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파반, 파반!”
파반은 자신의 공간에서 일을 하고 있다가 저택을 둘러보기 위해 건물을 나서려던 차에 들려온 급박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저택 내에서는 마치 본인이 귀족인 양 우아함을 유지하는 로제가 다급하게 저를 부른 장본인이었다.
평소 보기 힘든 모습에 파반이 바로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어딜 돌아다니다 온 것인지 호흡이 흐트러진 채로 그의 바로 앞까지 달려왔다.
손에는 봉투와 펼친 종이를 든 채였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다급한 거요?”
파반은 가만히 서서 조용히 숨을 고르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봐 주었다. 가만히 서서 숨을 고른 로제는 파반에게 손에 든 편지 봉투를 무의식적으로 흔들며 입을 열었다.
“공작님…… 하아, 공작님 지금 저택에 안 계시던데, 언제 나가셨어요? 언제 돌아오신다는 말은 없으셨나요?”
예전에도 물론 친절히 자신의 행선지를 밝히는 주인은 아니었지만 요즘은 더더욱 신출귀몰했다. 새벽에 나가거나 새벽에 들어오거나, 저택에 있다가도 한낮에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는 했다.
역시나, 파반도 그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모르겠소. 어느 순간 보니 사라지고 안 계시더군.”
심지어 입구 쪽과 가장 가까이에 자신의 방이 있는 파반마저도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이를 어쩐다…….”
난감한 얼굴로 눈썹을 떨구는 로제의 손에는 여전히 편지 봉투가 들려 있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고 있는 것인가.”
슬쩍 걱정과 함께 답답해지려는 마음에 파반이 되물을 때였다.
“파반? 로제? 무슨 일 있어?”
뒤에서 그들의 여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반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는데 로제는 간신히 진정했던 긴장이 도진 듯이 편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사, 사샤 님…….”
로제도 천천히 몸을 돌려 사샤를 바라보았다. 오늘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그녀는 경직이 되어서는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인데 그래? 로제 얼굴이 완전 창백해.”
로제는 자신의 손에 든 편지를 슬쩍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이건 적어도 안주인에게는 보이지 않고 처리하고 싶은 것이었는데 하필이면 마주친 것이 그녀라니…….
사샤가 말을 건 2층 계단 한중간에서 내려와 제 앞으로 걸어오는 그 순간까지 로제는 계속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생각했다. 이것 이대로 보여 드릴까. 아니면 공작님이 어쨌든 오늘 내로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가지고 있다가 그분에게 보여 드려야 할까.
로제의 눈앞에까지 다가온 사샤는 최근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얼굴이 많아 안돼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 더더욱 고민이 됐다.
그녀의 다갈색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와 함께 로제의 심장도 툭 떨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로제가 미처 숨기지 못하고 구겨 들고 있는 편지로 향했기 때문이다.
“……공작님이라면 새벽같이 나가셨다. 검을 챙겨 나가신 걸로 봐서는…… 기사단과 함께 나가신 걸로 생각돼.”
아무도 몰랐던 것을, 그것도 새벽에 나갔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 걸 보아서는 아마 잠을 제대로 못 잔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사샤 님, 황궁에서 온 편지입니다.”
로제는 수많은 고민 끝에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최대한 펼쳐서 그녀에게로 내밀었다.
사샤는 의외라는 듯한 얼굴을 하고 로제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보고서 그녀가 자신을 난감하게 보는 이유를 대번에 파악했던 것인데.
그 편지를 잠시 내려다보던 사샤는 그것을 건네받았다. 그녀의 손에 구겨진 흔적이 남은 내용물을 펼쳐 잡고 안에 쓰일 글을 읽어 내려갔다.
“아아……. 그냥 나 오라는 얘기였구나. 뭐가 급하다고 오네 안 오네를 오늘 알려 달라는 거지?”
내용은 간단했다. 황후가 친히 내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빠른 시일 내에 황궁으로 방문했으면 한다는 것이었고, 방문할지 말지에 대한 답변을 편지를 받는 즉시 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편지를 전달한 황실의 심부름꾼이 저택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를 통해서 답신을 전달해 달라는 것이었다.
로제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사이에 사샤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걸음이 카일러의 집무실로 향한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 로제는 이미 그녀의 뒤를 쫓아 걸어가고 있었다.
이런 일에 주체적으로 나서 본 적도 없고, 특히나 황후를 상대한 적은 없었다.
이렇게 급하게 서신을 보낸 데다 방문 확답을 받으려고 한다니, 아무리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해 보려고 해도 나쁜 의미로밖에 생각이 흐르질 않아 그녀에게 바로 보일 수가 없었던 거였다.
그녀는 카일러의 집무실로 거칠 것 없이 들어갔다. 그러고도 차마 그의 자리에 침범하지는 않고, 책상의 반대편으로 가서 편지로 쓸 종이와 봉투를 찾았다.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로제는 그녀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채 저 안쪽으로 들어가 제일 위쪽 서랍을 가리켰다.
