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밤이 되었다.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같은 자리에 소리도 없이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운 채 앉아 있다 보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사샤는 소파에서 내려왔다. 이 시간쯤 되면 모두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큰 소리가 나면 몰라도.
사샤는 문을 열고 망설임도 없는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문 앞으로 서서 머뭇거림도 없이 똑똑, 문을 두드렸다.
안에선 대답이 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고 생각하고 그 문손잡이마저 바로 돌려 버렸다.
열기 전까지는 마치 철문과도 같이 느껴졌던 그 문은 너무나도 쉽게 열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간 사샤는 대번에 하루 종일 기다리던 이의 파란 눈동자와 맞닥뜨렸다.
기세 좋게 들어온 것은 순식간에 휘발되어 버리고 사샤는 그 자리에 멈춰 서 버리고 말았다.
“무슨 일인가.”
침대 헤드에 한껏 기대어 앉아 있는 카일러가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 목소리가 음산할 정도로 낮았지만 사샤도 이 하루 온종일 쌓아 온 것이 있었다. 눈에 힘을 빡, 손을 꼭 쥐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은요. 잠자러 왔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사샤는 그가 있는 침대로 가려고 하는데…… 한 발짝 내디디려는 그녀의 움직임을 본 카일러가 갑자기 눈썹을 확 일그러뜨린다.
왜…… 저렇게 화를 내지? 내가, 자기 말 무시하고 다가가려고 해서? 단지…… 그것 때문에?
당황을 감추고 한 발을 더 딛는데 그가 갑자기 침대에서 확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 테라스가 있는 커다란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푸른 달빛이 스며드는 창문 앞에서 그가 이쪽을 보고 서 있었다.
그 움직임이 마치…… 자신을 피해서 도망가는 것 같아서 사샤는 숨이 막혔다.
“방으로 돌아가서…… 편히 자라.”
충격으로 멈춰 선 그녀를 향해 카일러가 말했다. 다정한 말에 평소와 다름없는 낮은 목소리였지만, 말로만 배려하고 온몸으로 거부하는 거였다.
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사샤는 멍한 머리로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고 싶었던 말이 뭐였는지, 왜 그렇게까지 보려고 안달을 냈는지도 모른 채로 서 있었다.
“오늘은 안 들어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히려…… 지금 예민하실 때 옆에 누군가 있으면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로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녀는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카일러를 만나러 가는 걸 막으려고 했던 걸까.
사샤는 들썩이던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 나온 말로 돌이킬 수 없는 그런 상처가 될까 봐.
그가 던진 가서 편히 자라는 말이…… 제게 비수처럼 꽂혔듯이 그렇게 될까 봐.
사샤는 휙 뒤를 돌았다. 그리고 들어왔던 대로 문을 열고 다시 그 방을 나왔다. 기계처럼 발을 놀려 방으로 돌아가는데 술렁이던 가슴이 기어이 눈물을 토해 내고 말았다.
내내 고요하던 복도에 다급한 그녀의 발소리만 울렸다.
*
“아, 황후. 미안하게 되었어. 오늘 약속을 잡은 이가 있어서 점심은 미뤄야 할 것 같아.”
막 유리 온실로 향하던 미디에나는 황후궁에서 본궁으로 이어지는 회랑에서 리디안과 마주쳤다. 이쪽으로 나타나길 기다렸던 듯이 그를 그렇게 급히 말을 전하곤 그녀의 고개가 약간 끄덕여지는 것을 본 뒤 급히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냥 시종을 시켜 전달하셔도 될 것을……. 폐하는 항상 이렇게 직접 오시네요, 어쩜…….”
미디에나의 뒤에서 시녀장이 조심스럽게 감탄했다.
“가자, 점심은 유리 온실에 있을 거 아냐. 거기서 먹지.”
그녀는 그 말에 동요하지 않는 듯이 휙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유리 온실 쪽으로 걸으려던 미디에나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시녀장의 말이 아니어도 그가 미디에나에게는 매우 친절하게 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부러 이런 점심 약속도 잡아서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려고 하고, 약속은 항상 지키려고 했다.
그런 그가 이렇게 급하게, 직접 와서까지 약속을 깨고 가는 일이라면…….
“너는 유리 온실에 점심 다 차려 놔. 잠깐 들를 데가 있어. ……금방 갈게.”
미디에나는 다시 뒤돌아 본궁 쪽으로 향했다. 뒤에 남은 시녀장은 그 다급한 뒷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녀의 말대로 유리 온실로 향하기 위해 몸을 틀었다.
알현실에는 다시 리디안과 카일러가 마주 앉아 있었다. 리디안은 난처한 듯 눈썹을 휘었지만 카일러를 향해 어쩔 수 없는 미소를 지어 주었다.
