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꼭 얻으셔야 하나요? 저 돌아올 줄 모르는 마음을…….”
저 작은 아가씨가 카일러를 감당하고, 함께 헤쳐 나가게 될 것들이 많이 있어 보였다. 안쓰러운 마음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다가 리디안은 뒤통수를 맞아 버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자신의 눈빛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온화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던 눈빛이 차갑게 얼어 버렸다. 쓰다듬던 손도 거두어지고, 그는 낮게 쯧, 혀를 찼다.
“너는 널 보는 눈이나 잘 챙겨라.”
갑자기 태도가 변한 그의 반응에도 여려 보이는 여인은 끄떡도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자기도 답답하다는 듯 한숨까지 내쉬는 것이 아닌가.
“음, 쳐다도 안 보려 하는 걸 제가 어쩔까요. 우선 저를 좀 봐 주심 좋겠어요.”
툭 던지는 그 말로, 리디안이 무엇 때문에 기분이 상했는지, 그래서 그 기분 풀겠다고 던진 날카로운 말까지 모두 받아들이고 아우르는 그녀의 반응에 리디안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그를 빤히 올려다보던 그녀는 갑자기 뒤를 돌아 카일러가 어디 있는지를 확인하더니 자신에게 꾸벅 인사를 남기고 그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어색하게 대치하며 마차에 오를 준비를 하는 두 사람은 나란히 그에게 인사를 남기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래도 혼자 보내기는 싫었는지 자신이 타고 온 말은 두고 사샤를 챙겨 함께 마차에 오르는 카일러를 확인하고는 피식 바람 새는 소리로 웃은 리디안은 고개를 돌렸다. 응……?
카일러가 떠남과 동시에 사라지고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여자가 아까 그 자리게 서 있었다. 거리가 좀 있어서 흐릿했지만…… 어쩐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뭐, 카일러가 저러고 가는 게 내 잘못인가, 나를 그렇게 본들…….”
“꼭 얻으셔야 하나요? 저 돌아올 줄 모르는 마음을…….”
애초에…… 자신이 저 마음을 진심으로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숨기고자 했던 적은 없지만, 애초에 이 결혼이 성사되는 과정 안에 나와 그녀의 감정이 개입될 틈이 전혀 없었으니까 당연한 반응들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리디안은 꾸준히 그리고 끊임없이 마음이 그쪽으로 향하여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쪽으로 오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다른 곳을 보고 있어 돌아올 줄 모르는 마음이라는 걸 알아 버린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제 마음대로 되지 않고 그녀를 향하고 있는 제 마음처럼, 그녀의 마음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그 마음을 똑같이 겪고 있기 때문에…… 그 돌아올 생각 없는 마음마저도 품고 있을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이쪽을 보고 있는 것도 자신을 향한 시선이 아닐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리디안은 그냥 돌아서 버리고 말았다. 마차가 향한 방향, 본궁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 발을 옮겼다.
저 시선이 자신을 따라오길 바라는 마음을 안쓰러운 미소로 다독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어느 누구도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차 안은 조용했다. 본래도 조용했던 두 사람의 마차 안은…… 심지어 미묘한 기류를 타고 어색하고 또 어색해지기만 했다.
“저…… 잠은 잘 주무세요?”
사샤는 그래서 본인이 입을 열기로 했다. 함께 자는 것을 거부당했을지언정, 자신이 그에게서 받은 것은 하나도 변함없이 다 누리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보은의 마음만 남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이렇게 움직이게 하는 건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좋아하는 마음은 조금 쓸쓸하지만, 그의 곁에 새로운 사람이 올 때까지는 있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는 대답이 없었다. 또다시 덜컹이는 바퀴 소리와 말발굽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흘렀다.
“식사는 잘 챙기셨어요? 밥도 안 먹고 돌아다니시는 건 아니죠?”
일부러 목소리를 조금 높여 물었다. 말을 꺼내다 보니 제가 계속 그의 걱정을 하느라 잠도 설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카일러가 아래로 내리깔고만 있던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듯한 그 푸른 눈은 여전히 깊고 시렸지만 그럼에도 그 눈을 계속 바라보게 되었다.
이 남자가 저런 시리고 무시무시한 얼굴 뒤에 어떤 감성을 숨기고 있는지 알고 있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게 지금 제게 향하지 않는다고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자꾸 왜 딜런 님도 없이 그렇게 돌아다니시는 거예요. 이번에도 혼자 나가셨던 거죠? 뭐, 다 큰 성인이 혼자 다니는 게 큰일이겠냐마는…… 공작님은 하시는 일이 있다 보니까 혼자 다닌다고 생각하면 걱정된단 말이에요.”
한번 입이 열리자 사샤는 점점 자신의 페이스대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을 걸다 보면 그가 한마디라도 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나중에는 대답을 하든 화를 내든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혼자 다닌다고 한마디 하는 소리까지 듣자 카일러의 눈썹이 슬슬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아, 제 목소리가 이제야 좀 거슬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어떤 말이든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그의 얼굴 근육이 유쾌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자 심장이 살짝 저려 왔다.
