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카일러’라는 호칭 때문에 반응한 것은 비단 사샤뿐이 아니었다. 미디에나는 공작님, 공작님, 하고 부르던 그녀의 입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의 이름에 미디에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그 이름을 부를 때, 그는 단 한 번도 눈길을 준 적이 없었다. 이 여자가 그렇게 부른다는 것은…… 그가 허락했다는 걸까. 이 여자가 아까처럼 ‘카일러’ 하는 소리를 내면…… 그는 그녀를 바라봐 줄까, 어떤 얼굴로…… 바라보는 걸까.
호기심을 가장한 해맑은 얼굴로, 예하라에게 들었던 마물에 대한 이야기에 카일러와 관련된 마물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하던 것도 잠시 잊을 만큼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요즘 그래서 바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잘 못 뵐 정도예요.”
먼저 정신을 차린 사샤는 태연한 척 말을 마무리했다.
질투에 눈멀어 잠시 감정적이 되었던 미디에나는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음식은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있고, 왜인지 모르게 안색이 좋지 않은 듯이 보였지만…… 그녀는 아파서 그저 방에서만 보냈다고 들었을 때 상상했던 것과 조금 달랐다.
유약하고 병약한 여자를 생각했었다. 이렇게 둘만 남게 되어 조금만 친근하게 굴면 금방 제게 기대듯이 마음을 열 줄 알았는데.
자신을 경계하는 것은 제가 그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인가? 사랑이 어쩌고 하더니…… 진짜인 거야? 둘이서 서로가……?
입술을 꾹 깨물고 대꾸를 하지 않는 미디에나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차리고 예하라가 슬쩍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폐하, 다음 디저트를 내올까요?”
조곤조곤 식사 이야기인 척 다가온 그녀는 미디에나를 깨우쳐 주었다. 그녀 덕분에 정신을 차린 미디에나는 큼큼 헛기침을 한 뒤에 건너편의 사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 몸은 안 아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황궁에 온 김에 의사 한번 보고 가겠나? 공작부인으로서 몸은 항상 잘 챙겨야지. 지금 얼굴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디저트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의 접시에 남아 있던 고기를 좀 더 잘라 입에 넣던 사샤는 몸 아픈 이야기에 손을 멈추더니 이쪽을 올려다본다.
이베른이든 이그노트든 수도에서 활발하게 사교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어서 자주 회자되지는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직도 수군대는 말들이 많았다.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하면 이베른 쪽도 이상하고, 카일러나 사샤 또한 완벽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디에나의 입장에선 어느 한쪽이 아니라 완벽하게 사샤에게 문제가 있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싶었기 때문에 엘리나의 말에 걸고 싶었던 것인데…….
그녀는 무슨 일인지 초대의 편지를 보내도 황궁에 제대로 못 들르고 있었다. 심지어는 이베른 후작마저 최근 궁에서 볼 수 없었다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배려는 감사합니다. 특별히 아픈 곳이 있어서는 아니니…… 식사를 마치고, 중요하게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저는 공작저로 돌아가 봐도 될까요? 잠을 푹 자면 금방 괜찮아질 것입니다.”
다른 영애나 귀족 부인이었다면 황후가 걱정해 주었다며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눈앞의 여자는 그런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 자리가 피곤하다는 것만 겨우 감춘 얼굴로 달그락, 포크를 내려놓았을 뿐이다.
“마물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은데, 얻을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어서 불렀던 것이다. 충분하진 않지만 나름 도움이 된 것 같군.”
미디에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온화한 황후인 양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사샤는 귀찮음도 겨우 숨긴 얼굴로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어째 사람을 앞에 두고 대수롭지 않게 대해 버리는 것으로,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게 마치, 마치…… 카일러를 생각나게 했다.
“몸도 안 좋아 보이니 식사 마치면 돌아가도록.”
“예.”
어딘지 미묘하게 예법과 안 맞는 움직임도 희한하게 신경 쓰이는 여자였다.
디저트까지 식사의 순서가 전부 끝나자 미디에나는 슬쩍 미련이 남는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반해 벌써부터 일어나고 싶었다는 듯이 사샤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저런, 내가 오늘 몸도 좋지 않은 부인을 이곳까지 오게 했으니, 내가 배웅을 해 주겠네.”
미디에나는 또 제멋대로 그녀를 지나쳐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꽤 급한 발걸음으로 인해 사샤는 뭐 더 붙잡고 할 겨를도 없이 그 뒤를 따라야 했다.
실랑이를 벌일 힘도 없어서 그렇게 함께 걸어가 유리 온실을 나섰다. 황후전의 후문도 아니고, 황제가 있을 본궁으로 이어진 정문도 아닌 옆길로 나가는 듯했다.
