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음식을 먹으면서 주변을 바라보고 있던 차에 사샤는 문득 마차에서 내리기 전 그녀를 멍하게 만들었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두 번째로 내 코앞에 떨어져 나와 카일러를 순식간에 공포로 몰아넣었던 그 마물에 대해서. 그것이 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던 이유…….
“뭐라고……? 난 알아들을 수가 없어…….”
분명 그녀를 향해 덤비지 않고 소리만 내고 있던 마물에게 자신이 한 말이었다.
첫 번째가 땅으로 떨어지듯이 착지하자마자 카일러를 공격했던 데에 비해 두 번째는 사샤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귀청을 찢을 듯한 울음 대신 말을 걸듯이 그녀에게 소리를 내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았다. 그 마물이…… 제게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카일러는 그녀가 먹는 것을 살피며 자신도 꾸준히 음식을 입에 넣고 씹고 삼키고 있었다. 자신이 먹기엔 하나하나 감탄스러울 정도로 맛있었는데, 제프는 이렇게 리액션 없는 주인에게 요리해 주면서 그런 건 좀 아쉬웠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망설였지만 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무리 이 세계에 대한 건 모르는 게 많다고 하지만…… 지금 하려는 이 말이 어떤 위험성을 가지고 있을지에 대해선 충분히 예상이 가능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저, 카일러.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생각 못 했던 부분인데…… 아무래도 얘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먹을 것도 다 먹은 것 같은 이 타이밍이 말하기 적절할 것 같았다. 사샤는 살짝 주저하면서도 말을 꺼냈다. 그의 눈을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일러도 어딘가 진지하고 긴장한 듯한 그녀의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포크를 내려놓고 그녀의 두 눈에 집중했다. 그가 바라봐 주는 두 눈동자에 긴장이 되면서도 약간 안심이 되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마물이 여기 나타났을 때, 첫 번째 마물은 바로 카일러를 공격했었잖아요.”
“그랬지. 그럴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그대를 던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어요. 절 어디다 던져야 안 다칠 수 있는지 본 거잖아요. 실제로 멍든 거 말곤 다치지도 않았고요. 대단해요, 정말.”
그녀의 칭찬에 살짝 쑥스러워하기도 한다. 이 남자는 단단해 보이는 껍질 속에 이토록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아, 또 생각이 다른 데로 빠져 버렸네.
“그런데, 두 번째로 내려왔던 마물, 어땠는지 기억나세요?”
카일러는 사샤가 던진 질문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날의 기억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하나하나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래서……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는 내색은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는 긴장한 얼굴을 한 채 부드럽게 미소를 유지하느라 애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마물이 천천히 저에게 다가오면서 말을…… 걸었어요. 들리는 소리라고는 키이이, 하는 소리뿐이었는데, 그냥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 마물이 저한테, 뭔가…… 말을 하려고 했어요.”
사샤는 말을 꺼낼수록, 말할수록 목소리가 긴장 때문에 경직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머릿속으로 생각할 때는 긴장하지 않고 말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과 다르게 점점 긴장을 하고 말았다.
말로 꺼내 보니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가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말을 마친 사샤는 그대로 카일러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어떤 반응을 할지 어떤 대답을 할지는 이제 그에게 달려 있는 것이었다.
걱정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이 기다리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그의 무표정 뒤에 숨어 있는 감정도 제게는 항상 잘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시야가 확 좁아져 그의 얼굴밖에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우선 놀라지 않았다. 그건 무표정에 가려진 그의 얼굴 표정이 잘 읽히지 않는 지금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제가 기억을 잠깐 잊고 있던 사이에도 그는 기억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그녀와 마물 사이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그때 그는 자신만을 보고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는데도 그것이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내 착각 같은 것은 아니란 얘기겠네.
사샤는 마치 1분 같고 10분 같은 이 침묵을 견뎌 내느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로 내리누르고 있는데도 떨리는 것만 같아서 더 꽉 물어 버렸다.
그러자 그가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오른팔을 들어 제게로 내밀더니 그 손가락이 입술 위로 올라왔다.
곧 단단한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살 눌렀다. 그의 손길이 집요하게 누르고 문질러 대어 이에 눌려 괴롭혀지는 입술을 놓게 만들었다.
“그렇게 깨물지 마라……. 이거 봐, 피 나려고 하잖나.”
그는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웠다. 어째서 이런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게 말하는 건지, 정말…….
순간 차오르고 차올랐던 긴장이 훅 풀어져서 넘쳐 버리는 것만 같았다. 내쉬는 날숨마저 떨리는 소리가 나 버렸다.
