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황궁 나들이는 별거 없었다.
엘리나도 없었고, 뭔가 자신을 깎아내릴 말이나 당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정말 그냥 나들이라도 온 듯 황후의 유리 온실로 초대받았고 그 아래에 마련된 호화로운 식탁 앞에 앉아서 그저 고요히 식사를 이었다.
사실 황궁으로 오는 마차 안에서 사샤는 한껏 긴장한 채였다. 일정하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는 분명 잠이 들겠지 조금은 기대했었지만 심장까지 저려올 정도로 긴장을 하고 있던 터라서 선잠만 자고 말았다.
피곤에 선잠까지 더해지자 신경이 곤두서 잠을 기대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렇게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버리자 막상 황궁 안으로 들어와 황후가 있는 곳으로 안내되면서는 차분해져 버렸다. 될 대로 되라? 뭘 하든 한번 해 봐라? 약간 이런 느낌이 되어 버렸다.
“우리 굳이 서로 소개할 사이 아니지? 처음도 아니고.”
황후는 매력적인 목소리로 그녀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거기에 사샤는 아무런 대꾸도 해 주지 않았다. 시녀장의 손짓을 따라 안내된 이 유리 온실에 들어와서도 눈 돌아가게 예쁜 주변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온전히 안내하는 시녀장의 뒤통수에만 향해 있었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식사가 시작되기까지 그녀는 다시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음식은 맛있었고, 얼핏 봐도 빛이라도 들어올라치면 반사하여 반짝이는 빛남마저 화려하게 바꿀 것 같았다.
식물을 가지고 이런 화려함을 꾸밀 수 있다니 거의 놀라울 지경이었지만 사샤에게는 그저 곁눈질 한 번에 끝날 배경이었다. 식기들도 모두 금빛으로 반짝였고, 심지어 중간중간 보석이 반짝이는 커트러리마저 있었다.
하지만 사샤에게 지금 반짝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툭.
“아…….”
그렇게 멍한 상태로 식사를 이어 가던 중 사샤는 기어이 고깃덩어리 한 조각을 가져가다가 드레스 위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심지어는 그렇게 드레스를 더럽히고 굴러 떨어지는 음식을 바라보며 사샤는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어머, 어쩜…… 괜찮나? 예하라? 이것 좀.”
“예.”
반대로 그녀에게서 눈도 못 떼고 식사 중이었던 미디에나는 바로 그에 반응해서는 그녀의 시녀장을 불렀다. 불안불안해 보이던 그녀에게 예하라도 준비되어 있었던 듯이 빠르게 다가와 드레스를 닦아 주고는 떨어진 음식을 치우며 괜찮으십니까,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건넸다.
“저런…… 혹시 공작저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아까 봤을 때부터 느꼈는데, 매우 피곤하달까, 혼이 쏙 빠져 있는 듯하군.”
미디에나가 이때다 싶어 말을 걸어 왔다.
그동안은 짧게나마 말을 잇는 게 좋을 듯해서 말을 꺼내 보았지만 그녀의 대꾸는 계속해서 영 시원치가 않았다.
“아…… 공작저에 별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공작께서 마물을 토벌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출타하고 안 계시는 것 외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아…… 마물……. 그렇구나. 소식으로 전해 들었네. 나는 메딜란에서 왔고 이곳에서도 그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어서…….”
“아, 네. 그러시군요.”
이쯤 되면 철벽을 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미디에나는 슬쩍 심호흡을 하면서 숨을 참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일부러 자신을 골리기 위해서 연기하고 있는 거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가 마물을 잡으러 다닌다는 것 때문에 그가 무섭고 두렵고 걱정이 계속 올라오고 그러는 것일까,
“그럼 이그노트 공작이 아주 고생이 많겠어. 이제야 알았지 뭐야. 제국에 나타나는 마물이 있어서 그걸 이그노트 공작이 해 주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미디에나는 슬슬 마물을 입에 올렸다. 그녀는 포크와 나이프를 든 양손을 테이블 위에 올린 채로 사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흥미에 살짝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힘없이 눈꺼풀을 아래로 내렸다.
“예.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마물을 물리치는 것은 얼마 전에 알았습니다. 힘이 넘쳐도 그걸 한꺼번에 전부 다 없앨 수는 없다고 하고요. 그래서 주기적으로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할 말이 생긴 것을 고마워해야 할지, 사샤는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로 성실히 대답했다. 대신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뚝 멈춰 버렸다.
그 눈치는 채지 못한 채로 미디에나가 살짝 그녀에게로 상체를 가까이 움직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빛이 났다.
“왜 전부 물리칠 수가 없는 것이지? 메딜란에서는 전혀 출몰하는 적이 없었던 것이라 내가 마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그래서 이야기를 부탁하는 것이니 이해를 좀 바라네.”