뭐 길은 어디로든 이어질 테고 이대로 데려다가 어디 구덩이에 던져 버릴 거 아니라면 괜찮겠지 하는 태평한 생각으로 걷고 있을 때였다.
벽인 듯 이어지던 나무가 끝이 보이고 앞에 가로지르는 길이 나타남과 동시에 미디에나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녀의 기척을 따르며 주변을 바라보고 있던 사샤는 그걸 느끼자마자 바로 발을 멈추었다.
“자, 이 앞으로 나가면 그대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서 돌아가 쉬도록 해.”
“예, 폐하. 그럼 저는 이만.”
사샤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리를 숙여 보이곤 터벅터벅 앞을 향해 걸었다. 가로지르는 길 옆으로 정말 자신이 타고 온 마차가 빼꼼히 보이기 시작했다.
어서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이 정도면 긴장도 좀 풀렸겠다 가는 길에 마차에서도 좀 잘 수 있지 않을까.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로 걸어가 마차를 지척에 둔 순간.
“사샤……?”
그 마차가 서 있는 반대편의 길로부터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돌아갔다.
카일러…….
마차가 서 있는 곳의 반대편 길에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그녀를 먼저 발견한 것은 의외로 카일러였다. 어제 아침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던 그를 여기에서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 있는 것은 저보다야 그가 훨씬 더 자연스럽겠지만.
그리고 카일러와 나란히 걸어오던 황제, 리디안은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고개를 슥 돌려 사샤가 걸어왔을 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로를 마주 바라보는 카일러와 사샤를 불타는 눈동자로 쳐다보고 있는 미디에나는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그렇게 노려봐 봐야…… 카일러는 그쪽 쳐다볼 일도 없을 텐데.’
안쓰러울 지경인 그녀의 분노에 입꼬리를 올리는 리디안을, 사샤가 묵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카일러가 자신을 부르더니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녀를 지나쳐 마차 쪽으로 걸어가 버린 것이다. 말도 걸지 않은 그와 시선을 놓친 그녀의 눈이 뒤따라오던 리디안을 발견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저 뒤로 향해 있었다. 똘끼 가득하고 발랄하던 눈이 아닌…… 아련한 눈빛을 한 그를 발견했다.
“폐하.”
그는 심지어 사샤가 부르는 소리도 바로 듣지 못했다. 뒤로 고정된 그 눈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사샤가 지척까지 다가온 리디안에게로 손을 뻗어 그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그 터치에 흠칫한 리디안의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얼굴빛은 초췌한 주제에 반짝이는 눈동자가 신비롭고 예쁜…… 사샤였다. 흔한 다갈색인데, 이상하게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 눈이 예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사샤로군.”
카일러가 처음 이 여자를 데려온 것은 온전히 자신의 귀 때문이었을지언정, 이젠 이 여자를 위해 귀를 닫았던 한때를 후회할 만큼 온 마음을 다하고 있는 여자였다.
결혼식 때 이 여자를 처음 보고 뭔가 미묘하게 다르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이런 식의 의외의 상황을 만들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일을 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래, 그대로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들은 그녀의 지금 상태가 왜 이렇게 안 좋아 보이는지 알 것 같아서 리디안은 안쓰러운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러고는 마음이 가는 대로 손을 움직여 어깨춤까지 올라와 있는 그녀의 정수리에 손을 턱 올렸다.
“폐, 폐하……?”
커다란 손이 갑자기 머리 위에 얹히더니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하자 영문을 모르고 올려다보았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손길에 사샤는 까딱 꺾일 것 같은 목을 겨우 가누며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저 길 끝에 아직 미디에나가 서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엇을 신경 쓰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그녀를 한번 바라보게 되었다.
손은 계속 움직이고 있지만 그는 아직도 아무 말이 없었다. 황제에게 관두라고 하기도 뭐하고…… 이번엔 힘겹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황제가 씨익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미묘한 쓸쓸함을 담은 눈을 하고.
“꼭 얻으셔야 하나요? 저 돌아올 줄 모르는 마음을…….”
리디안이 아까 자신을 보고 바로 저 뒤에 서 있을 사람을 눈치챈 것부터가 신기했다. 저 빠른 판단이 항상 그녀를 향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리고 카일러를 스치고, 인사할 타이밍을 찾으려 잠깐 동안 바라본 황제의 눈에서…… 그것을 느꼈다. 아련함…… 사람을 향하는 그 쓸쓸하고 아련한 그 느낌을.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지만 그런 말이 절로 나왔다. 우리야 서로를 향했던 적이 있으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라 하지만, 한 번도 제게 향한 적 없었던 마음을…… 바라보는 것은 힘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물어보게 되었다. 무례함이고 뭐고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엇갈리고 있는 사람과 사람…… 같은 느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