 올라오는 발소리를 듣고는 기다려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자 그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말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반갑게 말을 걸었는데 돌아오는 말이 없자 살짝 당황한 사샤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눈치를 보자 그가 슥 한쪽 팔을 올려 그녀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긴장하고 있던 사샤는 냉큼 그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은 제 안에 담긴 작은 손을 포근하게 감싸 주었다.
“나가서 돌아다니는 건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다만 혼자만 나가지 않으면 돼.”
나직하게 당부하는 목소리에서 다정함이 느껴졌다. 잠깐 당황했던 것도 잊은 채 사샤는 쪼르르 그에게로 다가갔다.
“혼자서 돌아다니면 맘 편하긴 할 텐데. 로제는 또 로제가 할 일이 있고 하니까 좀 미안해서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남은 한 손으로 문을 연 그를 따라 사샤도 그의 방으로 함께 들어갔다. 뒤에서 그런 그들의 달달한 모습을 계단 꼭대기에서 어린 하녀들이 훔쳐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우리 주인님들 진짜 너무 예쁘지 않아?”
그들이 문을 닫고 들어간 뒤에도 벽 너머에 다닥다닥 붙어 선 하녀들이 종알종알 감탄을 해 댔다.
“처음엔 진짜 막 분위기는 살벌한데 밤엔 또 꼬박꼬박 같이 주무시니까…….”
“맞아, 처음에 누가 그랬지? 뭐? 우리 공작님도 남자……?”
“아니, 뭐어…… 나만 그렇게 생각했어? 어?”
서로 티격태격하는 사이에서 제일 밑에 깔린 코니는 위에서 누르는 힘을 버티면서 비실비실 미소를 지었다.
“사샤 님이 정말 대단한 분이신 거 같아요. 어떻게 저 얼음장 같던 분의 마음을 녹일 수 있었을까요?”
코니의 말에 티격태격 작은 목소리로 잘도 싸우고 있던 하녀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내려다보았다.
“그건 그래.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처음에 오실 때만 해도 안 그랬거든?”
“처음에? 뭐가 달라졌나?”
니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하자 새라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녀는 로제와 함께 결혼식을 위해 공작저에 온 사샤를 제일 먼저 맞이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직접 안내해 방으로 모시고 목욕시중까지 들었었다.
“그때 사샤 님…… 굉장히…… 인형 같았었어. 누가 줄 달아 놔서 움직여 주는 그런 거 있지.”
주저주저하며 말하는 그녀의 말에 못 믿겠다는 듯 모두 그녀를 바라보았다. 새라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 가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살아 있는 느낌이 없을 정도로……. 그래서 나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한창 방에 틀어박히셨을 때의 공작님이랑 느낌이 비슷했거든.”
연이은 비유는 다른 하녀들도 공감하는지 모두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가 말하는 ‘한창 방에 틀어박힌 공작님’이 어떤 모습인지 말 안 해도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말도 안 돼. 결혼식 날 사샤 님 어땠는지 기억 안 나? 도망가다가 공작님한테 걸리셨다니까? 매우 활기차 보이셨는데?”
절박하게 살기 위해 도망가는 그런 위험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치 소형견이 대형견을 피해 달아나는 듯한 그런 귀여운…… 분위기였었던 걸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로제 님께 물어봐도 돼. 아마 나랑 똑같이 대답하실걸?”
새라는 믿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단호하게 대답해 주었다.
“이거야말로 사랑의 힘인 건가?”
“우와아아…….”
어린 그녀들에게는 마치 미지의 세계인 것만 같은 말에 다들 호들갑스럽게 팔을 휘둘러 대며 꺅꺅거렸다. 물론 공작님의 방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조용히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희들!”
“엄마야!”
하지만 조용히 한다고 봐줄 로제가 아니긴 했다.
“로, 로제 님! 오셨어요?”
“저희 조용히 하고 있었어요. 아, 청소도 전부 끝냈어요.”
하녀들은 계단에 쪼르륵 서서 아래에서 매섭게 올려다보는 로제의 눈길에 다들 바짝 힘이 들어간 자세로 변명과 보고를 섞어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 하녀들을 바라보며 로제는 무뚝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래, 공작님 화기애애한 모습 보고 힘났으면 할 일 또 찾으러 가 봐야겠지?”
“네, 넵!”
표정과는 사뭇 다른 말에 다들 벙쪄 있던 하녀들은 서둘러 대답하고는 쪼르르 계단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