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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88화 (88/128)

88화

“후우, 후욱.”

미디에나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까는 리디안과 마주쳐 버리는 바람에 태연한 듯 편지를 뒤로 숨겼지만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예하라도 없는 방에서 숨을 몰아쉬느라 마른 목 때문에 재빨리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고는 급히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미디에나는 얼른 소파에 몸을 묻고 앉아 그것을 뜯어보았다. 그들은 과연 자신을 도와줄 인물들이었을까…….

“아…… 이런.”

그사이에 바깥으로 나온 편지를 제대로 꺼내 펼쳐 보았다. 그리고 …… 그 안에 적힌 다소 실망스러운 내용에 탄식부터 했다.

미디에나의 방은 하얀색 기본에 보라색 장식이 잔뜩 들어간 방이었는데 최근 한쪽 구석에 파티션이 하나 더 생겼다.

그 안에서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는 정리를 하는 예하라만이 아는 것이었다.

미디에나는 그 뒤로 걸어 들어가려다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봉투는 사람을 시켜 알아낸 게라넬의 본거지에로 직접 보낸 편지에 대한 답변이었다.

거기에 어떤 사람들이 모이는지, 수장은 누구인지도 생각 안 해 보고 그녀는 그 의문의 사내에게 이런 일이 있었는데 가능한 거냐부터 확인하려고 들었다. 그만큼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명확한 무언가를 명시하지는 않았다. 사샤라는 이름의 여자가 마물과 무언가 미묘한 상관관계가 있다든지 리디안이 산맥을 두고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인다든지……

사실 이것들은 결국 내 위치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크게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게라넬은 변방에 위치해서 마물의 동향을 파악하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그들을 통제하기 위한 집단이었다. 처음에는 공익을 위해 설립되었다지만 지금은 전혀 상관이 없이 오히려 마물을 이용해 제국에 해를 입히는 곳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입장에서도 이들은 배척하는 게 맞았다.

“지금 좀 위험한 상태가 된 건 아닌가. 거기서 들러온 거여야지 왜 하필 봉투를 들고 있을 때…….”

아무래도 아까 황궁과 황후궁 사이에서 만난 리디안이 걸렸다.

그는 어쩜 그렇게 신출귀몰인 것인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그가 자신을 불렀을 때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는지 모른다.

리디안은 황제라 바쁘면서도 그런 식으로 마주치는 일이 굉장히 많은 편이었다. 저 멀리서 걸어가다가도 자신을 발견하면 꼭 짧게나마 인사를 걸고서야 지나갔다.

때로는 저 멀리서 자신을 알아봤다고? 싶을 정도였는데도 말이다.

방금은 심장이 떨어져 내릴 것처럼 화들짝 놀라 버렸지만 그런 그 덕분에 외롭기 않은 황궁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아까도 마찬가지였다. 예하라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고는 못 배기는 탓에 말을 건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리디안을 보내고 돌아오면서도, 봉투만 아니었으면 그와 대화를 좀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아쉬움이 드는 것을 보면…… 그와 그렇게 만나 짧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쉬웠던 것일까?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걸까.

아무튼 게라넬에게 보낸 편지에는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보여 주지는 않았다.

우선 마물의 유래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걸을 풀어 준 답에 맞춰 보자 하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게라넬이 어떤 집단인지 들었다. 제국에서 배척해 둔 사람들이 게라넬을 이용해 제국을 흔들어 놓고 자신들의 거사를 준비하려 한다는 것.

거기에서 지금까지 마물과 소통을 한 사람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이상하게 그들의 대화가 묘하게 들렸던 미디에나는 리디안에게 좀 더 상세하게 물어봤었다.

우할린 숲으로 간 카일러와 사샤의 이야기에 대해.

워낙 여기저기에다가 마물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고, 심지어 본인에게도 넌지시 물어보았었다. 그리고 거기서 뭔가 석연찮았던 이야기를 발견한 것이다.

두 번째 마물이 나타났을 때 분명 마물이 바로 그 여자를 공격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며 사샤도 뭔가 말을 했다고 했다.

그 뒤로는 그 내용이 없었다. 분명 그것 또한 카일러의 입에서 전해 들은 말이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 뒤로 카일러는 그 부분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고.

그러니까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잖아. 그래서 결국 게라넬이라는 집단에까지 정보를 빌리려 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게라넬에게서 온 편지에도 똑같이 쓰여 있었다. 마물과 대화를 한다는 사람은 수백에 달하는 게라넬의 역사에서 단 한 명도 없었고, 대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소통을 나눈 예시조차 들어 본 적이 없다고도 했다.

“그게 그럼…… 도대체 뭐냔 말이야.”

그런데 아무리 모든 것이 단호하게 아니라고 해도 한번 의심을 품어 버린 미디에나의 머릿속에선 그것이 떠나질 않았다.

