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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66화 (66/128)

66화

“보고 싶었다……?”

“아버지…….”

서늘하게 입을 여는 그의 반응에 미디에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무뚝뚝한 남자였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였다. 미디에나는 알게 모르게 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고 막 성인이 되었던 열아홉에는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었는지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이제 그녀를 약간의 분노까지 담긴 서늘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내 너가 어리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철이 없었을 줄이야. 그때 알았다면 절대 황제 폐하의 곁으로 너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더니 그리움 가득한 얼굴로 보고 싶었다 말하는 딸에게 버럭 성질을 내고 말았다.

“아, 아버지…….”

어안이 벙벙한 미디에나는 아까부터 자신을 무시하고 쳐다보지도 않고 인사조차 받지 않던 메딜란 공작의 반응에 받았던 충격에 더하여 아예 사고회로가 멈춰 버리고 말았다.

커다랗게 뜬 두 눈 속에서 자수정빛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그 처연한 모습에 입술을 꽉 깨문 메딜란 공작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그렇게 가문에 먹칠을 하고도 지금 내게 아버지 소리가 나오느냔 말이다. 내가 보고 싶었다면서…… 그러면서 그런……!”

기어이 미디에나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고 말았다.

그녀는 생애 단 한 번 사랑을 했을 뿐이었다. 메딜란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곳에서는 그저 영지 내의 평민들을 보살피고 공작으로서 간혹 정치에 참여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녀를 황제와 결혼시키자 한 것도 메딜란과 귀족들이었고, 수도로 보낸 것도 메딜란과 귀족들이었다. 그리고 미디에나는, 자신이 살던 곳에서만 있었다면 절대 만날 일 없었을 그 남자를 만나고야 말았다.

황제와의 국혼을 치르기 위해 국혼일에 며칠 앞서 수도로 도착했을 때.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데르마 제국 이그노트 공작가의…… 카일러 이그노트입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살짝 찌푸린 미간마저 멋진 남자를 만났다. 예비 황후의 에스코트를 맡았다면서 제국 수도의 변방 숲까지 나와 그녀를 맞이한 남자…….

황제는 그 남자를 제게 보내면 안 됐었다. 처음 봤던 남자가 황제였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수도 없이 그녀를 괴롭혔지만 결론적으로 이미 품어 버린 마음을 비울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한 번도 제 입장에선 생각해 보지 않으셨어요?”

“입장? 지금 입장이라 했느냐. 나는 메딜란 공작이고, 너는 그 공작의 하나뿐인 여식이었다. 그런 입장은 생각도 안 하는 것이냐!”

노발대발하는 이유는 분명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라면, 그녀를 사랑해 주었던 아버지라면 조금이나마 자신을 안쓰럽게 생각해 줄 거라고 생각했었다.

얼마나 급작스러운 결혼이었는데, 꿈 많던 소녀의 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린 결혼이라는 게…… 본래 보통의 영애들에게도 엄청나게 큰일일 텐데, 심지어 준비도 없이 이 커다란 제국의 황후가 된 것이다.

미디에나는 서러움이 북받쳐 눈물이 넘쳐흘러 버렸다. 숨이 꺽꺽 넘어갈 듯이 복받치는 그 울음에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뭘 잘했다고 이리도 우는 게냐!”

“그래요. 나 잘한 거 없어요. 끅, 흐윽, 흑……. 결국…… 아버지도 저한테 애정 같은 거 없으셨군요. 저는…… 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호통을 칠 수밖에 없더라도 뒤에서는 안타까운 눈으로 등짝을 때리듯 두드려 주며 왜 그런 일을 했냐고 혼내 주기를 바랐다.

위로를 해 주기 위한 그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그렇게 애정 어린 손길을 받고 나면…… 자신을 걱정해 주는 그 눈길, 그 따스한 온기를 느끼면, 그 남자가 포기가 되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기대까지 했었다.

그래서 그가 황궁에 들를 거라는 리디안의 말을 듣고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미디에나!”

“됐어요! 이런 딸 창피해서 싫으신 거잖아요.”

다시 한번 다그치려는 그의 목소리에 미디에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적어도 부모님은 제게 왜 그랬냐, 힘들었던 거냐, 한 번은 물어 줄 줄 알았다. 이 마음을…… 한 번쯤은 생각해 줄 줄 알았다. 끝까지 지켜 주지 못하고 이곳으로 보낸 것은 부모님, 메딜란 공작이었으니까.

“내가 너를 사지로 몰아넣은 것도 아니고, 어째서 그렇게 나를 원망하는 눈으로 보는 것이야. 힘들었다고라도 하고 싶은 것이냐? 힘들면, 그런 짓은 해도 되는 거고? 뭐? 누구를 사랑해? 이런 이야기를 아비에게 들리게 했어야 했더냐!”

