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그 성질을 제가 어제까지 다 받아 드렸습니다.”
딜런이 뒤에서 한마디를 거들자 리디안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하하, 소리 내러 웃어 버렸다.
“항상 딜런이 고생하지. 안 그런가. 짐을 살리는 게 딜런일지도 모르겠군.”
“과찬이십니다.”
앞뒤에서 자신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말하는데도 카일러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만 깜빡이며 앉아 있었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서서히 싸늘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리디안은 잠깐 잃어버릴 뻔했던 웃음을 입술 끝에 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마물이 공격을 했다는 말은 맞군.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설명은…… 하, 됐고. 마물 토벌할 겁니다.”
설명을 꺼내려던 카일러는 깊은 한숨과 함께 꿀꺽 삼키고는 또 냅다 질렀다.
딜런은 뒤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황제의 표정이 다시 한번 굳는 것이 보였다.
공작은 항상 냉정하고 무덤하고 그런 사람이었지만 귀를 괴롭히는 소음이 한계를 넘어가면 매우 날카로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샤가 나타난 이후로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에 그녀가 공격을 당하고 나자, 그간의 어떤 경우보다도 더욱더 날카로워지고 거의 히스테릭해지다시피 했다.
지금은 또 완전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그 때문에 살짝 혼란스러워하던 황제가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자신에게로 시선을 흘렸다. 이번엔 딜런의 입에서도 짙은 한숨이 흘렀다.
“공작부인과 함께 우할린 숲으로 나가셨었는데, 마물이 나타났습니다. 공작님께서 그걸 상대해서 숨통을 끊어 놓고 돌아서는데…… 다른 한 마리가 나타나 공작부인에게로 접근했다고 합니다.”
딜런도 이 이야기를 카일러에게서 전해 듣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그걸 말로 담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것 때문에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힘들어하면서 그에게 최대한 자세하게 상황을 딱 한 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리디안은 거기까지만 듣고도 미소를 거두고 의자 등받이에 한껏 기대고 있었던 등을 떼어 몸을 앞으로 숙였다. 지금까지 설명한 상황이 카일러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줄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거…… 힘들었겠군.”
딜런이 뒤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행히 공격하지 않고 관찰만 하던 사이에 달려간 공작님의 검에 찔려 몸부림치던 와중에 마물의 날개가 부인의 왼쪽 팔을 후려치며 몸이 날아가 버릴 정도가 된 것이었습니다. 왼쪽 팔에 금이 간 것이 마물 때문이었고 그 외에는 괜찮으십니다.”
딜런의 설명은 여기까지였다. 리디안은 그 이야기를 듣고 미간을 찌푸린 채 가만히 딜런과 카일러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지친 기색이 보인다 했더니만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거기까지 마물이 내려오는 일은 없지 않았나.”
리디안의 목소리가 한 톤 내려갔다. 장난스러운 미소 대신 날카로운 눈을 한 채 앞으로 기대 앉아 카일러를 보았다.
“마물은 산맥에서 나타나 산맥에서만 움직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게라넬이 통제하는 범위도 딱 거기까지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걸 벗어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날 하루 만의 일로, 다른 날에는 내려오지 않았지만…… 그날만의 일이라고 해도 문제인 겁니다.”
말을 할수록 살벌해지는 카일러의 뒤에서 딜런은 이번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만약 그게 요즘 생긴 현상이라면 그건 주변의 마을 사람들에게도, 더 나아가 제국민들 전체에게 위험한 일이 될 것이었고, 만약 그게 그날 하루 만의 일이라면 누군가 우할린 숲으로 나들이를 나간 공작 내외를 노린 것이니 그것 또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군……. 왜 대뜸 마물 토벌을 외쳤는지는 이해를 잘 했다.”
리디안은 심각해진 얼굴에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새로운 현상인 거라면 제국을 보호해야 하는 입장에서 대책을 내놔야 했고, 만약 이그노트 공작 내외를 노린 움직임이라면 카일러보다 제가 먼저 나서서 범인을 찾아야 할 판이었다.
정치적으로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하더라도 이 정도라면 황제가 분노하여 일어나야 할 부분이었다.
“그간은 그저 제 귀가 소란스럽지 않을 만큼, 눈앞에 나타난 것만 없애는 정도로만 처리하고 왔는데…… 더는 안 되겠습니다.”
카일러의 서슬 퍼런 눈은 곧장 리디안에게로 향했다. 저 남자가 저런 표정까지 하는 걸 보니 정말 화가 단단히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래서?”
하지만 그렇게 카일러가 툭 말로 내뱉고 말 정도로 마물 토벌이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카일러가 이제까지 괴롭힘을 당했던 것들 중에 마물들의 소음을 듣지 않도록 행했을 것이다. 어려운 일이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라 여겨지고 있었다. 마물은 분명 어딘가에서 생성되어 오는 것이었는데, 그것인 어느 다른 차원에서 끝도 없이 태어나는 것들이 차원의 틈을 타고 이곳으로 넘어오는 것인지, 아니면 어느 한 곳에 여왕벌 같은 것이 이쪽 세계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인지…… 아무도 알아내지를 못 했던 것이다.
