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집무실로 들어간 이들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나오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는 듯이 보였다.
“괜찮습니다, 사샤 님. 해가 지고 나면 아마 끝나고 나오실 겁니다.”
“저녁때까지?”
“……아마 잠들기 전까지?”
그나마 처음 들어갈 때 쩌렁쩌렁하던 목청은 가라앉아 목소리가 밖으로까지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사샤는 로제의 말을 듣고도 그 앞을 오래 떠나 있지 못했다.
“그나마 딜런 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공작님의 저런 상태에서 대화가 가능한 건 딜런 님 정도거든요.”
차를 들이러 안으로 들어갔던 니나를 붙들고 물어보자 안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이에 얼어 죽을 뻔했다고 얼이 빠져선 대답했다.
그녀를 얼른 보내 주고 난 사샤는 조금 더 기다리다가 홀로 저녁을 먹었고, 잠시 더 기다리다가 로제의 권유로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차마 바깥 복도에서 기다리지는 못 했지만 방문을 살짝 열어 둔 채 그 근처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그의 방문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칵.
그 소리는 꽤나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들렸다.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는 발소리가 꽤나 거칠었다. 검을 쓰는 기사라서 그런지 본래 그의 발소리는 매우 가벼웠었는데…….
아무튼 그가 방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사샤는 바로 가물가물 잠과 싸우던 소파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나섰다.
항상 잠들 땐 그의 곁에 있었으니까. 오늘 거칠고 예민해질 만큼 아프고 괴로웠을 그의 옆에서 위로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사샤 님.”
그런데 막 카일러의 방문 손잡이를 잡으러 다가가려는 찰나였다. 나직하고도 작은 목소리가 그녀의 손을 막아섰다.
“로제?”
고요한 복도에 소리가 울릴까 작은 목소리로 날 막아선 이의 이름을 불렀다. 제가 공작을 기다렸듯 일을 멈추고 방으로 올라갈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조용히 계단을 올라온 로제를 눈치채지 못했다.
“오늘은 안 들어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둠에 조금씩 흩어질 듯이 나직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녀의 얼굴은 약간의 걱정을 담고 있었는데, 그게 누구를 향한 걱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힘들었으니까…….”
내가 들어가서 같이 있으면 힘이 되는 걸까. 힘들어하고 아픈 그를 보고서 빨리 밤이 되어 그의 방으로 가 그를 품에 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혹은 그에게 안겨 있어도 좋았다. 아무튼 그런 생각으로 그가 올라오길 기다리고 있던 거였는데…….
“괜찮으실 겁니다. 아침이 되면 대체적으로 안정을 찾으시고 나오세요. 오히려…… 지금 예민하실 때 옆에 누군가 있으면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안 좋을 대상이 카일러라는 얘기일까, 아니면…… 내게 안 좋다는 걸까.
그건 차마 묻지 못한 채 사샤는 문손잡이를 미련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로제는 사샤의 손을 살포시 두 손으로 모아 쥐었다. 천천히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따라가자 그녀는 자신의 손을 곱게 쥐고 천천히 걸어 그녀의 방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저택 안은 고요했다. 카일러가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조용한 복도를 걸어 사샤의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 소파가 있는 것에 흠칫했지만 로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녀를 침대까지 그렇게 데리고 함께 걸었다.
“주무세요, 사샤 님.”
로제는 희미한 미소를 남기고 그대로 나가 버렸다. 자신이 다시 그에게 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 같아 사샤는 몇 번을 망설인 끝에 그냥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침대 위에 다리를 모으고 앉은 그 자세로 사샤는 잠들지 못한 채로 꼬박 밤을 새우고 말았다.
*
딜런과의 토론은 그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카일러의 결정이 너무나도 확고했지만 딜런은 그를 지키는 기사로서, 이그노트 공작저를 수호하는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공작의 명령이라고 함부로 따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말…… 이렇게 명백한 일마저 이길 수 없다니 말이 됩니까. 제 자신에게 실망입니다.”
딜런은 그렇게 한 번도 그를 이긴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번에는 물러날 수 없을 정도였다. 무모하고도 무모했기 때문에.
“마물의 씨를 말리겠다고 산에 들어갔다가는 늙어 돌아가실 때까지 산에 사셔야 할 겁니다.”
묵묵하던 딜런을 수다쟁이로 만들고 얼굴까지 불퉁하게 만든 카일러는 정작 태연한 얼굴이었다. 아니, 태연하다기보다 정확하게는 아주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내가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으로 보이는가.”
“그렇게 무책임한 방법을 쓰겠다고 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저벅저벅 앞뒤로 서서는 걸어가고 있었다. 그 길은 공작저가 아니라 그보다 더 넓고 더 화려한 황궁의 복도였다. 앞서 걷고 있는 시종장을 따라 걷는 길이 오늘따라 길게만 느껴졌다.
“지금 당장 내가 다 후려칠 수 있으면 좋겠지. 대마법사를 무덤에서 깨워 산맥을 통째로 불태워 달라 하고도 싶다. 하지만…… 그게 어려우니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야지.”
