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그럼, 오늘은 이대로 쉬시겠습니까?”
황궁에서 돌아온 이그노트 공작저의 정문에서 딜런은 인사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확인하듯이 물었다. 안으로 바로 들어가려던 카일러는 그런 그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쉬십시오, 하고 꾸벅 인사한 딜런이 돌아가고, 카일러는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바톤을 이어 받듯 딜런이 사라진 자리로 파반과 로제가 자연스럽게 다가와 섰다.
“돌아오셨습니까. 저택에는 별일 없었습니다.”
파반이 먼저 말했고,
“공작님, 식사 준비를 할까요?”
로제의 질문에 카일러가 고개를 저었다.
“목욕은 하시겠습니까?”
“밤에.”
다시 한번 이어진 로제의 질문에도 아주 간단한 대답만 남겼다.
파반과 로제는 간단한 인사와 식사와 목욕 여부만 확인을 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물러났다. 귀가 한창 예민할 때엔 그의 곁에서 길게 머무는 것은 되도록 피하고 있었으니까.
카일러는 그저 흐르듯이 저택 안으로 들어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홀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전날까지 소리를 지르고 방금 황제에게 패기 넘치게 마물 토벌을 건언하고 온 것과 다르게 에너지 공급원을 없애 버린 듯이 그렇게 힘없이 걸었다.
계단을 다 오른 카일러는 제일 먼저 보이는 문 앞에서 가만히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방문의 문손잡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친 그녀를 돌볼 때엔 다친 것이 낫는 것만 생각하느라고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온갖 싸움에 최전방에서 움직이는 그에게 팔에 금이 간 거는 큰일도 아니었다. 수없이 보고 본인도 그만큼 다친 일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의 상처는 그냥 보아 넘기기가 어려웠다. 들여다본다고 낫는 것도 아닌데 보고,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를 잘못을 다시 상기했고, 그리고 속이 뒤집히고 머리가 깨질 듯한 소음이 찾아왔다.
사샤는, 밤에 자신의 방에 찾아오지 않았다. 귀를 괴롭히는 날카로운 소음들이 너무 심해 고막과 머리에 통증까지 느껴졌던 그날 이후로.
최근 사샤가 곁에 있어서 꽤 많은 시간을 고요히 지내온 탓일까. 자신을 여지없이 괴롭혀 대는 이 소음이 견딜 수가 없었다. 얼마 전 그 일 때문에 잔뜩 분노에 차 있어 더 예민해진 걸지도…….
“마물 토벌이라니요, 지금 어째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하시려는 겁니까?”
“무모? 어차피 우리가 하는 일이 그것 아닌가! 미룰 게 뭐 있어, 싹 다 쓸어버릴 거다.”
“그게 안 되니까 이런 식으로 공작님 귀를 괴롭힐 때에만 처리하고 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안 돼? 안 되면 산맥을 싹 다 불태워 버려서라도 하겠다!”
감정조차 제대로 컨트롤이 되지 않아 그렇게 마물을 싹 다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를 질러 댔다. 딜런은 제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같이 소리를 지르며 그가 분노를 표출하게 하는 한편, 무모하게 뛰쳐나가는 걸 막아 주었다.
아프다고 신경질을 부리는 걸 오히려 주변의 사람들은 좋게 보았다. 혼자 파고드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보았기 때문에. 대신 그걸 상대해 줄 수 있는 것은 딜런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그녀를 보지 못했다.
소음으로 괴로워하는 제 모습을 아주 잠깐 들킨 적은 있었지만 이번은 너무나도 격렬하고 거친 모습을 보여 버렸다. 당시엔 그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머리가 아파 올 정도로 소음이 그를 공격하듯이 후려치고 있었고, 그 소음이 마물임이 분명했기 때문에 자꾸만 그날, 마물과 대치하고 있던 사샤의 모습이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까딱하면 구하지 못할 뻔했던…… 또 한 번 끔찍한 일을 목격할 뻔했던 그날이 그를 자꾸만 괴롭혔다.
이 소리를 가라앉혀 줄 그녀에게로 가고 싶었다가도…… 그날 그녀의 손을 놓지 못해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다는 죄책감에 결국 딜런과 늦은 시간까지 별 진전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바로 방으로 돌아왔다.
그때도 문을 붙들고 이렇게 고민했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소음으로 인한 고통보다…… 죄책감이 더 컸다. 그리고, 그녀 또한…… 방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망설이는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것마저도 마음을 다잡고 카일러는 방으로 들어갔다. 다른 이들은 아무도 그것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그를 탓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알아야 했다.
그녀의 위험을 자신이 자초했었다는 것을.
“마물……? 여, 여보!”
“어서 카일러를 데리고 숨어!”
기어이 잘 묻어 두었던 기억에까지 닿고 말았다. 그 공허한 외침이 기이하고 기분 나쁜 소음 위에 켜켜이 쌓였다.
어렸을 때와는 달랐다.
