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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81화 (81/128)

81화

대륙 너머에서부터 시작된 산맥은 대륙의 시작점을 지나 이베른의 영지릐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려 그 끝을 맞는다. 이베른 영지의 북쪽 끝, 제국 사람들은 산맥의 시작이라 부르는 그곳에 게라넬의 본관이 있었다.

산맥의 초입과 다름없는 위치였으나 길과는 떨어져 있는 곳에 아무도 모르는 거대한 나무 저택이 있었다. 으슥한 숲길과 이어진 저택의 입구로는 누가 드나드는지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나 깊이 숨어 있는 건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홀과 넓은 회의장, 그리고 식당뿐인 1층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마다 근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홀을 지나자마자 바로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이베른도 많은 이들이 거쳐 들어간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섰다. 날카롭게 뜬 초록 눈동자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오셨습니까.”

그가 홀로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 이가 그에게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회의실 문 앞에 서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감시하듯 보고 있던 그는 이베른에게 인사를 건넨 뒤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넓은 회의실에 비해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공간 안에 울리는 웅성거림을 가르고 이베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등장과 함께 장내는 조용히 가라앉았고 문 밖에서 이베른을 맞이했던 이가 들어와 회의 테이블 제일 끝에 앉았다.

“오랜만에 이렇게 자리했습니다. 사실 한꺼번에 모이는 자체가……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닙니다만.”

회의 진행자의 이야기에 모두들 집중했다.

그의 말대로 게라넬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이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보통 산맥의 북쪽과 산맥의 남쪽에 나뉘어져 상주하기 때문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마물 통제가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밝혀내셨습니까.”

호기롭게 질문을 투척한 마물 사용자 하나는 곧 이베른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았다.

“실전에서 뛰다 보면 위아래 감각을 잃게 된단 말이지…….”

그리고 곧 이어진 이베른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그 목소리를 들은 주변인들은 모두 경직된 얼굴로 그를 향해 시선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오랜 전통을 이어 오고 있는 만큼 다른 이들에게 없는 능력을 가진 이들을 발견하고 훈련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한 훈련을 통해서 마물을 통제하고 있지만 이럴 때 아쉬운 것은 바로…… 원리에 대한 탐구 자료가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회의 진행자가 이베른 대신 입을 열었다. 젊은 패기로 일어섰던 남자는 이미 후작의 날 선 한마디에 꼬리를 내리고 자리에 앉았다.

회의 진행자는 패기를 앞세워 회의 분위기를 흐릴 뻔한 것이 정리되자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10여 년 만에 다시 나타난 이 사태를 해결하는 데에 여러분들의 지혜를 모으고자 합니다.”

지금 게라넬에는 한 달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찾지 못한 채로 이렇게 결국 모이게 되었다.

“마법사와의 교류를 통해 원인을 찾기 위해 노력을 할 예정이다. 그전까지 혹시 알게 된 것들이나 혹은 의견 같은 게 있다면 이야기를 나눠 보고자 자리를 마련한 것이니 편안히 얘기하도록.”

이베른은 결말을 던져 놓고 그사이에 스윽 장내의 사람들을 훑어봤다.

“그…… 북쪽에선 대부분 한곳에 몰려 있는 게 특징입니다. 활동성이 떨어져서 건드리지 않아도 그러다 알아서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물이 가만히 있다가 알아서 죽는 것은 바깥의 일반인들이 보기엔 아누 반가운 일일 것이다. 사람을 공격하기 위해 일부러 돌아다니지 않으면 피하면 그만이고, 마주치더라도 재빠르게 도망가는 방법만 알면 되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업인 이들에게 아무리 건드려도 꼼짝도 않는 마물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남쪽에서는 너무 날뛰어서 문젭니다. 최근 우할린 숲으로까지 내려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지난번 이그노트 공작 내외가 산맥 가까운 숲까지 들어왔다가 습격당한 이후로 잠깐 잠잠하다 했는데 하루에 하나씩은 튀어나가는 것 같습니다.”

“이그노트 공작 내외가 왔던 날이 좀 다른 날과 달랐던 것입니다. 그날은 마물이 둘씩이나 우할린 숲으로 넘어갔고, 사람을 보자마자 바로 공격했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물은 본성이 사람을 공격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마저도 통제해야 하는 것이 마물 사용자의 임무였다. 그것이 되지 않고 산맥을 넘어 숲을 침범하는 것도, 그리고 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문제였다. 그리고 북쪽보다 이쪽이 훨씬 심각한 문제였고.

“그것 때문에 이그노트 공작이 지금 잔뜩 벼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그노트의 이름이 나오자 게라넬 전체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없애도 다시 어디선가 ‘생성’되는 마물이었기 때문에 게라넬에게 이그노트는 그저 조금 많이 귀찮은 사람이었다.

