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미디에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아랫입술을 이로 꾹 물었다. 턱에 잔뜩 힘을 준 걸로도 모자라 맞잡은 두 손도 손등이 새하얘질 때까지 꾹 붙들었다.
그녀는 지금 알현장으로 향하는 문 앞에 서 있었다. 보통의 방문객이 들어오는 방의 정면에 난 커다란 문이 아닌 황좌의 뒤로 나 있는 작은 문 앞.
그곳에 은밀히 서 있는 그녀는 안에서 나누는 두 남자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그저…… 목소리를 들을 생각이었는데. 은근히 자신을 존중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리디안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심을 빠졌다는 것에서 그녀는 쉽게 알현장에 찾아온 손님을 알아챌 수 있었다.
더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유리 온실 대신 미디에나의 발걸음을 돌릴 정도로 중요한 사람. 미디에나는 대번에 이곳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달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리디안을 찾아온 것은 불안정한 목소리의 카일러였다. 그런 목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카일러는 언제나 누구에게다 냉랭하고 감정 한 자락 허락하지 않으며 무뚝뚝하게 바라보는 사람이었을 뿐인데.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어 좋아야 하는데, 그것이 하필…… 그 여자 때문이라고 한다.
사랑…… 사랑 같은 소리 하네. 그 여자를? 왜 그 여자를?
나는 본래 고유한 메딜란 공국의 피를 잇는 왕녀고, 제국에 흡수됐을지언정 그 고유함을 인정받고 있는 공작가의 영애였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일찍 카일러를 알았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것 같던 카일러의 옆자리가 채워지자 그동안은 그래도 나름 잘 숨기고 내리누르고 있던 마음이 폭발해 버렸다.
그냥 자신을 피하기 위해 아무나 데려다 놓은 것이 아니라니, 그 여자가…… 카일러의 ‘무엇’이라니.
미디에나는 그가 나가는 기척이 들리자 그대로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시녀장을 두고 돌아온 이곳을 벗어나 빠르게 유리 온실로 바쁘게 발을 옮겼다.
“그것은…… 세상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상대방을 지키기 위해 내 목숨도 기꺼이 갈아 넣는 것 말이다.”
그러나 성큼성큼 발을 옮기는 사이사이 리디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고 있었다.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은…….
아버지가 자신을 외면하고 갔어도, 리디안이 저를 존중하느라 약속을 미루는 걸 직접 말하러 왔다 갔어도…… 미디에나는 결국 이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와 관련된 일이 돼 버리면 결국 자신의 마음을 주체할 수 가 없게 돼 버리는 것이다.
“폐, 폐하. 어디를 그렇게 다녀오시는지…….”
“흐……읍, 식사, 하자.”
빠르게 걸어오느라 가빠진 숨을 들키지 않으려 호흡을 억누르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직 회랑에서 서성대고 있던 시녀장을 지나쳐 걸으며 미디에나의 서늘한 눈동자가 슬쩍 뒤쪽으로 향했다.
유리 온실에는 평소와 조금 다른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자신이 알현실로 가서 시간을 지체하고 있는 사이 시녀들이 와서 리디안의 몫을 치운 것이었다.
이곳에서 밥을 먹는 것을 황제가 요청해 황후로서 할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미디에나는 그 식탁을 보고 아주 잠깐 발을 멈추었다.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리게 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속이 메슥거리는 건가. 손을 가슴께에 올려 꾹 눌러 보지만 그런 것과도 좀 다른 것 같았다.
“속이 안 좋으신가요?”
뒤따라오던 시녀장이 재빠르게 물어 오는 바람에 미디에나는 얼슨 가슴에서 손을 떼었다. 새침하게 아니야, 하고 대답한 그녀는 얼른 제 자리로 가서 앉았다.
“오늘은 황제 폐하께서 안 계셔서 식사 시간이 너무 조용하네요.”
홀로 식사를 시작한 미디에나의 곁에서 가만히 시중을 들고 있던 시녀장은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만 간간이 울리는 온실이 너무 휑하게 느껴지는지 멋쩍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하지만 잠깐 울렸다 사라져 버리고 만 목소리 때문에, 온실의 고요가 더 확 체감이 되었다.
정작 미디에나는 아까의 울렁임도 그런 분위기도 잊은 채 자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까 알현실 입구에서 들었던 것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그 말들을 걷어 내고 침착하게 다시 복기를 해 보자면…… 그들의 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마물이었다.
마물이 그에게 문제를 일으켰던 것인가. 이번에 마물이 그 여자를 공격했던 일로 그가 엄청난 충격을 받고 있다는 얘기로 이해했는데…….
“마물…….”
“예? 마물이요?”
물을 따르기 위해 주전자를 들고 걸어오던 그녀가 미디에나의 중얼거림을 듣고 다시 물었다.
