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로제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가신다고요?”
질문의 방향도 그녀가 아닌 카일러에게로 향했다.
카일러는 눈은 맞춰 주었지만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눈은 다시 사샤에게로 향했다.
“우할린 숲으로 갈 거야. 거기 정말 예뻤거든.”
로제는 순간 자신이 한 2주 전쯤으로 시간 여행을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일러가 우할린으로 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곳은 마물이 나온다는 산맥과도 가까웠고 최근에는 우할린 숲에까지 마물이 나타난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사샤는…… 불과 얼마 전에 그곳에서 마물에게 공격을 받았고, 그 일로 인해서 카일러가 폭주하고 그와의 사이도 멀어진…… 그야말로 암흑과도 같은 며칠을 보내게 한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이 미소가 더 짙어진 사샤는 손을 뻗어 로제의 손을 잡았다.
“굳이 갈 필요 없다는 것은 아는데, 가 보고 싶어서 그래. 일하느라 바쁜 카일러의 곁에 잠깐 있으려고. 오늘 산맥이 아니라 숲으로 간다기에 오늘만 따라갈 거야.”
뭐 하나 안전해진 것 하나 없는 곳으로 보내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하게 보였지만 사샤가 저토록 좋아하고 카일러마저 말리지 않으니 로제로서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제프에게 전달해 두겠습니다. 나가실 때 말씀해 주세요.”
“응. 고마워, 로제.”
사샤는 황궁에 갔다가 카일러와 함께 돌아왔던 그날 이후로 계속해서 미소를 짓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다쳤던 것 아팠던 것도 모두 잊은 듯이 밝게 빛나 보였다.
로제는 어느 정도 안심이 된 마음을 속으로 다독이며 그녀에게 맛있는 도시락을 준비해 줄 제프에게로 종종걸음 쳤다.
아침을 먹고 나서 바로 외출 준비를 마친 그들은 제프가 만든 도시락을 마차에 챙겨 넣고선 출발했다. 제프가 작정을 하고 만들었는지 도시락이 3단쯤은 되는 것 같았다. 엄청 커서 낑낑대며 받아 들다가 가까이 다가온 카일러의 손에 가볍게 들려 마차에 실렸다.
뒤에서는 딜런이 말을 타고 따라오고 마차는 고요히 출발했다. 그 안에서 카일러와 사샤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근데 정말 괜찮겠어요? 저 데려가셔도?”
사샤가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자신이야 그냥 그의 곁에 있겠다는 자기 욕심 때문에 따라나선다고 말한 거지만 그 숲으로 함께 간다는 것이 그에게는 큰 걱정거리일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일을 하면서 그녀를 지키기까지 해야 하는 일이니까.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주저하긴 했지만, 그가 거절하거나 난감한 기색을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철회하겠다는 생각으로 말을 했던 것이다. 생각보다 너무 흔쾌히 그러자고 대답해 주어서 사샤가 오히려 놀랐었지만.
“문제가 있었다면 절대 데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까지 그 숲을 계속해서 지켜봐 왔고,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 물론 그때처럼 된다 해도 다치게 하지 않을 거다.”
이렇게나 듬직한 남자니까 욕심을 부리고 싶어지는 거다.
“요즘 계속 아침저녁에밖에 못 보니까 아쉬워서……. 제가 떼쓰는 걸까 봐 조심스러웠어요.”
그는 손을 뻗어 사샤의 손을 잡아 주었다. 작은 손을 감싸 주는 그의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함께 가고 싶다고 얘기를 해 주기에 걱정 덜고 함께 가자고 했던 거였는데, 아직 걱정이 많이 남아 있었군.”
“내가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고요…….”
데려가 달라 할 땐 언제고 막상 갈 때가 되어 걱정을 쏟아 내자 그는 제가 그날의 기억 때문에 무서워하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거랑은 조금 다른데. 사샤는 꼬옥 힘주어 잡는 그의 손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일하러 가는 데에 눈치 없이 끼어드는 거잖아요. 게다가 마물이 나올지도 모르는 곳인데.”
“우리도 마물이 오는지 안 오는지 보러 가는 거니까 크게 신경 쓸 것 없다. 그대가 곁에 있으면 나는 안정적이고 좋지.”
아, 그렇지. 그녀는 자신이 잡고 있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면서 다시 한번 그것을 상기시켰다.
그의 귀를 괴롭히는 그것이…… 제게 닿으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그것 때문에 꽤 깊은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지금은 소리가 들려요?”
카일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잡았던 손을 놓더니 잠깐 눈을 감고 있었다. 사샤도 긴장한 채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자 그가 스륵 눈을 떴다.
감겼다 뜨는 눈꺼풀 안에서 조심히 드러나는 푸른 눈동자가 마치 깊어지는 밤하늘 같이 쨍한 색깔이라 잠깐 넋을 놓고 바라보고 말았다.
“지금도 조금 들린다. 이 소리는…… 역시 마물일거다.”
“그거 숲에도 또 내려온다는 이야기예요?”
