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얼마나 그렇게 붙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입술과 혀뿐 아니라, 얼굴과 목뿐 아니라 온몸이 달아올라서 더위를 느낄 때쯤 얼굴로 불어온 상쾌한 바람이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했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번져 있을 만큼 격렬하게 입술을 나누던 두 사람은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렸다. 후다닥 입술을 떼고 멀어지려는 사샤의 움직임을 눈치챈 것인지 카일러가 도리어 그녀의 볼을 양손으로 붙들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빨고 주변을 핥아 주며 키스의 흔적을 조심스러우면서도 뭔가 야릇하게 정리를 해 주었다. 한숨이 쉬어질 정도로 그 움직임이 설레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그녀가 두 눈을 뜨기도 전에 그는 뭔가 분주히 움직이더니 그녀의 입술 위로 부드러운 뭔가가 닿았다.
눈을 뜨고 보니 그가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 주고 있었다.
침대에서는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을 몇 번이고 눈에 담는 버릇이 있는 그였는데, 아마 여기가 야외라는 것 때문이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정말 이렇게 좋은 남자가 내 남자라니……. 다른 영애들은 절대로 모르게 하고 싶었다. 무뚝뚝 그 자체인 모습으로도 그렇게 많은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인 그가 이렇게나 다정한 남자라는 걸 알면 다들 얼마나 그를 탐내겠냐 이 말이다.
……같은 맥락으로, 어서 황제 폐하가 분발해서 황후의 마음을 좀 돌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몸만 원하면 어때…… 이렇게 잘해 주는데.”
사샤는 장난스럽게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그와 눈을 맞췄다. 그녀의 말을 들은 카일러가 눈썹을 찌푸리며 웃어 버렸다. 자신이 그를 놀렸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어쩌다가 우리 이렇게 됐지? 정신을 못 차리겠군.”
카일러가 난감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볼을 꾹 눌렀다. 하얗고 쫀쫀한 볼의 감촉이 좋아 절로 또 미소를 지어 버렸다.
“카일러가 저에 대한 마음을 아주 열렬히 말해 주다가요. 1년 치 할 말을 오늘 다 하신 거 아니에요?”
사샤가 여전히 장난기 가득 담은 목소리로 묻자 그의 입꼬리는 내려갈 줄 모르고 그녀에게서 눈도 떼지 못했다.
“정말 고마워요. 당신이 나한테 가지고 있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너무 잘 전해졌어요. 지금 세상에서 나만큼 행복한 여자는 단연코 없을 거예요.”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사샤는 최대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 웃는 모습이…… 그에게 정말 예쁘게 보였으면 좋겠다.
“대체…… 이게 무슨 복이야.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그전엔 그렇게 힘들게 살았었나 봐요.”
물론 여기서 고생했던 사샤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제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나 또한 결코 편한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었다. 그 보상이라고 하기에…… 이 남자가 너무 어마어마한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내 삶 또한…… 그렇게 상처 속에 파묻혀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만, 그대를 만나고 달라졌다. 상처받았던 그 모든 것을…… 그대가 하나씩 어루만져 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야.”
그가 살짝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씨익 웃었다.
“1년 치 할 말을 한꺼번에 다 하게 만들기도 하고 말이야.”
장난기를 담은 그의 미소가 사람을 홀려 버릴 듯이 삐져나왔다. 그걸 정면에서 맞닥뜨린 사샤는 심장이 아플 만큼 뛰는 걸 느꼈다. 와, 이 정도면 아이돌이신데, 수만의 머글들이 방금 그 미소에 덕통사고를 당하고 또 수만의 덕들이 씹덕사를 당했을 것이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잊고 살았던 저편의 말들이 마구 생각이 날 정도로 그의 미소가 너무…… 멋있었다.
“그래서 그냥…… 고마워요. 많이, 많은 것들이 고마워요.”
하루에 세 번씩 말해도 아직 부족하지 않을까. 언젠가 그가 이그노트 공작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자유를 누려도 된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녀에게 자유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아직도 곰곰이 곱씹으면 마치 자유를 허락받은 느낌까지 들고는 했다.
“아…… 카일러 일하러 온 건데 내가 너무 붙잡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순간 현실 감각이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사샤는 조심스럽게 바르작대며 그의 위에서 내려왔다 살짝 열 오른 볼을 손등으로 식히며 그의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안자 그가 또 자신을 향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다.
“마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 것이니…… 업무의 연장선으로 봐야지.”
