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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62화 (62/128)

62화

카일러는 사샤의 방 앞에서 그 걸음을 멈추고 망설이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을 그 간단한 일을 하지 못하고 몇 번이고 손을 올렸다 내렸다, 그냥 문손잡이를 잡았다가 하면서 서성이고만 있었다.

그의 푸른 눈에는 냉기 대신 걱정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 며칠이 지나도록 그걸 풀지 못하고 계속 얼쩡대고만 있었는데…….

오늘도 하릴없이 그는 돌아섰다. 그는 결국 사샤의 방을 지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의 방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닫힘과 동시에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로제는 손에 간단한 티 세트를 들고 있었다. 계단을 다 오른 그녀는 한쪽에 세워진 트레이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는 문을 두드렸다.

“사샤 님, 차를 가져왔어요.”

“응. 들어와, 로제.”

안에선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대답을 들은 로제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샤는 왼쪽 팔에 깁스를 하고 팔을 고정시킨 채 테라스 쪽에 있는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사샤 님, 햇볕도 좋은데 테라스에서 차를 드시겠어요?”

“응. 그거 좋다. 햇빛 좀 봐야겠어.”

약간 뚱한 목소리가 들리자 로제는 피싯 웃음을 흘리며 트레이를 끌고 테라스로 나갔다.

“화분들은 아이들이 물 줄 텐데 왜 사샤 님이 하고 계세요.”

“방 안에서 뭐 할 게 있어야 말이지. 다친 팔이 왼팔이라 문도 잘 열고 책도 잘 꺼내. 다리를 다친 것도 아닌데 왜 식사까지 방에서 해야 하냐고.”

활동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온몸이 근질거릴 정도로 아무것도 못 하고 방 안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셔 왔다.

“그거야 걱정이 많으시니까 그렇죠.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거 아니겠어요? 공작님께서 그렇게나 넋이 나가 안절부절못하시는 모습은 처음 보았어요. 호호.”

무뚝뚝하던 로제가 호호, 하는 웃음소리까지 내며 그날을 회상했다.

지금에야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날은 정말 공작저가 초비상 상태로 모두가 정신을 놓을 듯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정작 그렇게 큰일은 아니었지만 어떤 사건이 있었던 건지 듣고 정신을 제대로 붙잡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로제와 파반은 그래도 연륜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의사를 불렀지만 정작 가장 오래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은 바로 카일러였다.

“아마 놀랐을 거라고는 생각하는데…… 마물도 많이 만났던 사람이 그렇게까지 놀랐다 하니까.”

그녀의 눈앞에 잠깐이나마 마물이 머물었던 순간은 정말 충격적이었지만, 카일러는 그런 마물을 여럿, 여러 번 보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겨우 금간 것 때문에 이렇게나 극성으로 구는 게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사샤 님과 마물을 보러 간 것도 아니고 그저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려고 했던 건데, 거기서 마물을 만난 것이니까요.”

그래, 그렇지……. 사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했다. 밤마다 뒤척인다는 것은 비밀이었다. 지금 그녀가 툴툴대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걱정되면서 왜 보러는 안 오는 건데?”

그날 이후, 저택에 도착해 이 방 침대에 자신을 내려놓은 이후 사샤는 카일러를 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 오늘이 닷새째다. 그는 찾아도 없다고 했고, 돌아오면 알려 달라고 했는데도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자신더러 방에서 나오지도 말고 푹 쉬라고만 하니, 답답하고 또 답답했다.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햇빛 속에 앉아 차를 마시는 사샤를 보며 로제는 약간 안쓰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거는 저도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뭔가 알아보러 다니시는 것인지 매일 출타하고 계시기도 하지만…….”

밤에 언제든 돌아오면 그를 불러 달라는 사샤와 자신이 돌아와도 사샤에게 알리지 말라 명령하는 주인 사이에서 가장 난감한 건 로제 자신이었다.

차라리 왜 이렇게 피하고 있는 것인지 물어볼 수 있다면, 말이라도 해 준다면 사샤에게 이렇다 저렇다 좋게좋게 설명이라도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것도 안 되는 것이다.

“카일러가 하지 말라고 하니까 내 말 전해도 소용없는 거 알고 있어. 애쓰지 마. 본인이 싫다는데 어떡해.”

처음엔 걱정을 많이 했었다. 로제의 말처럼 그가 제일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자신에게 미안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하는 건 말이 안 됐다. 자신이 보고 싶다고도 여러 번 전했고, 내가 걱정되고 미안했다면 얼른 와서 보살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나도 무서웠는데……. 그런데 그가 와 줘서 안심했던 거고, 그가 금방 와 줘서 내가 이렇게 무사할 수 있었던 건데…….

난데없이 눈가가 시큰해져서 사샤는 고개를 바깥쪽으로 돌렸다. 예고도 없이 고여 버린 눈물이 또르르 흘러 버려서 사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입술과 턱을 지나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을 로제도 눈치채고 있었다. 이 안쓰러운 안주인을 어쩌나. 또 저기 안타까운 주인은 또 어쩌나.