“정말이지, 열정적인 카일러라니 적응이 안 되네.”
가벼운 말로 시작을 했으나 그는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오늘은 그의 불편한 심기를 통역해 줄 딜런이라는 기사도 없었다. 리디안은 그가 입을 열 때까지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멀쩡하지 않은 듯 보여도 괜찮습니다. 문제없이 할 겁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지금 그다지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다. 평소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날이 있었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뭔가에 시달린 듯한 얼굴. 그리고 그가 무엇에 시달리는지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오늘의 그는 더…… 초췌해 보였다. 오랫동안 그를 봐 온 리디안은 놓칠 수 없는 것이었다.
쯧쯧, 혀를 찬 리디안은 잠시 멍한 듯이 말을 멈춘 그에게 먼저 입을 열었다.
“뭐 벌써 보고를 바라고 온 거라면 살짝 자랑을 하고 싶군. 이미 마법사의 탑으로 서신을 보냈다. 마물 토벌에 진심이니 도와 달라 했어. 황제가 이렇게 나오면 저쪽에서도 답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폐하.”
리디안이 벌써 유의미한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는 것에 카일러는 복잡한 머리가 한층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일부러 혼자 이곳을 향했다. 마물 토벌에 관한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었다. 지금처럼 머리도 마음도 그리고 귀도 어지러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땐 확실히 리디안이 있는 것이 좋았다.
태평해 보이는 그는 일을 함에 있어서 미적대는 것을 싫어했다. 그렇기 때문에 카일러는 마물 토벌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제일 먼저 리디안에게 이 이야기를 전달하러 왔던 것이다.
“무슨 일인지 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썩 좋지 않군.”
그리고…… 그는 그의 상태를 말 안 해도 잘 알아주는 사람이자, 그런 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말로 꺼내 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렇게나 정신 놓고 서두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한데 말이야. 지금 초췌한 얼굴로 넋이 나가 있는 거랑 같은 이유인가?”
역시 다들 말을 해 주진 못했겠지만 몰골이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 보일 정도로 평소보다 더 상태가 안 좋은 듯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서 그럽니다.”
카일러 또한 그의 앞에서는 비밀이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읊을 수 있고, 원하는 것은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카일러는 지난밤 자신의 말에 상처 입고 돌아서는 사샤의 모습이 눈앞에서 떠나지가 않아 잠을 자지 못했다.
제 거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그 밤에 함께 있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녀를 품에 안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가 없기도 했다.
저 품에, 저 온기에 안주하려다가…… 정작 가장 중요한 그녀를 잃을 뻔했으니까.
그런데 편히 자라고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 온몸으로 굳어 버렸다. 그리고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어두운데도, 빛이라고는 창문으로 스미는 푸른 달빛뿐인데도…… 그게 카일러의 두 눈에 고스란히 박혀 들었다.
그녀가 숨을 멈춘 동안 카일러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대꾸조차 없이 뒤돌았고, 바로 문을 열고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복도에서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카일러는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켜야 할 사람이 공작부인인 것은 잘 알겠군.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숲에서의 일이 역시 마음에 걸렸던 겐가?”
생각에 잠겨 어두워지는 카일러의 푸른 눈을 보며 리디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그것 때문입니다.”
카일러도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공작부인과 함께 궁으로 들어와도 된다. 공작저는 산맥과도 가까우니까. 거기 있는 것이 걱정된다면…….”
“사샤는…… 가능한 한 저와 떨어져 있을 겁니다. 제가 산맥으로 나갈 것이니 괜찮을 겁니다.”
다정하게 부르는 이름인데 어쩐지 오늘따라 그 목소리가 그리 들떠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마물 때문에 다칠 뻔했던 부인과 떨어져 있겠다 말하는 그가 이상했다.
“마물 때문에 부인이 걱정이라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것이 맞지 않은가. 왜 떨어져 있을 거라는 거지? 산맥에 죽치고 있으려고?”
잘 알고 있는 부분에서는 이런 것이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리디안은 하나하나 따져 오면서 그에게서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일러는 대답 대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제껏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을 지금 여기에서 잠깐 드러내 볼까 했다. 너무 안으로만 가지고 있어 지금 제 마음을 곪게 만드는 것을.
들어 주는 이가 있다 해서 자신의 죄가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죄인이라는 걸 자신만 아는 것이 불편했던 것이다.
“사샤는…… 그녀와 가까이에서 닿아 있으면, 제 귀가…… 잠잠해집니다.”
그리고 약감의 침묵 뒤 차분한 목소리로 꺼내는 카일러의 말에 리디안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한 번도 듣지 못했지만 지금 그가 꺼내려는 말이 매우, 아주 많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대부분 잘 모르고 있지만, 데르마 제국의 황제 리디안은 매우 직감이 좋은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