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그걸…… 카일러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 거예요?”
사샤는 차마 그의 품에서 나오지 못한 채로 그에게 질문했다. 품에서 나오면 그의 눈을 봐야 했고, 혹시나 그 안에서 책망이나 비난의 기색을 읽어 내기라도 하면 그때는 정말 회복을 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려 준 것인지 그도 그녀를 밀어내지 않아 주었다. 품 안에 들어온 작은 몸을 천천히 쓸어 주면서 진정시켜 주었다.
“내가 누구인가. 제국의 위험을 소리로 듣는 자다. 심지어 그중 가장 많은 경고를 받는 소리가 바로 마물의 출몰에 대한 것이다. 그런 내가 그대를 이렇게…… 안고 있지 않나.”
“아…….”
너무나도 명확한 증명이 있었는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서 추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조금만 더 생각을 해 봤으면 됐을 것을…….
목부터 시작된 열기가 순식간에 얼굴까지 차올라서 고개를 더더욱 들 수가 없었다.
“그대는 그 다락방 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조차도 내 귀를 진정시켰다. 그 후작저가 산맥 바로 옆이라서, 게다가 내가 마물 사냥 중에 그곳에 들렀던 것이라서…… 귀가 아주 절정으로 아플 때였다. 그랬는데 그대가 나를 붙들기 위해 잡았을 때 그 엄청난 고통의 소리가 싹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제게 없는 기억……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그의 귀가 가라앉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만큼은 정말 다행이었다.
“그때는 그래서…… 그대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고백에 이어서 그가 문든 그날의 일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나는 모르고 있었던 그때, 우리의 첫 만남. 그리고 이어진 계약 결혼의 실체가 이제 나오려는 것인가. 사샤는 살짝 몸을 경직시킨 채로 그가 하는 말을 유심히 들었다.
“나를 붙들고 여기서 데리고 나가 달라 하는 그대를 보고 이상하게 불쾌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 이유를 알았지. 내 귀를 갉아 댈 듯이 들리고 있던 소음이 말끔하게 사라졌던 것이다.”
아…… 내가, 아니 본래의 사샤가 그를 붙잡았던 거였구나. 얼마라 괴로웠으면 처음 보는 남자에게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이곳을 탈출하고 싶다고 도움을 요청한 걸까.
그 아이가 지금의 편함을 누려야 하는 건 아닐까, 안타깝게도 그걸 확인해 줄 사샤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무서워하는 사샤를 위해서 카일러는 평소에 잘 하지도 않던 말을 계속해서 읊조려 주었다.
“그래서 그대와 결혼을 하기로 계약을 했던 것이다. 나는 그대를, 자신을 방치한 채 저택 안에 가둬 두려고만 하는 후작저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나는…… 언제든지 그대에게 닿을 수 있도록 한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그게…… 다였던 것인가. 계약이라는 것은. 내가 그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이…….
“그대가 나를 붙잡았지만, 그래서 마치 내가 그대를 조건도 없이 구해 준 것 같지만 결국 보면 나도 너무 많은 것을 얻은 거다. 심지어…… 이렇게 사랑까지 받고, 또 하고 있다니.”
그 말을 전하는 카일러는 품 안의 그녀를 더욱 힘 있게 안아 주었다. 그의 단단한 품과 달리 심장이 빠르게 뛰어 대고 있었다.
“카일러…….”
“이게 증명이다. 그대는 내 귀를 괴롭히는 마물이 아니라, 내 귀를 평온하게 만들어 주는…… 신과 같았다.”
신이라니…….
사샤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의 품에서 그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놓칠세라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붙들고 또 붙들었다.
“가당치도 않아요. 저야말로…… 카일러한테 너무 많은 것을 받았어요. 지금도 받고 있고요.”
그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나를 데리고 와 놓고도 공작부인으로서의 대우를 잊지 않았다. 다락방에 저를 가두고 돌보지도 않았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먹을 것 입을 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었고, 저택에서의 지위도 챙겨 주었다. 텅 빈 마음을 따스하게 채워 주었고, 자신의 마음을 채워 주지 못하는 자신을 애틋하게 지켜봐 주었다.
“처음…… 사흘에 한 번씩 돌아왔던 것도 그럼…….”
그제야 처음에 그를 오해했던 일이 떠올랐다. 자신은 오히려 멍해서 별다른 생각이 없었을 때, 공작저에서 일하는 하녀들이 제 몸을 위해 결혼한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그걸 우연치 않게 엿들었던 때를 말이다.
첫날밤을 치르며 계약 조건을 상기시키는 말까지 더해져서 아차 싶었던 것이다. 제 몸을, 그 관계를 조건으로 결혼한 거구나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참 볼이 빨개질 정도의 생각이었지만.
“내가 오래 집을 비울 때는 아무래도 일을 하러 나갈 때이니 당연히 귀가 소란스럽고 아플 정도로 시끄러울 때이다. 그대의 품이 그립지 않을 수 없지.”