정말, 누가 이 남자가 무뚝뚝하고 감정도 없는 차가운 남자라고 할 수 있을까. 달달한 카일러에 스스로도 적응 못 하면서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마물의 이야기로 시작하기는 했는데……. 참, 하하. 좋아요. 내가 일하는 데에 도움이 좀 되기는 했나요?”
“음, 아주 좋은 실마리를 제공해 준 것도 같군. 마물과 교류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 그것은 내가 알기로 마물 사용자라 불리는 게라넬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알고 있었다.”
아…… 이 부분은 생각도 못 했던 거였다.
대체 나는 무엇일까. 그것은 본래 사샤가…… 그러니까 이 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인 걸까, 본래의 영혼을 내쫓고 다른 영혼을 품으면서 생긴 이상 현상 같은 것일까.
“그럼…… 제가 뭔가 할 일이 있을까요?”
사샤는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할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가 하는 일을 돕는 것이니까.
사샤가 마물로 인해 상처를 입었던 것과, 그 일을 자초한 것이 자신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릴 때 미친 듯이 마물 토벌을 외치고 다니던 것은 슬쩍 가라앉은 참이기는 하지만 카일러의 지금 목표가 변경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귀가 듣는다는 것을 어떻게 고칠 수 없다면, 가장 크게 괴롭히는 것인 마물을 없애는 것이 그를 돕는 일이 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녀가 함께 있으면 그의 귀는 편안하게 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의 마음까지 평온하게 해 주지는 못 하겠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물 토벌에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자 뭔가 심장이 짜릿해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드는 것 같았다.
“그대가 할 일은 없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굉장히 단호한 그의 대답이었다. 한창 그의 마물 토벌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고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런저런 생각에 들떠 있었던 사샤는 그 높은 곳에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사샤가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눈빛까지 단호해진 참이었다.
“왜요? 저 같은 사람 다시는 없을 거 아니에요. 마물이 진짜 제게 할 말이 있었던 거라면요? 마물이 하려는 말을 진짜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면요? 그럼 정말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어쩌면 물리치지 않아도, 다시는 ‘생성’되지 않을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사샤의 말을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녀가 말한 대로였다. 마물이 진짜 그녀에게 뭔가를 전하고 싶어 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전하고 싶은 말일 테고, 싸움, 혹은 시비보다는 정보나 화해 쪽이 아닐까 하는 감이 드는 것이다.
심지어 그걸 이번에는 그녀가 전혀 알아듣지 못한 듯했지만 그걸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을 곧 대화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베일에 싸여 있던 마물 생성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꼭 마물을 이 땅에서 없앨 수 있는 방법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원인을 알아야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는 부분이니까.
굉장히 중요한 열쇠가 그녀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해맑게 자신에게 그 열쇠를 넘기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그대가 주는 것을 받을 수 없다. 그대를 두고…… 모험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카일러는 그녀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마치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까지 한꺼번에 감싸 꼭 쥐여 주는 것처럼 말이다.
사샤는 떼를 부리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신을 아껴 주고 싶은 것이다. 사샤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마물을 토벌하겠다고 나섰던 사람이니까 그가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대화를 시도하겠다는 것은, 마물들의 앞에다가 그녀를 온전히 내놓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신이 아니다. 물론 어떤 순간에도 그대를 지키겠지만…… 나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수 하나로 그대는 돌이킬 수 없게 돼 버릴지도 모를 위험한 일인 것이다. 내가…… 허락할 거라고 생각지 말아 줘.”
그의 목소리가 살짝 처연해지고 말았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사샤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에휴……. 사랑받는 여자는 어쩔 수 없네요. 지금은 한발 물러나지만…… 나도 진심이었어요. 카일러를 도와줄 수 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제가 하고 싶어요.”
어쩔 줄 모르는 그의 말 때문에 사샤는 살짝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도 알 것이다 내가 얼마나 도와주고 싶어 하는지, 조금은 다쳐도 좋으니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그가 끝내 거절해야만 하는 이유도 나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내가 할 사랑이 아니니까.
“자, 그럼 가서 일하고 와요. 나는 여기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그것은 안 되지. 곁에 있어야 지킬 것이 아닌가.”
그가 할 일을 하고 왔으면 해서 이야기한 일이지만 듣고 보니 그랬다. 그가 없는 사이에 또 그런 마물이 쐐애액! 하고 땅에 처박히듯 나타나 버릴지도 모를 일이니까.
“음, 그래요. 그럼 얼른 정리할 테니 그 뒤에 같이 나가요.”
그제야 카일러는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