“마물 토벌을 시작할 겁니다.”
“……그래.”
“지금 당장 산맥에 틀어박혀서 눈앞에 나타나는 마물을 보이는 대로 죽여 버리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닙니다.”
그래, 그 말은 맞다. 그럼 그가 말하는 마물 토벌은 무엇이고, 그걸 하려는데 왜 지금 자신의 앞에 와서 선언하듯이 없애 버리겠다 말하는 것인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단호한 카일러를 리디안은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완벽하게 소탕할 겁니다. 그러니…… 폐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가 하기 위한 말은 이것이었다.
카일러가 지금 저 의자네 앉아서 격렬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도 드문 일이었다. 아마 한두 번 정도 목소리 톤을 높인다거나 반나절 말을 안 하는 정도의 흔들림을 보일 정도였다.
리디안은 어린 마음에 그가 부모님을 잃을 때의 사고로 그가 정신을 내려놓은 상태라고 오해하기도 했었다.
본래도 과묵한 편이었는데, 그 뒤로 한동안 숨만 쉬는 인형 같았다.
“뭐, 허락을 구할 일이던가 그것이, 그냥 두면 제국민들을 공격하게 생겼는데 황제로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리디안은 반대로 털털하게 대답하며 뭐든 할 수 있다는 듯 여유롭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성격 탓인지 함께 일을 해결해 나감에 있어서는 꽤 맞는 찰떡궁합이었다.
심지어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없다시피 하는 황제다 보니까 가장 중요한 사람인 것이다.
“지금은 분하게도, 마물의 생성의 원인과 그것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카일러는 이를 악물며 말을 했다. 당장이라도 나가서 때려잡아야 속이 후련할 텐데 그런 걸로 시간낭비를 할 수도 없어서 쌓이고 쌓이는 울분을 속으로만 죽이고 있었다.
“그것은 짐에게 맡겨라. 그게 누가 됐든 정보를 알 만한 사람들을 모으고 연구하게 하겠다. 시간은 장담을 못 하겠지만 최선을 다해 찾을 것을 약속하지.”
지금 당장 해 줄 수 있는 게 약속뿐이라는 것은 조금 속이 상한다. 황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정작 사고가 난 지금 당장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내 자신이 가지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닌 이상은…… 시간이 함께 필요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폐하께선 그렇게 나서 주실 줄 알았습니다.”
날카롭기 그지없던 그가 지체 없는 황제의 확답에 슬쩍 미소를 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는 이걸 위해 온 거였다.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방법을 꺼내 올 수 있는 발을 뻗기 위해서.
이번만큼은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것들을 없애는 데에 온 힘을 다 쏟을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것들이 없어지고 나면 이 귀의 소음도 없어지거나…… 조금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도 어느 정도 있었다.
“뭘 그렇게까지 인사를 하고 그러나, 쑥스럽게. 그대와 내 우정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말이야.”
황제는 흐뭇한지 다시 몸을 뒤로 젖혀 등받이에 한껏 기대며 미소를 지었다.
카일러가 이렇게까지 하려는 데에는 물론 마물이 이제까지와 다르게 사람들을 공격할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에서 급한 마음이 생긴 것도 있지만…… 다른 하나는 귀에…… 지금도 들리는 이것에 있었다.
데이트를 나가자고 하던 그녀의 미소에 그는 넋을 잠깐 놓았다. 자신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어딘가 좀 달라졌다는 것이…… 느껴졌었다.
실제로 그녀와 집이 아닌 곳에서 함께 무언가를 하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었다. 집이 아니어도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고, 매번 하던 것 외의 무언가를 같이 한다는 것이 다른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들떠 버렸다.
그녀라 우할린 숲을 말할 땐 잠깐 흠칫했었다. 마물 출몰지인 산맥과 이어지는 숲이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그런 일이 없었다는 말 때문에, 너무 안일하게 생각해 버린 것이 문제였다.
칼을 차면 뭐 하나,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를 않았던 것을.
그녀를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는 이 능력을 스스로 차단해 버렸던 것이다. 힘들다고, 귀찮다고…….
만약 숲을 거닐 때 사샤의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마물의 접근도 알았을 테고,. 다시 한 마리의 마물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는 것도 미리 알았을 것이다.
그녀를 위험하게 만든 것은…… 결국 자신이었다.
카일러는 다시 한번 이를 꾹 물었다. 턱관절이 튀어나오고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힘을 넣었던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커다랗고 거친 손에 또 거친 손이 만져졌다.
그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을 다시 잡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아서…… 카일러는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