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정자를 정리하고 나자 살짝 졸음이 올 것만 같았다.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집중해서 대화를 하고 그 와중에 키스를 나누고…….
당시에는 나누고 있던 이야기의 중차대함 때문에 잘 몰랐는데, 이제 와 다시 떠올리려고 보니 주변의 풍경과 물소리와 바람이 스치는 촉감과…… 이런 것들이 너무 아름답게 어우러진 곳에서 나눈 그 감각이 마구 심장이 뛸 정도로 설레게 느껴졌다.
“조금 걸을 것이다. 지난번처럼 물줄기를 따라 산맥에 조금 가까이 다가갈 것인데 괜찮겠는가.”
지난번 우할린 숲에 처음 왔을 때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렇다 보니 마물을 만났던 지난번의 일이 떠올라 거부감을 느낄까 봐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저는 괜찮아요. 얼른 가 봐요.”
마침 졸리기도 하겠다 그와 함께 걸으면 긴장돼서라도 잠이 깰 것 같았다.
도시락은 다시 내려오는 길에 챙겨 가기로 하고 둘은 나란히 정자를 나섰다.
그리고 카일러의 고집대로 두 사람은 손도 잡지 않고 있었다.
약간의 거리를 둔 채로 나란히 앞을 보고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게 그날과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지금은 귀 어때요? 소리가 여전히 들려요?”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너무 자주 물어보는 건가 하고 살짝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그는 사샤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 잠시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사샤는 그 모습에 문득 가슴이 시린 것을 느꼈다. 항상 그런 소음이나 그런 것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지금 들리는 것이 소음인지 자연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들리는 소리인지를 구분하는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도 좀 들리긴 하고 있다만 위험한 정도는 아니다. 내 생각엔 그들이 나타나진 않을 것 같다.”
“정말요? 다행이다.”
사샤는 그의 말을 믿고 온몸을 경직시키고 있던 긴장을 조금 풀었다.
그에게는 태연한 척하며 곁에서 걷고 있었지만 사실 긴장이 되지 않을 순 없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갑작스럽게 그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들었고, 무시무시한 것이 나타났고 무시무시하게 싸웠으니까.
다음에 나타날 마물이 저를 먼저 공격을 할 것인지 두 번째 마물처럼 제게 손을 내밀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호기롭게 나섰던 것과 실전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카일러가 자신을 말린 이유도 여기에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실전 경험이 많다는 것은 이런 거겠구나, 하고 묵묵히 발을 옮기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같이 나오길 잘한 것 같아요.”
귀에 신경을 집중하고 걷고 있는 듯하던 그가 스윽 사샤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그렇다.”
그는 다시 말이 짧아졌지만 그가 주는 목소리,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소중하게만 여겨졌다. 곁에 있어 주는 존재만으로도 기쁜 느낌.
두 연인은 아름다운 숲길을 나란히 걸으면서 서로에 대한 벅차오르는 마음과 두근거리는 심장과 그리고 외부에서 올 위협에 대한 약간의 긴장을 안고 있었다. 이렇게 복잡하고 미묘하면서도 분명한 것들이 발걸음걸음마다 차곡하게 쌓이는 것 같았다.
“공작님!”
그때 저 위쪽에서부터 내려오던 사람이 그들을 불렀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보니 저쪽에서 익숙한 인영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급한 목소리나 급한 걸음은 아니었기에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던 사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산맥의 끝자락에서부터 숲으로까지 훑으며 내려온 이는 바로 딜런이었다.
“산맥에서부터 훑고 내려오는 길입니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카일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구를 많은 상황에서 그는 딜런의 말을 취함하고 고개를 돌려보기 시작했다.
“좋다, 그럼 돌아가자.”
“어? 오늘 일 끝난 거예요?”
“그래.”
카일러는 딜런과 함께 다시 뒤돌아 숲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숲에 마물의 흔적이 있는지를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이번에는 없었던 모양이군.”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없었나요?”
사샤는 돌아가는 카일러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래. 그 이후로는 우할린 숲으로 내려온 마물은 없었다.”
카일러는 사샤가 던진 질문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지만 그 대답을 들은 사샤는 어딘가 모르게 굳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앞서가던 카일러와 딜런은 그런 그녀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정자에 다시 들러 도시락을 챙긴 뒤에 숲의 입구로 향하였다. 뒤로 갈수록 사샤는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었지만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정말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러기를 며칠째입니다만, 저희가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 한 번 있었습니다. 아까 산맥 쪽에서 한 마리가 슬금슬금 내려오고 있기에 바로 해치웠습니다.”
“그래…….”
사샤는 그 이야기까지 듣고 나자 정말 자신이 나서야 하는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반응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꾸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숲의 입구는 금방 나왔다. 산책하듯이 걷다 보니 금방 또 마차 앞까지 도착했다.