자신이 힘이 없어서, 그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도망치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당시엔 그게 매우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제가 없었다고 그분들이 살았을까, 나중에 그런 생각을 차분하게 해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에야 겨우 그 죄책감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로 인해 바깥으로 나오고, 이그노트 공작의 이름을 받아 근근이 살아오던 도중이었다. 자신이 쌓아 온 것,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들로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것 또한 그때 알게 됐다.
이 능력 아닌 능력도……. 그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사용하겠다고 다짐을 해 놓고.
카일러는 결국 사샤의 방 문손잡이에 닿은 시선을 거두었다. 제게 그녀를 허용한 것이 죄였다. 지키겠다고 해 놓고 가장 중요한 무기를 버린 죄였다.
카일러는 그렇게 발을 돌려 발소리는 물론 숨조차 죽인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기다란 복도는 사람이 지나간 흔적도 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언제 오나…….”
사샤는 방문 가까이 가져다 둔 소파 위에 앉아 바깥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오늘 아침부처 딜런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고 했다. 파반의 말에 의하면 아마 황궁으로 간 것 같다고 했다. 황제 폐하에게 이야기를 하러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했으니까.
사실 황궁까지 갔다면 아직 돌아올 수 없을 시간부터 소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바깥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문 앞에 서서 서성이고 있다간 하녀들이나 로제 혹은 파반의 눈에 띌 것 같아서였다. 그녀가 그렇게 정처 없이 기다리고 있는 걸 그들이 보게 된다면 안 그래도 그들의 주인을 걱정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람들에게 걱정을 더해 주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안에서 나는 소리에 그의 발소리가 묻힐까 사샤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소파에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앉아만 있었다.
소파 위로 올라온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맨들맨들한 피부 여기저기에 찍힌 자국과 굳은살이 보였다.
이곳에서는 향유라고 부르는 기름으로 피부를 관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게 꽤나 비싼 것이라는 것도. 로제는 특히나 그녀의 손과 발에 이 향유를 아낌없이 발라 주었다.
덕분에 어쩔 수 없는 상처는 남아 있었지만 나머지 피부는 본래의 하얀색이 되고 맨들맨들 부드러워졌다. 굳은살도 살짝 연해진 것 같았다.
이게 이 몸이 살아온 시간이었다. 사샤 안에 있는 나는 이곳에서의 삶만 영위해 왔기 때문에 잘 몰랐지만 손과 발을 보면 이전 삶의 흔적을 알려 주는 것 같았다.
“원래 나도 손발이 엉망이었는데.”
이전에도 어린 나이에도 할 수 있는 것들을 이거저거 하며, 손과 발이 그렇게 성하지 못했다. 사샤와 제 삶을 바로 옆에다 두고 누가 더 나았네 불행했네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따지자면 비슷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곳에서 새롭게 사는 삶은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한 이가 바로 카일러였다.
“얼른 와라아…….”
스스로 내는 목소리도 아주 조그맣게 속삭이며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움직임을 멈추고, 호흡까지 멈춘 채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사샤는 말이 짧게 우는 소리를 듣고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일러가 온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온 것일까. 사샤는 바깥으로 나갈까 어쩔까 고민하다가 얼른 창문으로 달려갔다.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 난간을 붙잡은 채 몸을 쭉 빼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몸을 바깥으로 빼 보려고 해도 정문은 저 모퉁이를 돌아야 하는 위치에 있어서 그의 모습이 보일 리 만무했다.
저택 그 모퉁이 쪽에서 지나가는 말 두 필과 그 사이에서 걷고 있는 듯한 남자의 다리가 보였다. 유유히 두 마리의 말을 끌고 가는 갈색 가죽 띠를 두른 부츠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하…… 역시 무리였나. 밖으로 나가 볼까.”
뚱해진 얼굴로 사샤는 터덜터덜 걸어 문 앞 소파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를 마주하기가…… 왠지 조금 그랬다. 또 혹시 로제가 그녀를 말리려고 할까 봐 그것도 신경 쓰였고.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는데, 그걸 고용인들이 보는 것이 좀 신경 쓰였다.
소심해져 버렸어.
로제의 만류로 그녀가 그의 방으로 가지 않았지만, 그 또한 찾지 않았다. 심지어 밤뿐 아니라 어젠 저택에 있었음에도, 그가 자신을 찾는단 말은 듣지 못했다.
그래서 그를 보려고 방을 나섰다가 황궁에 갔단 얘기를 듣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던 거였다. 얘기를 해야 했다. 무슨 말부터 꺼낼지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냥 봐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발소리가 들리지를 않았다. 계단을 올라와 카일러의 방으로 들어가려면 사샤의 방문 앞으로 지나가야만 하는데…… 발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소파로 올린 다리를 끌어안고 무릎에 이마를 댔다. 잠이 들 것 같은 자세임에도 소리에 곤두세운 신경 때문에 잠이 오지도 않았다.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조용히 흘렀다. 해가 기울어 깊게 들어온 해가 그녀의 발치까지 왔다가 어느 순간 어스름으로 변하고 어두워지기까지…… 그렇게 고요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