미디에나는 얼굴에 난감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르는 모든 긍정적인 것들이 다 사샤의 가슴으로 와서는 부정적인 것들로 스며들었다.
“저도 제대로 아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후작저에 있을 때는 줄곧 아파서 방 안에만 있었거든요.”
하지만 사샤가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의도치 않은 방향에 타격을 입어 버린 것 같았다. 미디에나는 거기에서 물러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단순한 호기심을 위장하는 것은 쉬우니까.
“아, 그렇지. 그렇기 때문에 더 얘기를 해 주지 않았으니까 그런 생각을 해 보았지. 그대는 제국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나만큼이나 많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사샤는 슬쩍 눈을 가늘게 떴다.
마물에 대해서 이제 와 궁금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그녀는 갑자기 기분이 확 상해 버렸다.
카일러를 직접 만나면 아무래도 주변의 눈길이 아주 매서울 것이다. 만나도록 허락해 주지도 않을뿐더러 애초에 카일러가 그녀의 이런 요청을 받아들여 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자기를 불러들인 게 아닐까?
아무래도 카일러에 대한 이야기들을 전해 듣기 위해서 자신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와, 생각만으로도 살짝 소름이 돋아 버렸다.
의심스럽고도 불쾌한 기분은 드러내지 않은 채로 사샤는 미디에나를 바라보았다. 참 아름다운 사람인데, 그 안에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가 없었다.
아니 사샤는…… 그녀가 카일러를 노리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좋게 말해 봐야 좋아하는 마음을 잊지 못하여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지, 그녀는 이미 결혼을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쁜 꼬리표가 붙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카일러의 부인, 이그노트의 공작부인으로서 이런 초대에 응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의 관계에서 아무리 황후가 위라고 해도 그녀가 그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한 내가 우위를 차지한다고 해서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지금 그녀와 나는, 그런 정도의 사이인 것이었다.
사샤는 확 나빠진 기분을 겨우 추슬렀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다 없앨 수 없을 만큼 생겨나고 있다고 하더군요.”
“어머나 세상에……. 그것 참 끔찍한 일이군. 그럴 정도라면 천하의 이그노트 공작이 씨를 말려 버리지 못한 채로 몇 년씩이나 없애는 것을 반복하는 이유가 됐어.”
그 정도였으면 마물에 대한 설명은 끝이 났어야 했다. 마물에 대해 자신에게 캐묻거나 하는 것도 그만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입을 열 준비를 했다. 얼굴이나 기색이 딱 그런 느낌이라 사샤는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방법을 찾은 것일까……? 마물을 토벌한다는 얘기가 들리던 것 같은데? 본래 할 수 있었는데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었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마물의 역사가 꽤 긴데 통제하는 거 외엔 없다고도 하더라고?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토벌 이야기가 나온 것일까? 방법이 있으시대?”
사샤는 깊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방향을 알 수 없는 대화였지만 숨길 필요도 없고 그녀가 안다고 해서 큰일 날 내용도 아니었다. 그들도 이제야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공작님께서 토벌을 결정하신 계기는, 마물이 활동 반경을 갑자기 넓혔기 때문이라고 말씀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본래는 산맥 안에서 통제되던 그들이 우할린 숲까지 내려와 저와 공작님을 맞닥뜨린 거였습니다.”
사실 그게 다가 아닌 좀 더 감정적인 내용도 있었는데 자꾸 제대로 설명은 안 하고 바쁘게 오가고만 있으니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미디에나와는 살짝 의견이 달랐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가 이곳까지 와서 이야기하고 갔다는 것이 바로 그런 생각을 하게 했다.
그 위에 무언가 더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눈앞의 이 여자와 관련하여서 말이다.
“아, 그곳에서 부인이 다쳤던 건가요? 당시 상황이 너무 궁금해요 마음 불편하지 않다면 설명 좀 부탁해요.”
그녀가 열렬히 말하자 마치 그것이 제국의 위협을 미리 알고 싶어 하는 황후처럼 보였다. 진짜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때…… 공작님과 함께 숲을 거닐고 있었는데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숲인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공작님께서 저는 멀리 대피시키신 후에 싸워 마물 하나를 처치함과 동시에 다른 마물 하나가 제 코앞으로 떨어졌습니다.
공작님과 저의 거리가 꽤 멀어서 단번에 올 수 없었어요. ……다행히도 그 마물이 잠깐 동안 공격은 하지 않은 채로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는데, 그 틈에 재빨리 다가온 카일러가 구해 주었습니다.”
계속 ‘공작님’이라고 부르던 호칭이 툭 카일러로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표정 관리에는 성공을 했지만 가슴이 바늘로 찌르듯이 아파 왔다. 그를 부르는 이걸……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의 앞에서 직접 부르고 싶은데.
사샤는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제는 좀…… 그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