아니…… 내가 묻고 싶은 건 그것보다는……. 하지만 너무 적나라하게 말할 수는 없을 거 같아서 입술을 앙물고 오물거리고 있을 때였다. 그가 미묘한 말의 차이를 알아챘는지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 그냥 손만 잡고 있어도 되는 것이긴 했는데 말이다……. 그것이…….”
이제까지 거침없이 설명을 해 주던 카일러가 흠칫 말을 멈추었다. 헛기침도 하고, 마른침도 삼키고 심장은 쿵쾅쿵쾅 뛰어 대고 있고…….
카일러가 머뭇대는 그 말이 제가 궁금해하던 것임을 알아채곤 사샤는 묵묵히 그가 입을 열어 주기를 기다렸다.
반대로 그녀가 뭐라도 해 주길 기다렸던 것인지 심호흡을 느리게 하고 있던 카일러는 자신과 다르게 오히려 편안하게 안겨 있는 사샤의 몸을 느꼈는지 훗, 하고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결혼식 날…… 그대 도망가다가 내게 잡혔던 것 기억하나.”
아차, 그때는 사샤가…… 이전의 사샤가 아니었다. 혼돈에 빠진 내가 결혼이 웬 말이냐! 하고 도망치려던 때에 얼마 가지도 못하고 당사자에게 잡혀 버렸던 일이 생각이 났다.
아,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하고 있는 사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막상 후작저를 나오고 보니 내 조건이 그렇게도 싫었던 것인가 하면서 그대를 바라보는데…… 뭔가 그때와는 달랐다. 눈빛이, 느낌이…… 달라져 있었다.”
그걸 대번에 느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사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빛만 달라져도 사람이 달라 보이는데 아예 혼이 달라졌으니까.
“내가 급히 결혼해야 했던 것은…… 왜 그래야 했는지도 알고 있겠지?”
“……음, 알고 있어요.”
그는 사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래. 황후의 마음을 피하기 위해서 황제 폐하가 내놓은 고육지책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제대로 이행했다는 나름의 증좌를 만들기 위해 결혼 첫날에 첫날밤을 치르겠다는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와…… 고지식한 남자. 쿡. 그런 그이니까 황후의 그 마음이 부담스러우면서 심지어 그것을 자신의 죄의식으로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생각하는 거라면, 첫날밤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했을지도.
“그 결혼식 전 변화된 그대의 모습을 보고, 그날 밤 그대를 품고서…… 내 마음은 완전히 달라졌다.”
“아, 제 몸에 반하셨다는 거로군요.”
사샤가 한껏 기대고 있던 그의 어깨를 밀며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감정 없는 목소리를 내며 그렇게 일어나려 하자 그가 머뭇거리면서 자신을 감고 있던 팔을 어정쩡하게 푸는 게 느껴졌다.
속으로 웃음이 새 나올 거 같은 것을 겨우겨우 참으며 거리를 둔 채 그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좀 나와 주면 완벽할 거 같은데, 천생 연기자는 못 할 팔자인가 보다.
“그…… 그것이.”
카일러가 그녀의 반응에 당황한 듯이 말을 멈춰 버리고 말았다. 굳은 얼굴에 어떤 표정도 담지 못한 채로 자신의 어깨를 지지대 삼아 떨어져 눈을 맞추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스르륵 눈동자를 굴려 피해 버렸다.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 밤이 내 마음을 크게 움직였던 것은…… 사실이다.”
“……좋아요. 몸만 있으면 되시겠네요.”
일부터 한 번 더 툭 던져 보았다. 그는 계속해서 쩔쩔매며 그녀에게 손도 대비 못한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마 그의 인생을 통틀어 이런 모습을 보여 준 것은 자신이 처음이겠지? 이렇게 말 한마디에 쩔쩔맬 정도로 놓고 싶지 않은 사람은 자신뿐일 테니까.
그게 귀를 닫아 주는 이 몸뚱어리 때문이든, 그 속의 마음까지 사랑해서인지…… 물론 중요한 부분이지만 나는 정말 상관없었다. 그래서 지금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 행복한 일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할 줄 모르는 이 남자는 사실 유심히 들여다보면 온몸으로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사샤는 그런 카일러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눈에 눈물이 그득하게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은 금방 볼 위를 굴러 떨어져 내렸다.
그의 두 눈이 더욱 커져서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사샤는 그의 양 볼을 손으로 감싼 채 그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고 그가 항상 제게 해 주었던 대로 입술을 누르고, 아랫입술을 빨아 당기고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아 주었다.
이런 움직임으로 나는 위로를 받았던 때가 있는데, 설렘으로 가슴이 뛰었던 적이 있는데…… 그는 제가 느꼈던 것을 지금 느껴 주고 있을까.
그는 미동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애가 타는 나는 계속해서 그의 입술에 짙은 입맞춤을 하며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순간의 격동이 심장을 울려 그의 입술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입술을 벌리고 그 안에서 매끄러운 그녀의 혀를 맞아 주었다.
경직되었던 카일러 대신 부드럽기도 하고 뜨겁기도 한 그가 자신을 맞이해 주었다.
고요한 물소리와 바람이 기둥 사이를 휘돌아 지나가는 정자의 안에서 두 사람은 틈도 없이 마주 안고 서로에게 녹아들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