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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73화 (73/128)

73화

우선 리디안은 묵묵히 카일러를 바라보았다. 이제 막 입을 뗀 카일러는 나직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시 내뱉고는 리디안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녀에게 닿아 있으면 제 귀를 괴롭히는 것들이 말끔하게 사라집니다. 그래서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호오…….”

그의 설명은 길지 않았지만 그 적은 정보로 리디안은 머릿속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카일러는 그 많고 많은 영애 중, 심지어 세간에 알려진 아름다운 이베른의 영애 대신에 후작이 숨겨서 키워 온 영애를 선택해 세상에 드러내게 했다.

사실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면서도 한 번쯤은 궁금해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데려와야 할 메리트가 있는 여인인지 말이다.

결혼할 때까지는 그게 매우 궁금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가 자신의 부인을 말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이 보였다. 그것은 아무리 봐도…… 애정이었다.

사랑하면 뭐 다른 이유가 필요가 없는 거지. 그리고 그가 그런 여인을 만났다는 것에 신기했었다.

그런데 그 뒤에 이런 이유가…… 숨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래, 애정하는 이가 귀까지 도와주다니…… 아주 좋은 배필인 셈이로군.”

그런데 뭔가 조금 이상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아주 좋은 결말인 셈이었다. 귀를 괴롭히는 소리들을 차단해 주는 이와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에까지 빠지다니, 이보다 더 성공적일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이야기를 고백하는 카일러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이 이상했다. 입술을 꾹 깨물던 카일러가 바로 이를 뗐다. 어제 깨물었던 아랫입술이 터져 비릿한 맛이 입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녀와 함께 숲으로 들어갈 때…… 저는 안 차고 있던 검을 허리에 차고 들어갔습니다. 그래 놓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다시 그날을 떠올리며 가슴을 뜨겁게 타고 흐르는 분노 비슷한 것을 꾸욱 내리눌렀다. 눈언저리가 경련하는 것을 참고 자신을 면밀히 관찰하는 리디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제가 말한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서늘해진 카일러의 목소리에 리디안은 괜히 첨언하려 들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그는 곧 억눌린 목소리를 내어 대답을 내주었다.

“숲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하고 검을 차고 들어갔으면서, 위험을 감지할 방법인 귀를 완전히 차단시켰다는 겁니다.”

주로 제국의 위험을 감지하는 그의 귀가 자주 감지하는 것은 반란과 재해, 그리고 마물이었다. 그런데 내 귀가 편하자고…… 그저 그 손을 붙들고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그녀가 위험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제가 그 손만 잡고 있지 않았어도…… 마물이 가까이에 있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다치지도 않았을 거고…….”

깊은 숨이 절로 떨어져 내렸다. 마물과 대치 중이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릴수록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리디안은 말을 할수록 혼돈에 빠지는 듯한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쓰러운 한편…… 흥미롭다는 생각이 좀 들었다. 대체 그녀는 그에게 어떤 여인이 되었기에 무뚝뚝하고 자기만 들여다보는 카일러를 이렇게나 뒤흔들어 놓은 것인가 싶은 것이다.

“그곳이 산맥이었다면…… 그대 말마따나 자기밖에 모르는 천하의 몹쓸 놈이지. 하지만 그대들이 간 곳은 우할린 숲이 아닌가. 얘기 들어 보니 그곳이 데이트 명소라던데.”

리디안은 심각한 카일러를 향해 슬쩍 미소를 던졌다. 비록 지금 그는 자신의 생각에 꽉 막혀 꽉 묶어 버린 마음을 간단하게 풀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그럼에도 리디안은 여유를 부려 보았다.

역시 카일러의 굳은 얼굴을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힘들어도 이걸로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다짐을 해 놓고, 그걸로…… 부모님께도 사죄를 드려야지, 하고 생각을 해 놓고, 그녀가 주는 포근함에 빠져 게으르고 나태해져 버렸습니다. 심지어 가장 지키고 싶은 그녀를 두고도 나태를 버리지 못해서…….”

게다가 상태가 생가가보다 심각해 보였다.

이렇게 자신을 탓하면서 삽질을 할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날의 그 기억이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리디안은 얼굴에 띄웠던 여유로운 웃음을 지웠다. 그러고는 카일러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를 내었다.

“지금도 충분히 그대는 사람들을 잘 지키고 있다. 그때 귀로는 듣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녀를 구해 내지 않았나. 귀가 아무리 들려 봐야 거기에 반응하지 못하고 힘에서 밀리면 끝났을 일인 거야. 너는 부인을 아주 훌륭하게 지켰다.”

카일러는 후-계속해서 호흡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제게 벌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중 가장 강한 통증을 이겨 내고 있습니다만, 그녀에게 닿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리디안은 드디어 그가 초췌한 얼굴을 하고 나타난 이유를 알게 됐다. 그저 닿는다고만 표현했지만 부부가 되어서, 심지어 서로 마음을 나눈 상태의 남녀가 손만 잡았을 리가 만무했다.

