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리디안의 다정함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던 예하라의 의도와 다르게 그날의 모습이 생각난 미디에나는 오히려 속에서 많은 것들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어째서…… 차라리 누구의 것도 되지 말 것이지.”
그랬다면 누구도 갖지 못한 그 남자를 애틋한 바라보기라도 했을 텐데, 그 마음에 질투가 더해지니 눌러 두기가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갈 곳을 잃은 마음이, 아무도 그걸 힘든 마음이라고 인정해 주지 않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힘겨웠다.
“그…… 보냈던 것에 대답은 아직도 없는 거야? 분명 며칠 전에 도착했을 텐데.”
미디에나는 이제 마음이 급해지기까지 했다. 그날 무슨 일인지 바로 인사를 나누지 않고 마차에 올라탈 때까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지만, 결국 그녀를 에스코트해 마차에 태웠고, 자신이 타고 온 말은 두고 그녀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 버렸다.
그 마차 안에서 둘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가는 길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공작저로 돌아가서는? 둘은 정말 제대로 된 부부의 일까지…….
질투에 눈이 먼 여자는 머릿속이 새까맣게 될 만큼 감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똑똑.
“황후 폐하. 밀렌입니다.”
그때 황후전의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누군가가 있었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와 이름에 반응한 미디에나는 재빠르게 예하라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는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자꾸 심각해져 버리는 미디에나를 지켜보다가 입술을 꾹 깨문 뒤에 그녀의 눈짓에 따라 응접실 입구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갈색의 머리카락과 초록 눈동자를 가진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순간 그녀는 흠칫했지만 곧 그가 은밀히 게라넬과의 연락책을 맡게 된 밀렌이라는 기사임을 깨달았다.
황후의 호위 기사 중 아주 중간 정도의 지위를 가진 이로서 시간적으로도 주변의 시선에서도 자유로운 이로 차출한 것이었다.
처음 황궁으로 올 때만 해도 그저 조신한 귀족 영애로만 보고 있었던 미디에나가 진심으로 이런 일을 진행하기 시작하자 예하라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의 주인이 대체 그 마음을 어디까지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무서운 예감이 드는 것이다.
그는 안으로 들어와 곧장 미디에나에게로 걸어가서는 고개를 숙였다.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그래? 생각보다 답신이 빠르구나.”
아까까지 보고 있었던 것은 처음에 보냈던, 마물에 대한 궁금증을 담은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다.
그러고 얼마 안 있어, 미디에나는 다른 방향으로 다시 한번 접근을 한 것이다. 밀렌을 통해 보냄으로써 교류의 의미를 담은 편지를 보낸 것이다. 대답이 꽤 빠르게 온 셈이었다.
밀렌은 한 번 더 고개를 수그리는 것으로 긍정의 대답을 해 주고는 입을 열었다.
“마물에 대한 황실의 관심이 지대한 것을 보고 감사함을 전한다고…… 하더군요.”
그는 품에 담고 있던 편지를 꺼내 미디에나의 앞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평범하고 평범한 그 봉투 안에는 어떤 말이 있을까. 만날 약속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말로서 전하는 마물의 기본적인 속성 같은 것뿐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긴장을 숨긴 채 봉투를 열었다.
그녀가 봉투 속 글자를 읽는 눈동자가 조금씩 아래로 움직여 가는 것을 지켜보는 밀렌과 예하라도 흐르는 긴장을 읽고는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미디에나의 눈동자가 편지의 끝에 당도했다. 다른 두 사람의 긴장되는 시선 속에서 그녀의 입꼬리가 쓰윽 위를 향해 올라갔다.
*
카일러는 오늘도 딜런과 함께 우할린 숲으로 향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항상 각자의 말을 타고 다녀오곤 했던 그 길을 오늘은 마차를 함께 타고 돌아오고 있었다.
“마물이 숲까지 내려온 횟수는.”
“총 다섯 번입니다.”
“사람을 공격했던 횟수는.”
“두 번입니다.”
딜런의 대답에 카일러가 미간을 훅 찌푸렸다. 이걸 대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내가 사샤와 함께 들어갔을 때 한 번…… 그리고 너와 사샤 셋이서 들어갔을 때 한 번.”
“……그렇습니다.”
딜런도 카일러의 의문을 공감하고 있는 것인지 머뭇거리며 대답을 했다.
그녀가 숲에 가지 않은 때에도 마물은 나타났었다. 그러한 출몰에 규칙성 같은 것 또한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우선 계속해서 관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샤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아주 조금의 규칙성이 생겨나 버리고 말았다.
“단 두 번입니다. 그렇게 결정을 짓기엔 전수가 너무 적습니다.”