말로만 들어서 그렇게 들렸던 것일까. 하지만 그것이 힌트가 되어서 좀 더 큰 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이베른의 첫째 영애와 연관이 있다고 하니 더더욱 놓을 수가 없었다.

“우선…… 이 집단과는 계속 이어 두는 게 좋겠어. 쓸 데가 있을 거 같아.”

미디에나는 불타는 눈동자를 가라앉힐 의향이 없었다. 이 가슴 안에 타오르는 것이 잠재워질 때까진 계속해서 이 일을 해 나가야만 할 거 같았다.

“폐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하더니 예하라가 들어왔다. 그녀의 등장은 항상 마음이 놓이게 한다.

“그래,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예, 황제 폐하께서 아까 넌지시 부르셔서 메딜란 공작저에 편지와 함께 선물까지 보내라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너에게 심부름을 시키셨어?”

“예. 선물은 비단으로 하고 황후 폐하께서 보내는 것으로 하라고, 그리 지시하셨습니다.”

이런 것에서도…… 리디안의 배려가 느껴진다. 이렇게 예하라가 가서 직접 일을 처리하고 오면 그것은 황후궁에서 처리한 일이 되어 어 버리는 것이다.

이번 일은 그녀의 아버지에게 보낸 것이었지만, 보통 이렇게 그녀가 한 것처럼 하면서 황궁의 주요한 일들을 그녀가 처리한 것처럼 남겨 주는 것이다.

“그래, 고생했네, 이번에도.”

“고생은요. 괜찮습니다.”

예하라는 그렇게 이야기하고는 편지지를 붙들고 있는 그녀를 두고 주변을 돌며 넓은 방을 돌보기 시작했다.

아마 편지를 쓸 그녀의 마음을 챙겨 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의 배려는 끝이 없었다.

“좋은 생각이 될 것 같네, 그것도. 하지만…… 폐하께서 하게 해 주실까?”

미디에나는 편지지 하나를 꺼내 놓고 검은색 펜을 집어 들었다.

“황제 폐하께서…… 항상 그렇게 여쭤 보세요. 황후 폐하께서 어려워하거나 불편해하는 일은 없으신지 말이죠.”

막 펜에 잉크를 먹이고 있던 미디에나는 거기에서 움찔해 버리고 말았다. 리디안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분은 언제나 그런 분이기 당황하시지도 않고 기다려 주시기도 하고. 응?”

미디에나도 그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항상 자신을 위해서 신경을 곤두세운 사람 같았다.

“초반에는…… 황후 폐하의 그 마음……을 가지고 나쁜 말을 해 대는 이들이 종종 여기저기서 있었는데 황제 폐하께 발견되면 거의 반 죽음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흠씬 두들겨 맞고 풀려나거나 막대한 벌금을 물기도 했었대요.”

미디에나는 슬쩍 고개를 들었나. 지금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이었다. 예하라가 ‘초반’이리거나 ‘그 마음’이라고 지칭하는 것들은 바로 미디에나의 가장 깊은 아픔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까지 하셨다고?”

처음 황궁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그저 갓 황궁에 들어온 여인이었도, 메딜란의 힘이 완벽하게 닿지 못하던 때였다.

그리고 그때…… 차마 품으면 안 되었던 이를 품어 버렸던 것이다.

황궁 내에서도 그녀를 욕하는 이가 많을 정도로 일은 심각하게 치달았다. 하지만 미디에나도 거기에 반발하듯 제대로 숨기지 못한 채로 그렇게 대치가 이루어지던 때였다.

“난 그냥…… 사그라진 줄 알았더니 그게 자연스러운 게 아니었다는 얘기인 거야……?”

나를 보호하기 위해 그 감정에 취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한 황궁 내에서의 무례함은 몇 달 뒤에 깔끔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렇구나 했다. 여기 사람들도 처음 그렇게 욕을 해 대도 결국은 잊고 마는구나 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잊히지 않을까 그러면…… 많은 것들을 내 마음대로 다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버티다가 리디안이 강제로 나서서 카일러의 혼인을 진행했을 때 미디에나는 방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았었다.

“그래서 뒤에서 탄원서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렇게 급하게 카일러 공작님의 혼인을 잡아서 그것을 막아 주시기도 했고요. 그나마 이그노트 공작님께서 상대방을 빠르게 찾아 주셔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답니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탄원서가 만들어졌을 거예요.”

황후를 끌어내리는 탄원서 이야기는…… 그녀에게 꽤나 큰 충격이었다.

“그게…… 그때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니……?”

잉크 먹은 펜이 편지지 위에서 갈 길을 잃고 멈춰 버리고 말았다. 뚝, 툭, 잉크가 종이 위로 떨어져 번져 가는 것조차 모르는 채로 미디에나는 예하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하라는 역시 그런 이야기를 실수로 꺼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그녀에게 꼭 알려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꺼낸 이야기였는지 야무지게 다문 입술이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예, 황후 폐하. 그 또한…… 전부 황후 폐하를 위해 움직였던 황제 폐하의 계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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