심지어 이게 서로의 합의하에 이루어졌을 리도 없고. 카일러가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멍청하긴, 그녀를 지켜 주겠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혼자서 고생하고 할 만큼 다 생각하고 난 뒤에 스스로 길을 찾아 다시 돌아오는 거라면 얼마든지 헤매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 되는 것이니까 감당을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쌍방이다. 닥 봐도…… 카일러 혼자 빠져서 이렇게 허우적대는 것은 아닐 거라는 짐작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하는 게 과연 그녀에게 좋은 일일까? 그게 정말로 그녀를 위하는 일일 것인가에 대해 두 사람 다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또 다른…… 상처…….”

카일러는 다시 한번 어젯밤 방에서 돌아서던 그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네 성격에 분명이 이 이야기 나한테 처음 하는 것이었을 텐데, 그렇게 숲에서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손을 잡던 이가 아예 피해 다닌다고 하면…… 그대 생각에는 어떨 것 같은가.”

카일러는 점점 호흡을 가라앉혔다. 그를 알고서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 주는 것은 리디안의 특기이자, 어린 친우, 선우의 성격까지 다 보이는 아이들이야.

카일러는 입술을 꾹 물었다. 그리고 리디안은 그의 반응이 자신의 생각과 충돌하는 의견을 깊이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튼, 토벌은 변화 없습니다. 이대로 진행할 겁니다.”

그런데 잘 풀어져 나가려던 것 같은 분위기에 제동이 걸렸다. 무언가 응어리는 살짝 녹은 것 같은데…… 그 깊은 근간이 너무 무겁고 묵직해서 함부로 건드릴 수다 없을 것 같았다.

“마법사의 탑에서 기별이 온다면 그게 어떤 이야기든 제게 제일 먼저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그는 속으로 파고들려는 미련한 자책까지는 버린 듯했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 정도는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겨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걱정이신지…… 압니다. 저도 지금 제 안에 스스로 갇히지 않게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노력…… 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그것부터가 문제겠군. 어쩌다 이 남자는 제국 최강의 칭호와 동시에 이런 연약한 약점을 가지게 되었을까.

너무 멋지게 만들어 놓고 보니 외모가 너무 완벽해서 어쩔 수 없는 결함이라도 만들어 줘야 하겠다고 신이 질투를 한 것일까.

“아니, 이대로는 아마 또 혼자 땅을 파고 들어앉아 밤새 고민 막 하고 있을 정도겠군.”

“……아직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정도 대화가 가능하다면, 오늘은 그걸로 되었다. 의외로 섬세했던 거다. 지금 당장 평소로 돌아올 수 없을 거였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일이기 때문에.

“그래, 거기까지 알게 되었다면 그걸로도 다행이다.”

리디안이 그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카일러는 고요히 그 시선을 받아들이며 집에 있을 그녀를 떠올렸다.

“우선은…… 가야겠군요.”

바로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우선 가장 먼저 챙겨야 할 이가 사샤임에도 불구하고 두렵고 무서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귀에 소음이 들린다는 것은 이야기했지만 아직 그녀와 닿아 있으면 그런 소음과 통증이 말끔하게 사라진다는 것은 이야기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그걸 말하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숲에 들어가면서도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꽉 잡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니까…….

그녀는 둔하지 않았다. 분명이 자신이 하는 말을 금방 알아들을 것이었다.

“용기가…… 나지 않는 모양이군.”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이 말하던 이가 아직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자 리디안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카일러는 다른 곳을 향해 있던 눈동자를 굴려 다시 근처에 나타났다.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는 아느냐, 카일러. 그대가 부인…… 사샤를 바라볼 때의 그 감정, 그녀를 지키고 싶어 하는 그것.”

문득 리디안은 그 부분을 정확하게 묻고 싶었다. 사실 더 나아가 그의 입으로 그걸 확인받기 위해서였다.

“감정…… 말입니까? 그것은 그냥 제 부인을 지키려는 마음입니다.”

쯧쯧, 저놈이 어렸을 때 선 공작 내외가 매우 금슬이 좋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 당시엔 몇 살을 더 보고 싶었는데, 여기서 대답이 나왔다.

“그것은…… 세상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상태방을 지키기 위해 내 목숨도 기꺼이 갈아 넣는 것 말이다. 뭐…… 목숨까지 갈아 넣어야 하나 싶기는 하지만.”

리디안은 약간의 온기가 섞인 미소를 카일러에게로 보내 주었다. 사랑…… 그 두 음절을 소리도 없이 입 모양으로 만들어 내는 그를 바라보다가 좀 더 진하게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신도 이제는 조금 그에게 미안해진 모양이었다. 단지 외모만 완벽했을 뿐 다른 것이 너무 힘든 삶이었다는 걸 이제야 이해해 주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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