“사샤 님, 잠시 앉아도 될까요?”

로제는 그녀의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눈물을 미처 수습하지 못한 사샤는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고맙습니다, 하고 의자를 빼 앉은 로제는 그녀를 일부러 부르지 않았다. 눈물을 수습할 수 있는 시간은 줘야 했으니까.

“공작님께서 아마 직접 말씀하실 일은 없을 거 같아서 제가 대신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로제는 우아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사샤는 아예 뒤를 보더니 손을 얼굴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는 다시 앞을 보았다.

눈물을 급히 수습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로제는 태연하게 그녀의 두 눈을 마주했다.

“무슨 일이기에 카일러도 모르게 로제가 전해 주려 하는 거야.”

로제도 쓴웃음을 지게 만드는 아주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선대 공작 내외께서 살아 계실 때까지 공작님께서는 그냥 보통의 귀족 영식들처럼 자라고 계셨습니다. 또래와 잘 지내시고 검술 공부와 정칙 공부를 동시에 하고 있는 재원이셨죠. 뭐,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때는 잘 웃고 떠들고 영식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아이 때엔 분명 누구나 그랬겠지만…… 카일러의 어린 모습이나 발랄하게 웃으며 뛰어다니는 모습을 떠올리기란 조금 어려웠다.

사샤가 애매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위로 올려 뭔가 떠올리려 애쓰는 모습을 보던 로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공작님께서 열두 살 때였을 겁니다. 그때 부모님을 모두 한꺼번에 잃으셨어요. 마물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던 때였는데, 산맥 밖으로 나와 숲으로 접어들었는데도 마물들이 계속해서 따라오더라도 했습니다. 그대로라면…… 마을로 마물들이 들어온 판이었죠. 그래서 선대 공작님께서 그 부인과 공작님을 바위 사이에 숨겨 놓고 싸우셨다고 합니다.”

바위 사이…….

“바위 사이로 숨어!”

그날 그의 목소리로 들었던 그 말이, 어렸을 적 그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들었던 그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다음 상황을 모르지만 왠지 가슴이 조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공작님이 그렇게 싸우는 사이,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겠다 판단한 공작부인께선 어린 공작님을 바위 사이에 두고는 함께 싸우러 나서셨다고 했습니다. 공작부인께선 약간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분이었는데…… 그 힘이라도 보태겠다는 그 의지대로 두 분은 아들이 보는 앞에서 마물에 맞서 싸우셨다고 해요.”

그 뒤로 힘겹게 싸움을 이어 나갔고 그 실력 또한 마물보다 앞서 있었지만 그 수가 많았다. 뒤늦게 변고를 안 기사들이 도착했지만 그 시간이…… 꽤 많이 늦었었다.

“눈앞에서…… 부모님이 마물의 공격으로 죽는 것을 지켜보셨다고 했습니다. 마물과의 싸움이 진정되어 가고 있던 터라 모두들 방심한 사이, 순식간에……. 기사들이 마물의 숨통을 죄다 끊고 목숨을 구해 보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어요.”

눈앞에서 마물로 인해 소중한 이의 목숨을 빼앗기는 일……. 그걸 그가 한 번 더 겪게 만들 수도 있었다는 것에 사샤는 소름이 돋아서 온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카일러가 그걸…… 다 봤다고?”

로제는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답답해져 한숨을 시원하게 내쉴 수도 없었다. 차라리 아예 없었던 자신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도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때 정말 저는 공작님께서 잘못되실까 봐 매일매일 안절부절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식사를 들여도 드시질 않고 말을 걸어도 눈을 맞추긴커녕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 작은 주인까지 잃을까 봐…… 다들 숨죽여 그분을 기다렸어요.”

방에 틀어박힌 열두 살의 어린 남자아이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두운 방에 스스로 갇혀 빛도 다 차단한 채 침대와 소파를 오가며 몸을 웅크리고 있는 한 소년이 사샤의 머릿속에 나타났다. 그 아이는 점점 눈물이 말라 쉽게 눈물을 보이지도 못했다.

머릿속으로는 한시도 쉬지 않고 그날의 영상이 떠오르고 반복된다. 떨쳐지지도 않고ㅡ, 애초에 스스로 떨칠 생각도 없어서 계속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또 거기에 푹 빠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혼자 파고들어 버리는 자책의 구덩이는 혼자 빠져나올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 방에서 나오기까지만 1년이 걸렸습니다. 그사이 본래 일하던 이들 대부분이 떠났어요. 저와 파반이 남아 열심히 그분을 보살피고 기다렸습니다. 다행히 나와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왜 로제가 자리를 잡아 가면서 이 이야기를 꺼내 주었는지 알 것같았다. 잔뜩 부루퉁했던 입술이 쏘옥 들어갔다. 그에게 화를 낼 때가 아니었다.

엄청나게 걱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보러 못 오는 마음이 무엇인지……. 사샤는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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