“찾으시는 거라면 여기 있을 겁니다.”
차마 직접 꺼내지는 못한 그녀 대신 사샤가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는 그녀가 찾던 것이 있었다.
별다른 장식 없는 베이지색의 종이와 봉투를 꺼내 든 사샤는 빠르지는 않지만 척척 깃펜 하나를 챙겨 들고 어색하지 않게 펜촉에 잉크를 먹였다. 그가 일할 때 곁에서 지켜보던 것들이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정말 다행인 것 중 하나는,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통했듯이 이곳의 언어를 읽고 쓸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망설일 것도 없이 편지에다가 곧 부르신 것에 응하겠다고 했다. 당장 내일이라도 방문 가능하다고 말이다.
미룰 이유가 없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빨리 해치우는 것이 낫겠다.
거칠 것 없이 쭉 써 내려간 답신은 아주 약간 잉크가 마를 시간이 필요했다. 그사이 펜과 잉크를 정리해 책상은 원래대로 돌려놓고, 편지봉투 하나만 남긴 채 나머지도 서랍에 다시 넣어 두었다.
“사샤 님, 그게 꼭 가셔야 할…….”
“가야 하는 일이니까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사샤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꾸하면서 로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마른침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가셔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달하는 것에 망설였던 것이다. 공작님이 계셨으면 바로 그분에게 전달을 하고 상의를 하고 그분의 결정에 따랐을 텐데, 만약 이게 가기에 껄끄러운 일이다 하면, 그분에게 처리를 맡기고 자신은 손을 떼는 게 맞았다.
황실에서 온 걸 거절할 수 있는 것은 그분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녀의 강단에 로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차분한 움직임으로 보아선 흥분했다거나 패기, 혹은 객기로 이렇고 있는 건 아닐 터였다.
“아, 다 말랐다. 가 봐야 날 뭐 어떻게 하겠어? 지난번처럼 차나 좀 찌끄리고 말로 좀 어떻게 해 보려고 혈안이 되어 있겠지. 귀찮긴 하지만, 피해가 올 거 같다면 굳이 문제는 만들지 말자.”
그녀는 지금 피곤한 일과 함께 신경이 곤두서 있기 때문인지 차분함 속에 단어들을 보면 굉장히 공격적이었다.
그걸 눈치챈 로제가 그녀의 손에서 편지를 가져와 고이 접어 편지 봉투에 넣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샤 님, 요즘 공작님도 조금 가라앉으신 것 같은데 다시 밤에 공작님의 방에 가셔서 주무시는 것은 어떠세요? 요즘 사샤 님 잠을 통 못 주무시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는 아무래도 한껏 예민해지고 거칠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곁에 있다가 혹시라도 다치게 될까 싶은 생각에 공작님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그녀를 말릴 수밖에 없었다.
로제에겐 아무래도 어렸을 적 자신의 귀를 괴롭히는 소리들에 주체를 못하고 방 안의 모든 물건들을 집어던져 부숴 버렸을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마저도 혼자 방 안에 있을 때만 했던 일이었고, 사람에게 물건을 던진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 소음을 능력으로 받아들여 제국을 위해 쓰겠다 스스로 다짐하고 난 뒤로는 그렇게 분노와 괴로움을 표출하는 일도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분을 모시면서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여직 어려웠던 것이다.
깊이 반성을 하고 또 반성했다. 그런 식으로 만류를 했으니 사샤도 지레짐작으로 그가 그러할 땐 움직이면 안 되고 가까이 가면 위험할 거라는 인식이 심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공작님이 거절하셨어.”
편지를 쓸 때만 해도 전혀 떨지 않던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제는 금방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두 눈을 깜빡깜빡 움직였다.
“아…… 예? 사샤 님, 무슨 말씀을…….”
사샤는 봉투를 밀봉하는 것까지 마친 봉투를 로제에게로 건넸다. 혼란이 온 그녀는 봉투는 눈치채지도 못한 채 그녀를 계속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공작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언제 들어오셨는지도 모르고 밤까지 기다리다 방으로 찾아갔는데…… 평소처럼 침대에 들어가서 같이 자려고 했는데…… 됐대. 괜찮대, 피곤할 텐데 가서 편히 자래…….”
“사샤 님…….”
살짝 멍한 눈, 허공을 떠도는 듯한 목소리, 마치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해 약간 멍한 상태인 것 같은 그녀를 불렀다. 이름이나마 부르지 않으면 흐릿해져 사라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방금까지의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애써 숨기고 있던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계속 못 가고 있어. 잠들면…… 잠결에 갈까 봐. 자중하고 있어.”
그가 피하려는 걸 굳이 제가 나서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밤이 되면 그의 방으로 가고 싶어서 참았고, 어쩌다가 보면 저도 모르게 그의 방으로 가려고 할까 싶어서 참고 참고 또 참아 내고 있었다.
버석한 입 안에 침이 고이지 않아 마른침을 삼키며 사샤는 눈을 감았다. 아주 잠깐 깊은 잠이 들 뻔했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