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그의 갑작스럽고 달콤했던 입맞춤 덕에 그날 그 이야기는 얼렁뚱땅 마무리가 되어 버렸다. 넋이 나가 있던 사샤는 정작 그래서 그의 ‘듣는’ 능력이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 어떻게 알았는지 등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알고 나니 더 궁금한 게 더 많아졌는데…….
“공작님께서는 오늘 직접 상황을 보시겠다면서 우할린 숲으로 가셨어요.”
그녀의 아침 기상을 도와준 코니는 세수를 마치고 뚱하니 앉아 있는 그녀에게 공작의 행방을 전해 주었다.
또, 또…… 말없이 홀라당 나가 버렸다 이거지…….
그녀가 궁금한 것을 묻지 못한 것에는 자신이 혼이 빠져 있었던 것도 있었지만…… 카일러 때문도 있었다.
처음엔 쑥스러워 그런 줄 알았다. 키스 후에 바로 일어나 나가 버렸던 것이다. 그의 뒤를 따라 나가 보자 그는 식당으로 향했고 같이 앉아 저녁 식사도 했다. 그리고 방에서 나온 이후로 이상하게 눈을 잘 안 맞추기 시작했다.
그게…… 그럴 일인가? 우리가 밤을 함께 보낸 게 몇 번인데……?
어리둥절했지만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고, 밤이 되어 그의 침실로 갔을 때 그는 침대에 누워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침대로 올라갔고,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고 잠이 들었었다.
그래서 그것만으로도 된 건 줄 알았다. 뭔가 쑥스러웠던 것이 있던 거겠지, 하고.
“몇 시에?”
“예?”
“카일러 몇 시에 나갔어……?
“어…… 1시간 전에요.”
그런데 그가 또 잠이 든 그녀를 두고 먼저 나가 버렸다. 새벽같이 나간 것도 아니고, 내가 전에 분명 나갈 땐 깨워 달라고 했었는데.
또 뭘까, 이건. 왜 다시 고민에 잠겼던 그때처럼 말이 없어지고 눈을 피하고 그러는 걸까.
다른 이들 앞에선 그토록 단호하던 이가…… 또 뭐가 문제여서 제 눈을 이렇게 피하는 걸까. 서로 말없이 오해하고 피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거 풀겠다고 나갔던 데이트에서 험한 일을 당했었지…….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분명 결혼식 날 도망치던 그녀를 붙들고 노려보던 그는 마치 지옥의 신 하데스 같은 느낌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안광이 정말 차가운 지옥의 파수꾼 같은 무시무시한…… 그런 사람으로만 봤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에겐 뭔가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어리둥절하면서도 뚱해진 사샤를 이끌고 코니는 파티션 뒤로 이끌었다. 잠옷을 입을 그녀에게 실내복을 건네주면서 코니는 뚱한 그녀의 얼굴을 안절부절못하며 바라보았다.
*
벌컥!
“아버지!”
황제의 집무실을 그녀가 이렇게 반갑게 여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미디에나는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며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황제의 집무실, 커다란 소파에는 황제와 그리고 백발이 성성하고 눈빛은 형형한 중년의 남자가 마주 앉아 있었다. 황제는 그녀를 돌아보곤 슬쩍 웃어 보였지만 대각선으로 앉아 있는 백발의 남자는 슬쩍 곁눈질을 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도 그녀에게 대꾸를 해 주지 않았다.
“먼 곳까지 온 보람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다음 수확 철에는 지금 절감해 준 세금까지 더해서 내도록 하겠습니다.”
백발의 남자는 미디에나가 그렇게 들어와서 자신을 향해 눈을 빛내며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치듯 그 시선을 지나쳐 다시 황제에게로 말을 걸었다.
미디에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이쪽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도 않는 듯 그 백발의 남자는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았다.
“메딜란 공작께서 직접 이곳까지 와 준 데다 황후의 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지. 내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나.”
리디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백발의 남자, 메딜란 공작에게 대꾸했다.
메딜란 공작 대신 리디안이 살짝 이쪽 소파를 보았다 다시 미디에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짓의 뜻을 알아차린 미디에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로 발을 옮겨 그들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녀는 메딜란 공작, 자신의 아버지 맞은편으로 앉았다.
“황후는 이제 제대로 수도에 적응을 마쳤지. 메딜란 영지가 얼마나 살기가 좋았으면…… 그러니 회복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싶었네.”
“황공합니다.”
부드럽게 미소를 담은 눈으로 바라보는 리디안과 별다른 감흥도 없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메딜란 공작의 눈빛 앞에…… 미디에나의 얼굴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화색도 사라지고 말았다.
대답을 이끌어 내기 위한 황제의 말에도 메딜란 공작은 느리게 깜빡이는 눈으로 한 번 슬쩍 바라봤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 저는 이만…….”