“저랑 같은 마차 타셨으니까 같이 공작저로 돌아가시는 거죠? 일단 들어가면 밥부터 먹어요. 어째 얼굴도 좀 핼쑥해진 거 같은데, 알아요?”
“……그러는 그대는 어찌하여 얼굴이 그 모양……인 거냐.”
조금 떨려 오는 심장은 잠깐 외면하고 다시 타박하는 말을 꺼내는데 카일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 목소리 좀 듣고자 계속해서 말을 걸어 와 놓고는 막상 그가 입을 열자 사샤는 잠깐 얼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처음 꺼낸 말의 따스함에 코끝이 찡해져 버렸다.
참, 이럴 때 보면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던 거다, 나는. 그동안 어떻게 참고 자라왔을까. 아니면 잘 참고 있던 것을 이 남자가 겉으로 끌어내어 준 건 아닐까.
“왜겠어요. 네? 제가 왜 이렇게 엉망이 됐겠어요.”
차가운 말을 듣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사샤는 그동안의 울컥함을 담아서 아예 따지듯이 물어 버렸다.
그러자 카일러의 아무것도 없는 얼굴에 살짝 의문이 어렸다.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못 하고 그런 표정을 짓는다는 것에서 사샤는 툭 또 한 번 마음을 놓았다. 이번에는 눈가까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왜…… 그러는가. 팔이 아직 많이 아픈 건가? 붕대를 이미 풀었는데…… 아프면 붕대 계속 감고 있어야 한다. ……뼈가 붙는 데에는 사람마다 시간이 달라서…….”
중간중간 끊겨 가며 대답을 이어 가는 카일러를 사샤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그대로였다.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도 그렇고, 그걸 표현하는 것에 매우 어색해서 두고 보다 보면 인상과는 다르게 어벙벙하고 바보스러워 보일 정도인 것까지.
그대로였다. 그것이 오로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에게도 이렇게 다정했다.
“그러니까 돌아가면……! 사, 사샤…… 왜 우는 거지? 지금도 팔이 아픈 건가? 라크! 마차를 세워라!”
사샤는 그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코끝도 눈시울도 뜨거워져 볼 위로 축축하게 눈물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사샤는 마부를 불러 마차를 세우려는 카일러를 향해 몸을 던지듯이 다가가 안겼다. 마차가 덜컹거리는 틈으로 몸을 일으켜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마차에 제대로 앉지 않은 몸이 흔들림에 덜컹이자 카일러는 단단한 팔로 그녀의 몸을 붙들어 주었다. 당황하여 말도 못 꺼내고 안아 주지도 못했지만 그녀를 지탱하는 힘만큼은 믿음직스럽도록 단단했다.
“사샤, 괜찮은가? 마차에서는 이렇게 있으면 위험하고…….”
카일러는 그녀를 제게서 떼어 내 자리에 앉히려고 하다가 사샤가 팔에 더욱 힘을 주자 말을 멈춰 버렸다.
자신을 걱정하는 저 목소리가 너무너무 듣고 싶었었기 때문에 그동안의 마음 졸였던 것들을 전부 쏟아 내고 그를 끌어안았다.
냉랭해도 좋다 했던 것도, 날 옆에 둬 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어쩌고 했던 것들 전부 다 다 거짓말이었다.
이렇게 그를 놓지 않을 듯이 붙들고 울고 있는 걸 보면…… 나는 다시 쓸쓸하고 싶지 않았다는 걸, 나는 다시 외로워지고 싶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일러는 그녀를 다독여 주려고 어설프게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그녀를 아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사샤가 어, 어? 하는 사이에 그의 허벅지 위에 옆으로 앉도록 올려 두고는 허리를 살포시 감싸 안아 주었다.
안정적으로 그의 품에 안겼다는 안도감에 사샤는 그제야 눈물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왜…… 그렇게 우는 건가, 응? 그렇게 감싸고 있으면 팔이 아프진 않은 거냐.”
제 걱정뿐인 그이면서 왜 내게 그렇게 말했던 걸까, 정말……. 여러 복잡한 생각이 들어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를 모르겠다.
“잠깐만…… 잠깐만 이러고 있어 봐요.”
그동안 맘 졸였던 것까지 보상받고 싶은 마음에 잠깐 동안은 그를 붙들고 있고 싶었다. 이 팔을 놓으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공작님 때문에…… 불안해져 버렸잖아요. 붙들고 있지 않으면 날아가 버릴 것처럼, 돌아서 버릴 것처럼 느끼게 해 버렸잖아요.”
“사샤…….”
그의 단단한 몸의 감각과 따뜻한 온기가 점자 사샤의 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시간에야말로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가 놓는다고 해도 나는 쉽게 놓지 못하겠구나. 이 사람이 날 돌아선다고 해서 쉽게 놓을 수 있는 마음은…… 이미 지났구나. 입을 열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