벼락같은 호통이 계속되었다. 절망한 미디에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저 멀리에서 그녀의 시녀장이 발을 움찔했으나 이쪽으로 달려오지는 못 하고 그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니에요, 아버지. 아니…… 메딜란 공작.”

미디에나는 이를 악물었다. 후들거려 주저앉았던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손으로 땅을 짚고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다리의 떨림을 멈추니 턱이 떨리려는 것을 추스르고 두 눈을 떴다.

그녀의 보랏빛 눈이 번뜩였다. 날카로운 원망의 빛이 가득 찬 그녀의 눈빛에 메딜란이 움찔했다. 1년 사이 사랑스러웠던 그녀의 딸은 어디에도 없는 듯이 표독스러워진 눈빛을 한 여인이 있었다.

“황후가 되길 바라셨으니…… 황후가 된 모습을 보여야지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메딜란 공작. 이제 나이도 드셨으니 먼 길 다시 오실 일 없으시겠네요. 이곳에…… 만나야 할 사람도 없으실 테니.”

독기가 흐를 것 같은 눈과 달리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미디에나…….”

뒤늦게 그녀의 이름을 살짝 담아 보았으나 그녀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뒤돌아 버렸다.

또각또각,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복도를 가득 울렸다. 간혹 떨리는 다리 때문에 굽 소리가 어긋나기도 했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고는 걸어갔다.

저편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고 있던 시녀장이 크게 휘청이는 그녀를 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냉큼 달려 나와 그녀를 부축했다.

“방으로.”

“네, 폐하. 방으로 의원도 부를까요.”

“필요 없어. 방으로 가.”

“예, 폐하.”

시녀장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충격을 받은 메딜란 공작은 시녀장의 어깨에 거의 온몸을 기대다시피 한 채 힘겨운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미디에나는 걸음을 옮겨 그렇게 복도를 걸어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고, 그 흔적을 좇듯이 자리에 서서 멍하니 복도 끝만 바라보고 있던 메딜란 공작은 몇 번이고 걸음을 그쪽으로 옮기려고 다리를 움찔대다가 결국은 뒤돌아 반대편 모퉁이를 돌아 나가 버렸다.

“쯧, 너무 빨랐던가.”

두 사람이 모두 복도에서 사라지자 집무실 문이 끼이-열리더니 리디안이 나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에 서서 팔짱을 꼈다.

메딜란 공작 영지는 나라라고 해도 좋을 만큼 넓었다. 애초에 하나의 독립 국가였던 것을 합병했던 것이니까. 그런 곳에서 가뭄을 겪고 있다고 해도, 그래서 타개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해도 나이도 있는 공작이 이곳으로 오기에는 쉽지 않을 걸음이었다.

“그래서 메딜란이 딸아이가 걱정되어 한걸음에 달려온다 한 줄 알았더니만……. 쯧.”

아니면 이렇게나 대번에 흔쾌히, 제국의 수도로 와 줄 이유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디에나가 등장했을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미 메딜란 영지에까지 그 소문이 퍼진 것이었다.

“아이고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 녀석 절대 안 보내는 거였는데……. 쯧, 반해도 너무 반해 버렸네. 기왕이면 나한테 반하지.”

“그럼 황후께서 폐하께 먼저 반하셨을까요?”

그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것은 시종장 한테스였다.

장난스레 받아치는 그 말에 리디안은 쩝, 입맛을 다셨다.

“내 미모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카일러를 이어 두 번째라고나 할까.”

리디안은 고개를 기울이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스스로 거울을 보나, 주변에서 말을 해 주나…… 그의 외모 또한 칭찬받아 마땅했다. 선대 황후가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기 때문에 그 미모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던 것이었다.

“음…… 그것은 인정하는 바입니다. 우리 황제 폐하도 폭포수보다 더 장관이었을 겁니다.”

한테스는 의외로 흔쾌히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폭포수라 함은 미디에나와 카일러가 처음 만났던 장소라고 했다.

숲에 마물까지는 아니더라도 커다란 짐승이 간혹 출몰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곳으로 오고 있을 자신의 예비 부인을 위해 절친한 그를 보냈던 것이 이렇게 돼 버릴 줄이야…….

리디안은 다시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온몸을 파묻고 앉았다.

“아아아, 복잡하다. 여인의 마음이란 본래 이런 것인가.”

“뭐 제가 알기에는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랑도 안 해 본 주제에.”

“폐하, 저는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은 한 적이 없습니다.”

“……뭐야?”

은근히 유치한 이야기를 나누며 리디안은 카일러를 떠올렸다.

그렇게 무뚝뚝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카일러의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까지 반할 수 있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카일러가 매력적인 남자라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절대 아니고.

“한테스, 시녀장에게 일러서 미디에나의 방에 간단한 요깃거리와 홍차를 올려 보내라고 전하라.”

한테스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자신의 반려인 황후를 먼저 챙기는 황제에게서 한없는 다정함을 엿보았다.

오늘은 정말 고요히 지나가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졌지만 리디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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