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사샤는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그의 온기가 아쉬웠지만 그에게 칭얼대지 않았다. 다행하게도. 그러면서 많은 말과 행동을 꾹 참고 그가 움직이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는 저와 붙어 있던 몸을 떼는 것으로 뭔가를 생각하려는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궁금하고 궁금했지만 사샤는 조금만 더 기다리자 하는 생각으로 인내심을 길러 보며 기다렸다.
“사샤. 미안하다.”
그에게서 나온 것은 사과의 말이었다.
그는 매번 진지했지만 지금 이건 정말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는 것을 사샤는 바로 눈치를 챘다. 그와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관해서 서로 계속 겉돌고 있다는 것까지.
“왜 미안해요. 항상 절 지켜 줘 놓고 카일러가 왜 미안한데요.”
사샤가 그의 손이라도 만져 보려고 손을 뻗어 그의 손등 위에 올리려는데 그가 스윽 자신의 손을 그 자리에서 치웠다.
그리고 그것에 충격을 받은 그녀를 향해 그는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래요? 말을 해 줘요.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건 너무 답답해요.”
사샤는 침착했다. 그가 화가 난 것도 아니고 아파서도 아니고, 자신을 떨어뜨려 놓으려고 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걸 알고 나니 차분하게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혼자 삽질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사과할 건 사과하고, 얘기할 건 얘기해야 다음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 부분을 그가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내 귀는…… 제국의 위험을 감지한다. 주로 재해, 반란, 그리고 마물.”
사샤는 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중간에 방해하지 않고 사샤는 말을 꺼낸 카일러의 두 눈을 응시했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카일러의 몸에 문제가 많이 없었던 것일까.
“그것은 예고도 없이 찾아오고 그 정도도 천차만별이다. 어떤 날은 그냥 누군가가 대화를 나누는 정도에 그치지만 정말 큰일이 생겼을 땐 아플 정도로 고통스러운 소리가 난다.”
음……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적응하고 사는 것부터가 일이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 그 예민하던 시기에 얼마나 많이 알고 알려져 있었는지 모를 것이다. 그때 적응했던 것처럼 적응하며…….
알고 보면 그의 얼굴에 표정이 없는 것은 진짜 없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것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그는 그 안에 주로 슬픔과 괴로움을 감춰 온 것이다.
그리고 매우 고맙게도…… 자신에게는 그 얇은 가면 뒤 감춰진 표정을 아주 잘 보여 주는 것이었다.
“힘들었겠어요. 예고하고 와도 겁먹을 텐데 언제 올지도 모른다니.”
“작은 아이였을 땐 정말 집을 나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주체를 못 했다. 방황의 시간은 물론 있었다. 이 들리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고 해결할 방법도 모르고…… 그리고 이 고통이 죄악을 여겼을 때엔, 정말 괴로웠다.”
혼돈의 시간 속에서 그는 또 혼자였다. 바람과 폭풍이 번갈아 그를 괴롭히고 영문도 모를 소음에 괴로워했었다.
“금방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는 이걸 능력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결심했다. 그리고…… 그러던 중에 그대를 발견했다.”
힘들었던 그 힘을 능력으로 승화했다는 데에서 사샤는 기어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아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고생을 편안하게 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니까 잡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카일러는 그 손을 굳이 떼어 내려 하지 않았다. 사샤는 그의 손을 잡고 평온하게 토닥토닥 두드려 주고 주물러도 주면서 그가 편안한 얼굴이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락방에 갇혀 있다가 지나가는 나를 붙들고 계약을 제안하던 당돌한 그대와 닿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나와…… 닿고 나서.
그날은 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다. 계약에 관한 내용까지 모두 소멸해 버리고…… 거기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다시 표현한다 하면……. 그대와 닿고서 난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지.”
그가 하는 말들이 어쩌면 하나같이 고백같이 느껴지는 것일까. 참 알 수가 없었다.
그건 아무리 나 혼자 좋아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그의 이야기에 동반되는 고통의 이야기엔 슬픔이 가득 느껴졌다.
웃으며 붙잡은 손을 좀 더 꼬옥 힘줘 잡았다.
“내가 그대를 내 결혼 상대로서 생각하고 계약까지 하며 데려온 이유는…… 이렇게…… 사샤, 그대와 빨리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는 끝내 한 번 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꺼내려는 말을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한 고민은 계속 해 오던 것이었다.
“그대와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닿아 있으면 나를 괴롭혀 대는 소음들을 완벽하게 차단해 준다.”
사샤는 단번에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가 없었다. 내게 닿는 것으로 소음이 사라진다는 이야기인가. 나는 아무것도 가진 힘이 없는데 무엇이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걸까.