“그럼 뒤에서 호위하겠습니다.”
“편하게 와도 된다.”
카일러는 딜런의 인사를 두고 가볍게 대꾸한 뒤 마차 문을 열어 그녀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사샤는 이제 제법 능숙하게 그의 손을 잡고 우아하게 마차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왔을 때처럼 나란히 앉아 공작저로 돌아갔다.
사샤는 많은 의문과 자잘한 생각들에 잠겨서 마차에서 고요히 있었다. 카일러는 슬쩍 본 그녀가 눈을 감고 있기에 잠이 들었다고 생각하고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카일러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 많은 상처와 고통 속에서 시간을 보내온 사람이, 정말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안쓰러우면서도 저돌적으로 밀고나가려고만 하는 그를 어떻게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번 외출이 두 사람 사이의 사이를 뭔가 미묘하게 바꾸어 놓기도 했지만 자신이 무언가를 결심하기에도 좋은 시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만 그것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것이 수면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한번 안 된다는 말에 얌전히 내리누르기를 반복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마무리는 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손을 들어 보며 덜덜 떨리는 것을 겨우 진정시킨 뒤에 카일러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
미디에나는 손에 검은색의 편지 봉투를 하나 들고 복도를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고심 끝내 보냈던 편지에는 생각보다 빠른 답변이 돌아왔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귀족 내외에서 돈을 주어 소문을 퍼뜨려도 보고 이래저래 사교계를 이용도 해 보려 했지만 우선 그녀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그들은 일에 깊게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은 이런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시녀장은 황후궁을 돌아보기 위해 사라진 사이 프란츠가 전해 주고 간 것이었다. 미디에나는 어서 이 회랑을 벗어나 황후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어, 미디에나?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는 것이지?”
하지만 그녀는 바쁜 걸음이 무색하도록 가장 들리지 말았으면 했던 목소리를 듣고 말았다.
“하…….”
열심히 옮기고 있던 걸음을 멈추고 미디에나는 검은 편지 봉투를 자연스럽게 뒤로 숨겼다. 그것이 그의 눈에 띄었건 안 띄었건 제가 보여 주기 싫다는 모션만 취하면 되는 것이다.
리디안의 눈빛이 날카롭게 이미 봉투를 훑어 내렸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눈빛이 있었다는 것을 모른 채 미디에나는 그를 향해 은은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리디안은 눈 몇 번 깜빡이는 것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폐하. 어쩐 일이신가요?”
“어쩐 일은. 여기는 나의 궁이니 내가 그대에게 묻는 것이 맞지 않을까.”
“아…… 아버지께 편지를 보내고 싶어서요.”
미디에나는 조심스럽게 메딜란의 이름을 올렸다. 그날 황궁에서 만났을 때는 물론 사이좋지 않게 헤어지고 말았지만 그녀가 이렇게 도도하게 구는 사이 리디안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랬군. 만약 전해 드리려 하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내게 말해 주면 좋겠군. 빠르게 가길 원하는 게 있으면 그것 또한 생각해 보겠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으흠.”
리디안은 깍듯하게 인사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조금 더 물어볼 듯이 물어보지 않고 보내 줄 듯이 보내 주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미디에나는 살짝 가슴이 졸여지는 것을 느꼈다.
손에 쥐로 있는 봉투마저 젖을 듯이 손에서 땀이 났다. 그가 이 봉투를 발견한 상태였고 그것 때문이 이렇게나 시간을 뺏고 있는 것일까.
실제로 리디안의 시선은 숨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뒷손으로 향해 있는 것 같았다. 자꾸만 집요하게 다가오는 잘생긴 자신의 남편에게 미디에나는 한 점의 옅은 미소만을 지어 주고 있었다.
“아, 아니다. 미디에나 나와 차를 한잔 하지 않겠나? 저 아래 자작 영지에서 좋은 차를 보내 주었다 하여 가는 길에 말이다.”
리디안의 제안은 언제나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항상 자신과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고 대부분은 부담스러워하는 자신에게 선택을 맡기듯이 물었다.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 제가 지금 들어가서 마저 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요. 우중간에는 보낼 수 없으니 서두르려 합니다.”
“그렇군. 그거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리디안은 어설픈 변명에도 아랑곳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오늘따라 그의 움직임이 수상하게 보였다. 갑작스럽게 더듬는 목소리와 자연스럽게 열리는 눈동자까지…… 평소와 똑같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꼭 어긋나는 듯한 부분들이 엮여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 같았다.
미련 없이 뒤돌아 사라지면서 손에 들고 있던 봉투가 손가락에 걸리적거린다고 느꼈다. 미디에나는 자신의 얼굴부터 기품이 스르르 사라지기 전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