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전체 회의에서 바로 이야기하기엔 어려운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이 부분은 후작님께서 결정하고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회의 진행자는 바로 그가 한 말의 심각성을 눈치채고는 말을 부드럽게 수습해 정리했다. 이베른도 거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확실히 지금 약간 울컥하는 마음에 꺼낸 이야기였으나 꽤 많은 것 들을 고려해야 하는 움직임이었다.
“아무튼 유폐자들의 모임이 다시금 힘과 자금을 축적해 나가고 있는 중이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언제든 마물로 제국에 혼란을 줄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였으니 신속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할 듯합니다.”
“그들의 손을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신속한 처리가 필요하다. 모두 의견이 있다면 보내 주어도 좋다. 작은 단서라도 모이면 도움이 되지.”
이베른은 아직도 로브 아래에서 씨익 웃고 있는 크론드의 입술을 바라보면서 안으로 보이지 않게 이를 꽉 물었다.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때 아예 화근을 없앴어야 지금 마음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란 아이가 공작부인이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냔 말이다.
“모두의 힘을 모을 때다. 이대로 통제력을 잃게 된다면 게라넬의 존재 이유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명심하도록.”
“예, 명심하겠습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회의장을 울렸다. 이베른은 그 속에서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흔들리는 호흡으로 낮은 한숨을 내쉬면서 티 안 날 정도의 속도로 회의장을 나섰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느라 어수선해진 회의장에서 진행자 또한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회의장 문을 열고 나가자 곧바로 홀을 가로지르고 있는 이베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는 사람이 보자면 그의 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듯했다. 진행자는 그의 뒷모습을 확인하자마자 급한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후작님.”
큰 소리를 내지도 않고 따라잡은 뒤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살짝 흠칫하는 발걸음에 곧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진행자가 그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발견한 그는 순식간에 눈동자를 움직여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재빠르게 살폈다.
회의 진행자는 제국의 회의에도 참석하고 있는 브리타스 백작이기 때문에 이베른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어떤지도 잘 알고 있었다.
수도 가까이에 살면서 귀족 회의에도 꼬박꼬박 참여하지만 권력을 내세워 뭔가를 하지는 않으며 그저 온화하게 힘을 보내는 이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모두 자신의 영지에서 득볼 수 있는 이야기를 꺼내기 바쁜 귀족들 틈에서도 묵묵히 다른 이들의 의견을 전하는 것에만 나서는 남자.
하지만 이곳에서 보는 게라넬 수장의 이베른은 그냥 다른 사람이었다. 지금 순식간에 주변을 훑는 육식 동물 같은 눈빛이 심장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할 이야기인가.”
“자리를 잠깐 옮기시죠.”
브리타스는 조용히 그를 앞질러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2층의 가장 가까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방 안에는 딱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파 두 개와 그사이 협탁만이 놓여 있었다.
“이것을.”
그 협탁 위로 브리타스가 편지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것은 평범한 편지 봉투로 보였다. 그러나 이베른이 그것을 들어 여는 순간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편지 봉투로 위장한 그 안에는 황궁의 것임을 나타내는 인장이 달린 화려한 봉투가 담겨 있었다.
“황실……? 황제 폐하인가?”
“그것이…… 황후 폐하의 서신인 것 같습니다.”
이베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후…… 방금 이베른이 그걸 떠올린 참이긴 하지만 이렇게 그녀에게서 먼저 연락이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부분이었다.
“황후께서 나한테 무슨 일이지.”
오로지 그녀가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이그노트 공작뿐인 줄 알았는데……. 게다가 그가 마물과 엮인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말이야.
잔뜩 경계심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편지 봉투를 열었다. 그녀는 정치에도 관심이 없었고, 황제인 리디안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황후의 의무 따위는 하나도 챙기지 않고 오직 자신의 감정이 중요한 그 여인이 아직도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리디안이 아끼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나라면, 진작에 쳐냈을 텐데. 대부분의 귀족 남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친애하는 게라넬의 수장.
이렇게 서신을 보내는 것이 누구인지는 아마 알 수 있겠지, 내가 이렇게 서신을 보내는 이유는 제국에 위협이 될지도 모른단 소문이 퍼지고 있는 마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라네…….]
친근한 척 시작하는 대화는 확실히 황제의 것은 아니었다. 비밀 서신으로조차 자신의 정체를 특정 짓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냄새가 났다.
“이거…… 생각보다도 더 순진한 여인이 아닌가.”