“긴장하고 있었군.”
“긴장되죠, 그럼요. 마치…… 제가 마물인데 사람 형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잖아요.”
그녀의 말에 카일러가 그제야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어 주었다.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인가.”
“그거야 저도 모르죠.”
다른 곳에서 살던 제 영혼이 날아와 듣도 보도 못한 곳의 한 영애의 몸을 차지하고 살고도 있는데…… 그런 일이라고 불가능할까요……?
제 상황으로 봤을 땐 어떤 일이든 이루어질 것만 같아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걸 모르는 카일러는 그녀가 긴장에 재밌는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나머지 입꼬리마저 올려서 진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도 이런 상황은 살면서 처음 보았다. 마물은…… 많은 비밀을 품고 있는 존재라 우리도 잘 모르지만 마물 사용자라 불리는 게라넬 또한 완벽한 통제가 어렵다고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물에 대해 어떤 상황이 나와도 당황할지언정 이해할 수 없고 이전까지 없었던 일이라 해서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말을 믿어 주는 것이 신기했다. 이 남자라면 자신이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말해 줘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하지만…… 딱 봐도 이상하지 않나요? 마물이 제게 말을 걸려고 했다고 하니까요.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제가 마물이라고…….”
아, 말을 하다 보니까 뭔가 핑 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사샤였다며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카일러…… 내가 다락방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 그거 아닐까요? 내가, 마물이라서……? 마물과 연관 깊은, 그 어떤 것이어서……?”
아까까지만 해도 그저 생각나는 이전의 어떤 기억을 전달하자는 가벼운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그녀의 두 눈이 공포에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직접 겪어 보지 못한 것이었지만 제 몸에 남은 기억이라는 것이 있었다. 혼자 있는 게 제일 편하면서도 밤에 혼자 있다 보면 문득,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심장이 빠르게 뛸 때가 있었다.
그리고 혼자 있는 게 무서워 몸을 떨 때도 있고, 소시지를 탐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가장 궁금했던 게 있었다. 사샤의 부모님은 왜 그녀를 다락방에 방치했을까. 밤만 되면 외로워했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다가가다가도 흠칫흠칫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무서워지고는 했다.
그런 것들이 바로 몸이 기억하고 있는 이전 사야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맞나 봐요…….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하게 하고, 그냥 다락방에 두고 키웠나 봐요……. 왜, 왜 죽이지 않았을까요? 마물이면 죽여야 하지 않아? 저도 마물이 되어 산맥을 날아다녔으면…… 게라넬의 통제를 받으며 살았을까요……?”
사샤는 갑자기 자신의 감정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무서워졌다. 정확하게는 자기 자신이 무서워져서 머릿속이 어지러워져 버리고 말았다.
횡설수설하며 말을 쏟아 내는 그녀를 카일러가 팔을 당겨 주었다. 사샤는 하릴없이 그 힘에 끌려가 그의 허벅지 위에 앉혀졌다.
“이거 놔 봐요. 나는…… 내가 뭔 줄 알고.”
사샤가 점점 공포에 빠져 갈 때 카일러는 미동도 없이 굳건한 힘으로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꾸욱 눌러 그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사샤.”
그가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지금 ‘그녀’와 ‘나’의 분열을 겪고 있던 내게 그 이름은 멀고 먼 타인의 이름처럼 느껴졌다.
“사샤……. 사샤.”
카일러는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을 읊조려 주었다. 왼쪽 귓바퀴 위에서 울리고 있는 그 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럽게 공기를 훑고 지나갔다. 그러다 속삭임처럼 부드럽게 불리던 그 이름은 딴딴한 목소리로 발음할 때엔 귓바퀴에 꽂히듯이 들렸다.
“사샤……. 너는 사샤다. 내가 너의 증명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카일러는 그녀의 귀에 나른한 목소리를 흘려주고 등을 쓸어 주는 손과 귀를 매만지는 손 틈에서 그는 꾸준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증명……?
사샤는 그의 말에 품에서 내려오기 위해 바르작대던 몸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 품에 안겨 있는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그래, 증명.”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듯이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일러는 자신을 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믿음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나를 응시해 주는 것만 같았다.
“사샤, 그대가…… 마물이 아니라는 증거 말이다. 굳이 그런 증명까지도 필요 없이 그간 지내온 것만 봐도, 그대는 한 번도 그런 이상한 존재였던 적이 없었다.”
비약적인 사고는 거기에서 뚝 멈추었다. 왠지 그가 그렇다고 말한다면 다 그게 맞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