할 이야기는 모두 끝이 났는지 메딜란이 일어날 채비를 했다. 황제가 알았다 한마디만 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갈 기세였다.
“그래. 오랜만에 황후를 만났으니 부녀간에 할 이야기도 많겠지.”
황제가 미디에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오른 리디안은 본래 황후를 맞이하는 것을 최대한 뒤로 미루려는 상황이었다. 선황이 황후와 함께 갑작스럽게 사고로 돌아가신 만큼 혼란스러운 정세를 가라앉히고 자신의 황제로서의 자리를 확립하는 데만 해도 이미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의 성화를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었다.
갑작스럽게 황제와 황후를 모두 잃은 제국에서는 어린 황제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에게 힘을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황후 후보는 바로 메딜란 공작의 영애, 미디에나였다.
제국 최고의 가문이라 불리는 이그노트는 유구한 역사 동안 데르마라는 황제의 가문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해 온 가문이라 하면, 메딜란 공작 가문은 본래 메딜란이라는 별도의 공국이었던 것을 몇백 년도 더 전에 흡수한 곳이었다.
합병이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원활한 관계를 잇고 있었으나 수도의 귀족들만큼이나 경계해야 할 세력이라는 인식 또한 있었다.
부족한 황실의 황후 자리도 채우고, 영애를 황후로서 황실에 두어 메딜란을 견제하는 목적까지 가질 수 있으니 그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혼처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메딜란 공작은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렇게 데르마 제국의 황후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두에게 좋은 일이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인지, 열아홉, 영애에게 이 결혼은 날벼락과 같았다.
그동안 살아왔고 꿈꾸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명에 따라 머나먼 데르마의 수도로 와야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고향을 항상 그리워하고 있었다.
메딜란까지 쉽게 다녀올 수 없다고 해도 이곳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에 리디안은 이번에 공작은 황궁으로 초대했던 것이다.
“아, 저는 서둘러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가서 돌봐야 할 일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하지만 리디안이 던져 준 희망은 메딜란 공작이 스스로 거둬 가 버렸다. 부녀간의 할 얘기가 많겠다 하는 리디안의 말에 살짝 좋은 예감으로 두근거리던 미디에나의 마음은 차게 식어 버렸다.
“그럼, 폐하. 먼저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메딜란은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예를 표했다. 명치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이는 메딜란 공국의 인사법을 보인 그는 미디에나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
그 발걸음의 단호한 소리에 그대로 미디에나는 고개를 숙여 버렸다. 하지만 자꾸 시야에 파닥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다.
고개를 돌리니 리디안이 손짓으로 그를 따라 나가라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그 표정이 너무 우스워서 피식 웃었다.
“어서 나가 봐야지.”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던 미디에나는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메딜란의 뒤를 따라 집무실을 나섰다. 저 복도 끝에 막 모퉁이를 돌려 하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미디에나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 소리를 듣고도 계속 걸어가 버리면 어떡하나 두근거리고 있던 미디에나의 얼굴에 화악 미소가 퍼졌다.
숨이 가빠지도록 빠르게 걸어간 그녀가 아버지의 앞에 서자 메딜란이 스윽 몸을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약하게 밭아진 숨을 몰아쉬고 그를 올려다보던 미디에나는 금방 숨소리도 잦아들고 한껏 올라갔던 입꼬리도 스르륵 내려와 버리고 말았다.
“무슨 일이냐.”
메딜란 공작은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담겨 있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물었다. 하인을 대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차갑지는 않을 것처럼…….
“아, 저……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
그녀를 이곳 수도에 보낼 때만 해도 무뚝뚝하지만 다정하게 보듬어 주던 메딜란 공작이 아니었다. 그는 서늘한 눈을 한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이! 저 안 가고 싶어요. 차라리 아버지 곁에서 평생 살게요. 네? 아버지 뒤를 이어서 메딜란 공작이 될게요. 네에?”
“미안하다, 미디에나. 그건 좀 어렵게 됐다. 데르마를 위한일이고, 황제 폐하도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고 들었어. 잘생겼고 성격도 무뚝뚝하지 않고.”
“아버지 무뚝뚝하다고 불평 안 할게요. 아버지가 좋아요. 여기 메딜란이 좋아요. 여기서 살게 해 주세요. 결혼은 하기 싫어요.”
철없이 결혼하기 싫다고 우겨대는 딸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한데 지금 눈앞의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제국을 위해서다, 미디에나. 너는 결국 결혼할 수밖에 없는 여인이니 기왕 결혼하는 거, 제국 최고의 여인이 된다 생각하거라.”
결국 그녀는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온 곳이었는데…….
미디에나는 아버지의 차가운 반응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이 상황에 입만 자꾸 벙긋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