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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63화 (63/128)

63화

해가 뉘엿뉘엿 주황빛이 될 때까지 사샤는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공작저의 나무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자신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모를 것이다. 애초에 그 숲에 데리고 간 것은 자신이었고 숲의 초입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산맥 쪽으로 그를 이끌어 갔던 것도 자신이었으니까.

그러한 위험에 처하게 한 것도 미안한데 하필이면 그의 트라우마까지 건드린 것 같아서 사샤는 아랫입술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꾹꾹 물고만 있었다.

“……따가워.”

그의 생각에 다시 입술을 꾹 깨물다가 멍든 것처럼 순간적으로 퍼지는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해가 져 가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또 하루가 끝나는 시간이 돼 버린다.

로제가, 카일러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 준 것에는 화해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강하게 들어가 있을 것이었다. 그걸 안다면 이렇게 또 하루를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테라스에서 나왔다. 차마 한 팔로는 티 웨어를 정리해 들어오기가 어려울 듯해서 테라스의 것을 방 안으로 옮겨 놓기만 한 채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 바로 옆에 있는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

안에서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사샤는 대답을 애초에 들을 생각도 없었다는 듯이 그대로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그가 저번처럼 어둠 속에 앉아 깊고 깊은 사색에 들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선 들어서니 아직 해가 질 때가 아니어서 햇빛이 망에 들이치고 있었다. 그는 어둠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저 소파에 앉아 고요히 눈을 감도 있을 뿐이었다.

“로제, 저녁은 먹지 않겠다. 나가라.”

그는 기척을 느꼈는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눈을 떠 그녀를 바라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사샤는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 그가 앉아 있는 소파의 옆자리에 앉았다.

자신의 옆에 몸을 바짝 붙여 앉는 사람의 기척에 카일러가 흠칫 놀라며 두 눈을 떴다. 일단 계속 감고 있던 눈이 부셔서 찡그리는 사이 옆에 앉은 사샤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

사샤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카일러는 굳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여기 있냐는 얼굴로 자신을 보는 카일러의 얼굴이 미워 보였다.

“나 괜찮아요. 그 말 하려고 왔어요.”

사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전혀 그렇지 않은 말을 하고 있었다. 화는 났지만 말만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그래, 많이 나았다니 다행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사람 만난다고 그러고 있지 말고 어서 가서 잠을…….”

“정말……! 내 상태를 보고 말해요. 나 완전히 괜찮아요. 원래도 저택을 안 벗어나고 안에서 노는데 이렇게 방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나의 심정은 어땠는지 좀 생각해 줄 수 없어요?”

이렇게 크게 솔직하게 말하는데 대답을 좀 해 주지……. 사샤가 부루퉁하게 따지고 드는데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가 미안해요. 그날…… 쓸데없이 데이트하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사샤의 말에 카일러가 그제야 반응을 했다. 그녀를 돌아보며 카일러는 무표정한 얼굴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데이트는 함께 나갔던 것이고, 내 다른 일 때문에 더 자주 못하는 아쉽다고 우선 말했던 부분이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는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 자꾸 다른 말이 나오는 듯했다.

“카일러. 내가 미안해요. 그 숲에서도 정자 있었던 데까진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괜히 산맥 가까이까지 걸어가게 만들었어요. 그런 것 때문에 나 벌 받고 있는 거 맞죠? 뒤늦게 깨달았어요. 내가 미안해요”

벌은 무슨, 그는 그저 그녀에게서 피해 있을 뿐이었다. 벌은 제가 받아야 하니까.

사샤는 끊임없이 말을 옮겼다. 그가 자신을 보지 않는 것이 제일 마음을 불안하게 했으니까. 그러자 겨우겨우 그가 눈을 떠 그녀를 보았다.

이제야 겨우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사샤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극단적으로 말할 때는 반응했던 그가 이제는 또 유심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가…… 나는, 내가 날 용서할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구하러 가는 것이 느려 그게 제일 끔찍했다. 바위 틈 사이로 들어가라 외쳤던 것도 후회되었다. 안전해 보일지 몰라도 그게 무서운 것이었다.