한참 카일러의 뒤를 따라서 힘차게 걷던 딜런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멈춰 섰다. 그 기척을 바로 알아챈 카일러도 멈춰 서선 뒤를 돌아보았다.
“뭔가.”
“하…… 귀 안 좋으실 때 격하게 말씀하시는 건 알고 있지만 이번엔 좀 많이 심하셨습니다. 그 말씀 처음에만 해 주셨어도 저희 어제 그렇게까지 소리 지르며 회의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딜런은 가슴이 당길 정도로 소리를 질러 가며 그를 상대했던 어제를 떠올렸다. 목이 잠길 것 같을 때가 되어서야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카일러가 목소리만큼은 낮춰 주어 다행이었다.
“어제는…… 소리도 고통도 심했다. 게다가…… 그것들이 그녀를 건드렸으니까.”
반란 분자들이 자기들이 모아 놓은 물자도 빼앗기고 사람들도 잡혀가 감옥에 갇혀 버리니까 분풀이로 마물들을 더 풀어놓기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소란스러운 데다 귀와 머리를 아프게까지 만들어서 어제는 정말 우기다시피 마물을 토벌한다는 말만 자꾸 반복하고 우기고 그러느라 언성이 높아져 버렸다 딜런의 걱정이 제 걱정이고, 마물 토벌을 위해서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거 전부 알고 있었음에도 도저히 뭔가 논리적 사고를 해서 그걸 입으로 내는 과정을 정상적으로 할 수가 없었다.
“그…… 그렇죠, 건드렸죠.”
딜런은 가라앉아 버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발을 옮겼다. 저만치까지 걸어가서야 그들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시종장이 서 있었고, 딜런이 움직이자 카일러도 바로 휙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몸부림치느라 휘둘러 대는 날개에 밀쳐져 저만치 날아갔다고 하니 사실 여린 부인의 몸으로 감당하기는 정말 어려웠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아마 공작부인께서 마물과 맞닥뜨렸을 때, 이분은 자신의 깊은 곳에 억눌러 놓았던 상처와 직면해야 했을 것이다.
직접 눈앞에 맞닥뜨린 공포와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약했을 때 깊이 새겨졌던 공포가 더해져서.
어제 그가 그렇게나 힘들었던 것은 단순한 소음 때문만이라기보다…… 그 아픔이 뒤섞였던 것이 아닐까 하고, 딜런은 생각했다. 아마, 그리고 그게 맞을 것이다.
“황제 폐하, 알현을 청한 카일러 이그노트 공작님과 이그노트 기사단장 딜런 라디아크가 도착했습니다.”
“고할 게 뭐가 있나! 어서 들어오게.”
시종장이 알현실의 문 안으로 들어가 고하자마자 리디안의 경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참 세상 평온하게 말하는 그가 참 신기해 보일 정도였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시종장이 다시 나와 부를 것도 없이 카일러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커다란 황좌에 나른한 자세로 앉아 있는 그는 카일러와는 다른 느낌으로 굉장히 수려한 외모를 자랑했다.
“카일러, 왔군. 오늘 분위기가 매우 심상치 않은데, 무슨 일이든 있었나 보구먼.”
태평한 주제에 눈은 엄청 날카로웠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카일러의 얼굴과 걸음걸이, 그리고 마련된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는 모습을 보자마자 리디안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유감이라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일러는 황좌의 정면에 놓인 의자에 앉고 딜런은 그 대각선 뒤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카일러는 앉자마자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이 본론부터 꺼냈다.
“사샤가 마물에게 공격을 당했습니다.”
평온한 얼굴에 기본값처럼 입술로 미소를 그리고 있던 리디안마저 얼굴을 서서히 굳혔다.
딜런은 황제와 공작 사이에 아주 작은 오해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굳이 끼어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저게 진짜, 카일러가 그 순간 느꼈을 공포와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입까지 턱 벌린 채 눈동자를 심하게 떨었다.
“이, 그…… 그런, 마물이 공작부인을……. 아니, 너는 어찌하여 산맥까지 그녀를 데려간 것이야. 어?”
황제가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것을 두 사람 모두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조금이라도 태연해 보였다면 조금…… 아니 분명 많이 짜증을 냈었을 텐데, 생각보다도 더 당황한 리디안을 보자 후, 하고 짧은 숨을 내쉬었다.
“진정하시죠, 사샤는 지금 왼쪽 팔에 금이 가 붕대를 해서 팔을 고정시킨 채 저택에서 쉬고 있는 중입니다.”
카일러의 말에도 잠깐 동안은 표정이 굳은 채로 돌아오지 못한 채 멍해져 있었던 리디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눈덩이가 사르르 녹아내리듯이 굳은 얼굴이 녹아내려 버렸다.
“하아, 지금 짐에게 심통을 부리는 것이냐.”
“음, 좀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아주…… 아주 기분이 나빴거든요.”
“그래도 기분이 좀 나아져서 와 준 거라면 고맙다고 해야겠군.”
리디안은 그제야 씨익 하고 미소를 지으며 카일러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