분명 그가 부지런히 나선다면 게라넬의 손해가 좀 있었지만 온전한 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어차피 마물이 완벽한 통제가 어려운 만큼 생성 또한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그쪽에서 토벌을 선언하고 나섰다 해서 당장 산맥의 모든 마물을 없앤다 하더라도 곧 어디선가 생성된 마물이 튀어나올 거다.”

이베른은 이그노트라는 이름에 굳어 버리는 이들을 달래 주겠다고 말을 꺼냈지만 정작 본인도 그렇게 밝은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밖으로 나가지 못해 주기적으로 칭얼거리던 엘리나는 이그노트 공작 내외가 우할린 숲에서 마물의 습격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는 주춤했다.

공작이 다치진 않았다는 말을 듣고 화색을 보이다가 마물이 사샤를 공격했고, 그것을 카일러가 물리쳤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또 황궁으로 가겠다고 난리가 났다.

정말 이만저만 골치 아픈 것이 아니었다.

“지난번…… 이베른 후작님 첫째 영애께서 태어나셨을 때도 이런 일이 있었더랬죠?”

그때 회의 테이블 저쪽 끝에서 한 남자가 말을 꺼냈다. 나이가 이베른과도 엇비슷해 보이는 그는 로브를 입고 후드를 깊이 뒤집어쓴 채였다.

“크론드…….”

그는 한창때…… 다시 말하자면 사샤가 태어나던 때에 현역으로 산맥을 뛰어다니던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때 마물의 이상 행동과 사샤의 연관성 때문에 말이 많았던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지.”

이베른은 말을 덧붙이지는 못한 채 짧게 수긍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크론드는 거기에서 멈출 생각이 없는 듯이 다시 걸걸한 목소리를 냈다.

“그때 또한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갔었더랬죠. 첫째 영애님…… 이름도 기억나질 않는군요. 그분에게 마물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기운 이 있어서라는 말도 있었고, 마물이 후작저에 내려갔던 사건 이후로 영애님께서 마물의 기운이 중독이 됐다고도 했고…… 결국 그분을 다락방에 가둬 키우는 것으로 일은 일단락이 되었더랬죠. 그 후 한 달 뒤 점차 통제력에 따르기 시작했으니까 말입니다.”

마물 사용자들은 한창 활동하는 나이가 젊기 때문에 은퇴가 빠른 편이었다. 젊었을 때 산맥을 누비며 번 돈으로 나이가 들면 시골에 작은 집을 마련해 여생을 보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크론드 정도의 나이에 아직 남아 있는 이는 많이 없었기 때문에 방심하고 있었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원인을 몰랐기 때문에 나름의 최선의 방법을 총동원했던 것이었다.”

크론드는 이베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랬죠, 그랬었죠……. 그때의 변화가 그 영애님이고 해결도 그 영애님에게 취한 조치가 먹혔던 거라면…… 이번에도 그 영애님을 제일 먼저 떠올려 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자 다른 이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몰랐던 이야기에 호기심을 보이는 젊은 사용자들과 어렴풋이 알고 있는 중년층 사이에서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고 나누는 목소리가 한동안 소란스럽게 울렸다.

“첫째 영애님이라면 최근 이그노트 공작과 결혼한 사샤 공작부인을 말씀하시는 거겠군요. 그럼 역시 그분의 변화가 맞는 건가요? 그분이 다락방에서 나오셨기 때문에 마물의 통제력을 상실한 겁니까?”

내용을 이제 이해한 이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이베른도 최근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어서 성인이 되어서 후작저만 나가 주면…… 골치 아픈 일은 모두 해결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녀가 지금 머무는 곳 또한 산맥 근처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역시 그녀가 마물의 통제를 방해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을까.

이그노트도 마물 토벌에 대한 방법을 못 찾고 있었지만 이쪽도 통제 능력 상실의 이유에 대해 방법을 찾질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그 모든 일에…… 사샤가 연관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이베른은 제일 마음에 안 들었다.

게라넬의 수장으로서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가 제 딸이라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안쪽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저택 전체에 결계를 쳐 놓고도 그 아이를 다락방에 가두고 키웠다.

“역시…… 화근은 깔끔하게 제거를 해야 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크론드의 거친 목소리가 위험한 말을 꺼냈다. 회의장 전체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하다못해…… 통제는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베른은 이미 출가한, 심지어 이그노트의 공작부인이 된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해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무언가 번뜩 떠오르고 말았다.

엘리나가 그렇게 부르짖는 황궁. 그곳에서 그녀가 만나려 하는 이가 바로 황후였다. 이그노트 공작부인이 된 사샤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엘리나와 이야기가 잘 통한다는 그녀를.

“이젠 이베른의 영애가 아니라 이그노트의 공작부인이 되었지……. 하지만 한번 시도해 볼 만은 한 것 같군. 방법을 찾아보겠네.”

이베른이 자기 딸을 두고 하는 말에 스멀스멀 스며 나오려던 목소리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오롯이 후작의 눈만이 음흉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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