그의 눈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앞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브리타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
분명 아침이 되어 카일러의 방에서 같이 나온 카일러와 사샤였는데, 식당의 식탁에 마주 앉은 그들 사이에선 무언가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사샤가 빵을 집어 들면 마치 보고 있었다는 듯이 버터를 건네었고, 그가 우유를 마실라치면 사샤가 바로 저쪽 테이블 끝에 있는 우유가 든 잔을 바라보았다.
서로를 신경 쓰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도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어.”
“아…….”
그러다가 빵을 동시에 집으려던 손이 스치자 그제야 놀라서는 서로를 바라본다. 그마저도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손을 거두어 갔다.
“어머!”
“어머어머, 세상에.”
그렇게 카일러가 시선을 돌리고 사샤가 입술을 앙물어 웃음을 참을 때, 주방 쪽에서 쪼로록 튀어나온 작은 머리통들은 감탄 소리를 내기에 바빴다.
“요즘 두 분 좀 더 설레는 분위기이지 않아?”
미니가 동그만 머리통들 중 중간에서 그렇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위아래로 쭈르륵 퍼지면서 다른 하녀들의 감탄도 이어지게 했다.
“그러니까! 심장이 막 간질간질~ 해.”
“주인님들 마치 연애하시는 것 같아. 그치?”
어린 하녀들은 공작과 그 부인이 아침부터 뿜어내는 알콩달콩한 분위기에 심취해 있었다.
카일러를 모시면서 항상 고요하고 살벌한 공작저만 보아 오던 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물론 지금 카일러를 겉으로만 본다면 표정도 풍부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말을 살갑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로서 그의 변화를 전혀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침 식사부터 어쩜 저렇게 설레니?”
“설마…… 지금 공작님 쑥스러워하시는 걸까요?”
“맙소사…….”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꺅꺅거리는 그녀들의 올망졸망한 뒤태를 가만히 바라보던 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희들.”
로제가 던진 딱 세 음절에 하녀들의 어깨가 흠칫하는 것이 바로 보였다. 천천히 뒤를 돈 아이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그녀들의 무서운 하녀장을 올려다보다.
“하, 하녀장 님…….”
“저, 저희 방해 안 되게 조용히 이야기 나누고 있었어요.”
그녀의 등장과 가라앉은 목소리에 제 발부터 저린 새라가 그렇게 말했다. 네 명의 하녀들은 들여다보던 것은 관두고 로제의 앞에 좌르륵 나란히 섰다.
로제가 화낼 것이 분명하다 생각해서 잔뜩 쫄아 있던 하녀들에게 호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혹시나 식당이 가까워 소리를 못 내고 있는 것인가, 하고 코니가 슬쩍 생각하고 있는 사이 로제가 짧게 날숨을 뱉었다.
“두 분 식사하시는 사이에 공작님 방을 정리하고 정돈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요즘 두 분 집무실 아니면 공작님의 방만 오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아…….”
로제가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이것도 분명 그냥 넘겨선 안 될 일이었다. 네 명의 하녀는 얼른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서는 쪼르르 식당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로제는 제프가 만들어 올려 둔 따뜻한 밀크티를 챙겨 들고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식사 마치셨으면 밀크티를 드시겠어요?
그들은 눈을 가만히 마주치고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듯이 앉아 있다가 그녀가 나타나자 그 얼굴 그대로 돌아보았다.
아까 아이들이 꺅꺅대면서 말하던 것처럼 연애하는 청춘 남녀 같은 설렘이 보는 사람들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아마 나중에 혼자 이 장면을 떠올린다면 왠지 어이없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제가 20여 년 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이 어디 사라진 것만 같아서 말이다.
“응, 로제. 나는 밀크티 먹을게. 고마워.”
사샤가 로제의 질문에 대답을 하자 카일러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들의 앞에 따끈한 김을 올리는 컵을 내려놓은 그녀를 향해서 사샤가 말했다.
“로제, 제프에게 오늘 점심은 도시락으로 부탁한다고 좀 전해 주겠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 가던 사샤는 생기 머금은 눈동자를 한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을 바라보며 눈도 떼지 못하고 꺅꺅거리고 있던 아이들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웃음기를 머금은 사샤의 눈동자가 예쁘게 빛이 났다.
그리고 그걸 느끼는 건 자신만이 아닌지 카일러도 식탁 너머에서 내내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눈빛을 금방 되돌린 사샤에 정말 감탄하고 있었다.
“소풍 나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평소 필요한 말 이외에는 말을 잘 붙이지 않던 로제마저도 사샤에게 대화를 청했다.
“응. 카일러가 일하러 간다기에 같이 가기로 했어. 우할린 숲으로.”
그리고 로제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소풍을 가는 것은 좋았다. 도시락을 싸 달라 하면 제프는 신나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간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