딜런은 그의 걱정을 일단락하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딜런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단 다섯 번 중의 두 번이었다. 다섯 번 마물이 숲에서 내려온 것만으로도 숲을 통제하고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게 막을 수는 있겠지만 단 두 번, 그녀가 숲에 들어갔을 때 마물이 공격성을 보였다고 해서 그 탓을 사샤에게로 돌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면 조사해 보는 것이 맞다.”
카일러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연관성을 의심하는 것이, 사샤를 나쁜 사람이라고 여기고 나쁘게 말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그녀가 마물을 부리는 흑막이라 할지라도 자신은 그녀를 지킬 생각이었다. 그런 속마음까지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오늘까지 하면 총 여섯 번 출몰이군. 공격성은…… 없었고.”
오늘 딜런과 숲 안쪽까지 들어가는 길에 마물을 만났다. 한 마리만이 마치 떨궈진 듯이 서서 주변을 두리번대고 있었다.
하도 오래 봐 왔더니 그런 행동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예상 외로 정말 사람을 공격하지 않았다.
사샤와 함께 들어갔을 때 보았던 마물이 바로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마물의 행동적 특징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떨어져선 눈앞에 보이는 인간들은 모조리 공격해 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오늘 만난 마물은 그렇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며 뭔가를 찾는 듯하던 마물은 카일러와 딜런을 발견하고도 스윽 눈을 돌렸다. 무엇을 하든지 신경도 쓰지 않던 마물은 한동안 주변을 둘러보는 듯하더니 다시 산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둘이 서서 그런 마물의 뒷모습을 넋을 놓고 지켜보았다. 둘 다 숲에서 마물의 공격을 받았던 전적까지 있어서 이 일을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 뒤로 마차 안은 침묵으로 잠겼다. 둘 다 생각이 많은 시간이 흐르고 어김없이 마차는 공작저 안으로 흘러들어가듯 달렸다.
“공작님, 돌아오셨습니까. 아직 저녁 식사는 이르니 목욕물부터 준비해 드릴까요?”
입구에는 파반이 서 있었다. 그리고 집사는 보통 하녀장이 할들을 직접 건네고 있었다.
카일러는 대번에 그 이상함을 알아챘다. 파반의 목소리로 듣는 ‘목욕물’이라는 단어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아, 죄송합니다, 공작님. 로제는 지금 외출하신 사샤 님을 따라서 함께 번화가에 나가 있습니다. 해 지기 전에는 돌아오신다 하고 외출하셨습니다.”
이제 막 마차에서 내려 마차를 살피고 마부의 편으로 마차를 보내고 있던 딜런도 파반의 말을 들었는데 슬쩍 이쪽을 건너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사샤와의 연관성을 얘기하고 있던 중이서 그런 것일 것이다. 그녀로 머릿속으로 계속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파반.”
“예, 공작님.”
“공작님…….”
대번에 집사의 이름을 부르는 카일러를, 딜런이 다급하게 불렀다. 하지만 그의 진심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던 탓에 입술을 꾹 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샤가 최근 저택을 나갔던 날이 어떻게 되는지 알려 줄 수 있는가.”
파반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딜런은 자신의 허리춤에서 작은 노트 하나를 꺼냈다. 아까 마차 안에서 그가 오늘이 여섯 번째라고 말할 때에도 잠깐 꺼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파반은 잠시 눈을 옮겨 두 사람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제가 외우지는 못했지만 기록은 해 두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들고 집무실로 가도 되겠습니까.”
긴장감에 둘러싸인 분위기 속에서 세 남자는 각자의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카일러와 딜런은 집무실로, 파반은 자신의 방으로.
“공작님…… 설마…….”
뚜벅뚜벅 하는 발소리가 복도에 울리는 가운데, 집무실까지도 가지 못하고 딜런이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급하기만 했을 뿐 그 말을 제대로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카일러는 집무실로 걸어가는 발의 속도를 늦추지도 않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아까 마차에서부터 그는 이미 결심을 세운 상황이었다. 그녀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의 연관성을 찾으려는 것이니까. 뭔가가 있다면 제대로 알아야만 지키는 것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오히려 다른 누구보다 먼저 알아야 했다.
지금 그녀가 마물과 대화가 통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그녀와 나만이 아는 것이었다. 만약 지금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지체하지 말아야 했다.
집무실에는 두 사람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무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딜런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카일러의 얼굴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항상 그는 틀린 적이 없었다. 틀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문제가 된 적 또한 없었다. 그는 옳은 길을 신중하게 고르고, 잘못된 길을 가면 다시 돌아오거나 그 길을 옳게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정말…… 부인에게 진심이셨으니까.’
오랫동안 보아 왔기 때문에 그 또한 알 수 있었다. 황제가 급하게 추진하는 결혼식에 아무나 데려온 것은 아닌지 걱정이 많았지만 그는 현재 사샤에게 정말 진심으로 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너무 보기 좋았기 때문에…… 그래서 더 걱정되고 더 조심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