그때 봐서 알았지만…… 마물 한두 마리쯤은 카일러 혼자 알아서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아마 그가 더 제대로 싸운다면 몇 마리쯤 더 있어도 끄떡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곁에 싸울 줄도 모르는 사람 하나가 같이 있다면 그건 이야기가 달랐다.
“산맥에 있을 거다. 보통의 마물은. 만약 그대를 지킬 수 없을 정도라면 딜런에게 그대를 맡기고 싸우려고 데려오기까지 했다. 준비 많이 했으니 걱정 놓아도 된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해 주니 걱정을 거듭하는 것도 그에게 실례가 되는 것 같았다.
“좋아요. 카일러랑 딜런이 저를 지켜 준다니까 너무너무 든든해요.”
사샤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그의 손을 끌어다 이번에는 자신이 그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가는 동안만이라도 귀가 편안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마차가 달리고 달리는 사이 사샤는 그때 숲에서 만났던 마물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만약 또 그런 일이 생기면 놀라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놀라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떠올려보자 했던 것이다.
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메다 꽂히듯 떨어져 대번에 카일러와 싸우던 것은 생각도 잘 나지 않는다. 그가 던져 준 덕에 바닥에 떨어져 정신이 없었고 그가 싸우는 모습에 정신이 팔려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그다음에 나타났던 녀석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서양 판타지 영화 같은 데서 많이 나오던 용과 비슷한 모습이었던 것도 같다. 조금 많이 앙상했지만 날개도 있었고 겉의 가죽은 일반 가축이 아니라 단단한 철갑옷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딴딴해 보였다.
그리고 무시무시하게 날카로운 이빨까지…….
다시 떠올려 보아도 그 외양은 정말 무시무시했었다.
그런데 그 마물이 있는 곳으로 다시 가는 것 자체는 희한하게 무섭지 않았다. 다들 내가 거기 간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무섭지 않냐고 물어서 사실 속으로 살짝 의아해하고 있던 차였는데…….
“아…….”
“음? 무슨 일이지?”
마차가 슬슬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숲 근처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던 사샤는 아니라는 뜻으로 손을 살짝 흔들어 보이곤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생각에 빠진 사이 마차는 숲의 입구 바로 옆에 도착했고 카일러는 마차에서 내려 안에 앉아 있는 사샤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아, 도착했군요. 내릴게요, 고마워요.”
그녀는 생긋 미소를 지어 보이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피는 사이 카일러는 마차 뒤편으로 가서 도시락을 챙겼다.
살짝 멍한 얼굴인 그녀를 보던 카일러는 말없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로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시냇물이 있는 곳까지 가겠나.”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바라보던 카일러는 묵묵히 그녀의 곁에 바짝 붙어 걷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처음 가는 길이어서 그랬는지 꽤 멀게 느껴졌었는데 다시 찾아가려니 그때보다는 훨씬 가까웠다.
“두 번째 봐도 아름답네요.”
물소리가 들릴 때부터 설레더니 변함없이 아름다워 보이는 풍경을 보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반응에 허리를 감고 있던 카일러의 팔에서도 힘이 빠져나갔다. 그 힘이 긴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하얀 정자 안 테이블에 제프가 싸 준 도시락이 펼쳐졌다. 하나하나 열어 보면서도 사샤는 감탄을 계속했다. 그냥 간단한 샌드위치 같은 것들이 있겠거니 했었는데, 썰어 놓은 스테이크라든지, 닭고기가 들어간 샐러드, 그리고 빵과 치즈도 들어 있었다.
“우와…… 이 정도면 저녁 메뉴 아니에요?”
감탄하는 그녀를 유심히 보던 카일러가 미소를 지었다.
“딜런도 같이 먹는 거 아니에요?”
조금 기다려 봐도 저 뒤쪽에서 따라오던 딜런이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물어봤던 건데, 카일러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음? 왜…… 그렇게 보세요?”
그의 눈길이 의아해서 물었는데 그의 눈매가 살짝 휘어졌다. 오, 눈으로 웃는 모습, 처음 보았다.
“그대가 그렇게 말할 것 같아서 딜런의 몫도 따로 챙기라고 일렀다. 아마 혼자 편안하게 자리 잡고 먹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잘 알아서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본인이 본래 그런 걸 잘 챙겨 왔던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그의 마음씀씀이가 보여서 사샤는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그럼 어서 먹기부터 해요, 우리. 제프가 빨리 먹을수록 좋다고 했어요.”
가방 안쪽에서 포크를 찾아 꺼내어선 그에게 하나를 내밀어 주었다.
“정말 소풍 나온 거 같아요.”
“그렇군. 소풍이라…… 이런 게 소풍이라면 나는 처음 나온 것 같군.”
“아! 정말요? 좋다! 나랑 처음 하는 거네요.”
살짝 아련해지려는 걸 사샤가 환하게 미소를 지어 주는 것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카일러의 입가에 무방비한 미소가 떠오르자 사샤의 미소도 더 짙어졌다.
지금 나누고 있는 이 소소한 것들도 다 행복이기 때문에 그와 함께하는 것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