심지어 처음 그를 만났던 것은…… 내가 아니라 이 몸이 가지고 있던 본래의 주인이었다.
그때와 지금의 그녀는 같을 수가 없을 텐데…… 그럼 그 현상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대와 이렇게 손을 잡고, 끌어안고, 이렇게…… 키스하고…….”
카일러는 사샤의 손을 잡아끌었고, 그녀의 작은 몸을 끌어안아 주고는 턱을 잡아 올려 키스를 했다.
부드럽게 진한 입맞춤에 홀린 듯 사샤는 눈을 감고 있었다.
“하…… 이렇게 닿아 있을 때면 내 귀를 괴롭히는 소리들이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그대를 택했던 것이다.”
아, 그러니까…… 처음 계약했던 것이…… 사샤는 그곳을 벗어나는 것이었고, 카일러는 자신의 고통을 벗어날 기회를 얻는 것이었구나.
계약을 할 만했다. 이 만남은 운명적으로까지 느껴졌다.
“제가…… 카일러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다니 그거…… 너무 좋은데요? 그런데 왜 그 말을 해 주는 카일러의 표정이 썩 안 좋은 거 같죠?”
기분 탓일까. 그녀 덕분에 소음에서 해방된다는 말을 하고, 그녀의 볼에 입 맞춰 주며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아 주는 그의 행동은 다정하기만 한데, 눈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눈은 약간의 죄책감을 가진 채 호수가 일렁이듯 떨리고 있었다.
“내 이 귀의 소음을…… 능력이라고 생각하며 제국을 지키는 데에 사용하겠다고 어렸을 때부터 다짐을 했다. 제국에서의 안정된 삶을 제공받은 터라 적은 인원으로 공작저를 꾸리면서 이용해 나갈 가치가 충분하다고 인정된 것이었어.”
카일러는 이제 목소리를 단단하게 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 것이다. 사샤도 그의 손을 꼬옥 맞잡은 채로 그의 다음 말을 숨죽여 기다렸다.
“이 능력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가끔은 심하게 아파서 앓아누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걸 놓을 수는 없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다가 그대를 만났고…… 처음엔 좋았다. 나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니까.”
하지만 그것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 편안함이 감정이 되고 그 감정은 짧은 다리를 지나 한없이 벅차올라 버리고 말았다.
“좋아하게 되면……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손을 못 대게 되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카일러는 이제 눈썹을 찌푸려 팔자를 그리고 있었다. 속이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리기도 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괴롭게 만들었을까. 왜 하나를 풀면 다 푸는 게 아니라 하나를 풀면 다음 것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번 숲에서의 일을…… 상기해 봐라.”
그가 결심을 한 듯 잇자국으로 부어오른 입술을 움직였다. 이번 숲에서의 일, 사샤는 짐작 가는 바가 떠올랐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살짝 눈물이 맺힐까 봐 이를 깨물고 싶었는데, 지척에 있는 그에게 모두 보여 버릴까 봐 얼른 울음을 삼켰다.
“나는 그대와 떨어지기 싫었다. 항상 손을 잡고 있었고 끌어안았고, 밤만 되면…… 더 깊이 그대와 나누고 싶은 욕심을 부렸다. 그리고 그건…… 우할린 숲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선이 소파 옆에 세워 둔 자신의 검으로 향했다.
우할린 숲에서 차고 있던 검, 마물을 물리친 검…….
“나는 분명, 번화가에서는 하지도 않던 검을 우할린 숲에 들어가기 전 허리에 찼다. 이건 위험한 게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무엇도 될 수 있었다. 이 소음이 제국을 위해 울린다, 라고 하지만 결국은 위험 요소들이 표시가 되게 마련인데, 나는 위험을 감지하고도…… 숲을 돌아다니는 내내 그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제야 그가 그토록 힘겨워했던 이유에 한 걸음 다가간 것 같았다. 아, 카일러…… 이토록 올곧고 고지식하고, 또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내 손을 놓지 않은 게 귀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녀가 느끼기엔 그게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붙잡고 있었던 것은…….
“카일러, 아니에요. 그날 당신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내 손을 놓지 않았던 거예요.”
나는 항상 그의 보호 아래 있었다. 번화가였든 숲이었든, 공작저나 황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제나 날 보호해 줄 위치에 있었고, 언제나…… 나타나 주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예요. 검을 차지 않았다면 마물들을 해치우지도 못했겠죠. 만약 마물의 소리를 들었다고 쳐요, 제가 카일러의 바로 곁에 없었다면…… 지켜 줄 수 있었을까요?”
나는 듣고 나서 이렇게 벅차오르는데 그걸로 이렇게나 고민을 하고 있었다니…….
사샤는 알수록 더 멋있는 자신의 남자를 향해서 환하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