메딜란에서는 마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디에나도 잘 들어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황궁에 와서도 대신들이나 리디안을 통해 들어 본 적 없었기 때문에 신경 쓸 일이 아니었는데…….
“제국에는 마물의 공격이 있어? 메딜란에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던 일이었는데…….”
이 시녀장은 제가 이곳 황궁으로 왔을 때부터 곁에서 그녀의 편의를 봐 준 여인이었다. 중년의 나이이고 오랫동안 황궁에서 일했다는 그녀는 마물에 대해 알고 있을까.
이전에는 황후를 모셨다는 그녀는 확실히 여주인에게 맞춤인 듯 눈치가 좋았다.
“제국에서도 대부분은 마물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사는데, 그 이유는 바로, 바로…….”
그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줄줄이 읊기 시작하던 그녀의 말에 제동이 걸렸다.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던 미디에나가 슬쩍 든 두 눈과 마주치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그노트 공작가의 기사단이 주기적으로 산맥으로 가 마물을 처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일정 기간이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지만 간혹 가다 나가시곤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예하라가 왜 멈칫했는지는 이어지는 말의 처음 나온 이름 때문이었다.
이그노트 공작가의 기사단이 나간다면 카일러가 빠질 리가 없겠지. 그런데 그동안은 그저 주기적으로 나가던 걸 갑자기 토벌하겠다 선언했다고, 그 여자가…… 공격당했다는 이유로.
“마물을 왜 주기적으로 가서 처리하는 거지? 그렇게 위험한 거면…… 한 번에 없애 버리면 되잖아.”
미디에나는 고기를 아주 잘게 썰어 꼭꼭 씹어 먹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말을 이었다. 마물과 카일러가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왠지 지금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마물은 예로부터 ‘생성’된다고 말해 왔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정확하게 설명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의 유래가 일반적인 번식으로 그 산맥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산맥 어딘가에서 생기고 있다고 전해진다 했습니다.”
“태어나는 게 아니라…… 생기는 거라고?”
말만 들어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식으로 인해 태어나는 것이라면 지금 있는 개체만 쌀 쓸어버리면 그만일 일이었다.
카일러가 마물을 없앨 힘이 생긴 최초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직까지 그 개체를 모두 죽이지 못한 채 지지부진하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예. 그래서 마물을 아주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고, 간혹 이렇게 이그노트 공작님이 나서서 마물의 개체 수를 확 줄이고 온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예하라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디테일한 설명에, 그리고 들을수록 석연치 않은 마물이라는 존재에 호기심이 생겼다.
“아주 없애는 게 불가능하다……. 그런데 마물은 산맥에만 살아? 산맥 바로 근처에 이베른 후작 영지와 이그노트 공작 영지가 있는 걸로 아는데?”
예하라는 잔에 물을 채운 뒤 그녀의 접시에 비어 버린 소스를 덜어 주며 질문에 이어 대답했다.
“마물이 나타난 역사가 오래된 만큼 그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의미로 시작된 게라넬이라는 집단이 있습니다. 마물 사용자라고 불릴 정도로 마물을 잘 다루는 곳이에요. 지금은 약간 용병 같은 집단이 되었지만요.”
“게라넬……?”
이건 또 새로운 정보였다. 좋은 의미로 시작되었다는 말을 굳이 덧붙였다는 건, 지금은 좋지 않은 집단이라는 이야기고, 뒤에 또 덧붙인 ‘용병’이라는 말에 대충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본인들의 돈벌이로 마물을 이용하는 이들이긴 하지만, 마물들이 산맥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하는 역할도 하고 있어서 이들을 용인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하라는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술술 대답을 하고는 있지만 점점 뭔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 같았다.
미디에나는 기본적으로 정치나 제국의 상황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데르마 제국에서 황후의 위치는 황우 개개인에 따라 혹은 황제의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그에 대해 평가하는 눈들은 어디에나 있었지만, 정치에 참여하고 싶은 황후는 적극적으로 참여를 했고, 하지 않을 황후는 그저 후계 생산에만 관심 있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황후의 소임이 맞기에 평가를 할 때 어느 쪽을 더 높다 하고 비교를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지금처럼 정치에도 관심이 없고 그렇다고 후계자를 생산할 마음도 없는 그녀에게는 벌써부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황제를 두고 공작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암암리에 퍼져 너무도 공공연한 일이 되다 보니 여론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게라넬의 수장이 누구지?”
“……그것은 아마 황제 폐하께서도 모르실 겁니다.”
심지어는 이렇게 위험한 질문까지 하는 그녀가 예하라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황제마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어째선지 두 눈을 반짝였다.
오, 제발……. 예하라의 오랜 황궁 생활, 그리고 전 황후의 시녀 생활에서 쌓아 온 감이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주인이 지금 뭔가를 하려고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