그 짧은 시간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도 공포가 느껴졌었다. 자신을 보고 자신을 믿고 와준 이에게 제대로 닿기도 전에 그사이에 마물이 끼어들도록 허락해 버렸던 걸 곱씹을수록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시간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내가 다 보고 있었어요. 카일러는 열심히 내게 오고 있었고, 나를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다 제대로 했었고요. 내게 오고 있던 당신을 보지 못했다면 아마 힘들었겠죠.”

카일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입술을 깨문 채 애써 사샤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서 날 어떻게 오늘까지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런 와중에 바깥에도 못 나가게 하고 말이죠. 응? 나 방 안에 있는 거 너무너무 답답했었단 말이에요.”

“그, 그거야…… 팔을 다쳤으니까.”

“왼팔이고 나 오른손잡이라 크게 의미 없어요. 밖에 나갈 거면 알아서 나와가 알아서 할 거 다 하고 혼자 그냥 들어올 시간이에요.”

그는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입을 뻐끔거렸지만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아마 걱정 가득한 말일 테니 알고 있었다. 그가 걱정 많은 남자가 되야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으니까 오늘만큼은 화내지 않기로 했다.

“하…… 미안하다. 내가 더는 볼 수가 없었어. 그래서 어느 정도 정도 지나면 진정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때까진…….”

“그것들이 여기까지 올 것도 아닌데 왜요. 언제까지 나 방에 가둬 줄 거예요? 가둬 뒀으면 면회라도 자주 오지 왜 나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네?”

사샤는 아예 작정하고 그를 몰아붙였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지나갈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카일러는 카일러 대로 난감했다. 아직도 그녀를 보면 죄스러울 정도로 미안할 지경인데 차라리 자신의 잘못이다 말하는 그녀에게 누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더는 거짓말도 못 하겠고……

사샤는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일어나 의 허벅지 위에 앉아 몸을 기울여 그에게 기대었다. 갑작스럽게 그녀가 해 오는 대답한 스킨십에 카일러는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샤, 괜찮…….”

“그러니까 다친 건 왼쪽이라고요.”

그녀가 기대온 것은 오른쪽 팔이었다.

그의 가슴을 오른팔로 짚고 상체를 살짝 띄운 사샤는 그대로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그날 저녁 차라리 이렇게 안아서 곁에서 위로를 해 주었다면 조금이나마 나아졌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체적으로 할 수 있다고 안아 보고 거기에 더해 이것저것…… 할 생각이었다. 그녀 또한 그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안할 때는 그의 품이 훨씬 그리워졌다.

그는 닿아 있는 입술이 움직이는 데에만 집중하면서 움직임도 없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대신 사샤가 입술을 맞물린 채로 오른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그의 어깨와 쇄골을 문지르고 간혹 입도 맞춰 주었다. 서투른 손길이었지만 자신도 그와 마찬가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는 입술만큼이나 피부도 뜨거웠다. 자신의 손에 달아오르는 피부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녀가 적극적으로 리드하는 키스에서 카일러는 적극적으로 응하기보다는 그녀가 하는 대로 따라오기만 했다. 그녀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건 느낄수록 더 소중해지는 것 같았다.

“내게도 고마움을 표현한 시간을 줘요. 나는 응원하지 않았고 좋아하고요, 곁에 있어 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날 구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하고 있었다고요.”

그의 가슴을 짚고 작은 손으로 가슴을 쓸면서 가벼운 키스를 이어 가고 있었다. 한쪽 팔만으로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려 했던 것인데 어느 순간…… 제가 더 이 행위 자체에 빠져들어 버리고 말았다.

“하아…….”

“……사샤. 나를 용서해 주는 거냐.”

입술을 떼고 그를 내려다보는 사샤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녀는 몽롱한 눈을 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초점을 찾은 투명한 다갈색의 눈동자는 아름답게 반짝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그런 거 애초에 없었어요. 카일러가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녀의 말을 들은 카일러는 그제야 마음의 짐을 슬쩍 덜어낼 수 있었다. 10년이 넘도록 꾹꾹 눌러 두던 것들이 한꺼번에 녹아내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해 주고 있는 것이겠지만…… 카일러는 빙하의 한 귀퉁이가 녹아서 내리는 아주 진귀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꽉꽉 막혀 있던 제 가슴을, 꼭꼭 누르고 싸매어 가둬 두었던 마음을 서서히 풀어내 주었다. 그것은 오직 사샤만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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