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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61화 (61/128)

61화

마물은 턱, 턱, 발소리를 내며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사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마물을 바라보았다.

집에서 쓰는 식칼 같은 걸로는 상처도 못 줄 것 같은 거친 가죽과 기괴한 모습, 그리고 그 마물의 희번덕한 회색 눈동자가 그녀를 온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키이…….

“사샤!”

마물의 입이 벌어져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침이 뚝뚝 흐르는 그 어마어마한 이빨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키이아아…….

그런데 아까 공격적인 소리를 내던 마물의 소리가 지금은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입을 벌리는 게…… 마치 날 잡아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키익, 키이…….

“뭐라고……? 난 알아들을 수가 없어…….”

“떨어져, 사샤!”

마물의 입과 눈을 번갈아 바라보며 뭔가를 찾으려던 사샤는 어느새 가까워진 카일러의 목소리에 눈동자를 휙 돌렸다.

“하앗!”

키야아아아악!

사샤에게 집중하고 있던 마물은 크게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카일러가 찔러 든 검날로 피를 뿜으며 괴로워하는 마물을 보는데 사샤가 눈물을 주륵 흘렸다.

키악!

“꺅!”

하지만 고통을 이기지 못한 마물이 몸부림을 치다 날개로 그녀를 퍽 때려 버렸다. 그 힘의 여파로 옆을 데굴데굴 구른 사샤는 마물의 발버둥이 닿지 않는 곳까지 벗어날 수 있었다.

카일러는 그녀가 멀어지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깊게 찔렀던 검을 훅 빼 들고 쏟아지는 피를 온몸으로 받으며 다시 그 마물의 심장으로 검을 깊게 찔러 올렸다.

순식간에 나타났던 마물들은 순식간에 그렇게 처리되었다. 바닥으로 쓰러진 마물의 목까지 잘라 확실히 숨통을 끊어 놓은 카일러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사샤에게로 달려왔다.

피로 범벅이 된 겉옷을 얼른 벗어 던지고 바닥에 내팽개쳐진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사샤!”

“나 괜찮아요…….”

사샤는 미간을 찌푸린 채 우선 괜찮다는 말부터 꺼냈다. 자신을 너무도 소중하게 감싸 올리는 그의 팔에 대답을 해 주고 싶어서였다.

그가 자신에게로 달려올 때의 창백한 얼굴이 빛의 잔상처럼 남았다. 공포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를 보던 내 얼굴도 그랬을까. 그랬다면…… 그가 얼마나 무서웠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온몸이 뻐근했고 마물에게 맞은 팔을 조금 움직이기 무서울 정도로 아팠지만 남은 한 팔을 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카일러…….”

“아픈…… 아픈 곳을 말해. 이대로 널 안아 줄 수가 없다. 어서…… 어디가 아픈 거야, 응?”

이렇게 다급히 말하며 더듬을 줄도 아는 사람이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사샤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말했다.

“왼쪽 팔만 좀 봐줄래요? 아까 맞은 자리인데 많이 아파요.”

사샤는 애써 웃으며 그에게 말을 해 주었다. 정말 거기 말고는 따로 고통이 느껴지는 곳은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왼쪽 팔을 누르고 만지고 살짝 들어 보며 상태를 확인했다. 절로 아 소리가 날 정도로 아팠지만 죽을 만큼 아픈 것은 아니었다.

“다행이다……. 부러지진 않았어. 살짝 금이 간 것 같다.”

다행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하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지 않았지만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말에 사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 걸을 수 있어요. 어서 여기를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카일러는 꾹 입술을 다물고는 왼팔을 배 위에 올리게 한 다음에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의 가슴에 기댄 쪽은 오른팔이라 아픈 곳은 건드리지 않은 채로 그의 품에 거뜬하게 안겼다.

“카일러 저는 내려…….”

“가만히 있어라. 내가…… 안전하게 데려다주겠다.”

사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까의 그 일이 아무래도 마음에 남은 듯했다. 사샤의 기억에도 그의 얼굴이 사진처럼 남아 버렸으니 그는 오죽할까.

두 사람의 데이트는 그렇게 끝이 났다.

“공작님!”

숲의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딜런은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에게로 달려왔다. 마물의 소리가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들리지 않을 만큼 깊이 들어갔었던 듯했다.

잠깐의 소란이 이어졌지만 그들은 곧 마차에 올랐고 공작저로 향했다.

*

공작저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공작은 한 달에도 몇 번 마물을 토벌하기 위해 나갔다 들어오지만 안주인이 외출했다가 마물에게 다쳐서 돌아왔다는 것은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카일러는 이 이야기가 밖으로 새지 못하도록 입막음을 시켰다. 우할린 숲에서 마물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에 우할린 숲으로 기사들을 보내 며칠 동안 상주하며 일반인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하면서 마물이 또 나타나지 않는지 살펴보도록 했다.

“그날 이후로 마물을 숲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주변인들의 제보에 따르면 바깥쪽까지는 아니지만 최근에 간혹 숲 깊은 곳에서 마물의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산맥과 가까운 곳인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이전에는 넘어오지 않던 숲길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딜런은 지그시 두 눈을 감고 있는 카일러에게 우할린 숲에 다녀온 보고를 마쳤다.

카일러는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두 눈을 감고 그의 보고를 들었다. 보고를 마치고 나서도 미동도 없고 대답도 없는 그를 보고 있던 딜런이 몇 번 입을 달싹인 끝에 말을 꺼냈다.

“공작님, 부인께선…… 어떠십니까?”

그저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카일러가 꾸욱 질끈 눌러 감았다.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그 공포를 잊을 수 없었다. 마치 어렸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느낌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이제 좀 많이 흐릿해져 있었다. 그때의 공포도 약간 막연한 느낌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날카롭게 되살린 사건이었다.

그의 반응에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가만히 있던 딜런은 나가려던 발걸음을 다급히 돌렸다. 어떻게 이걸 까먹고 나가려고 했던 거지. 사샤에 대한 걱정에다가 보지 못한 카일러의 반응에 중요한 보고 하나를 놓칠 뻔했다.

“공작님.”

그가 다시 카일러를 불렀다. 미간의 주름 없이 다시 무덤덤해진 얼굴에 딜런은 놓칠 뻔했던 보고를 이었다.

“게라넬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마물이 거기까지 내려온 걸 보니 그쪽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알아봤습니다만…….”

“뭐가 어떻게 심상치 않다는 거지.”

카일러가 입을 열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그렇게 말한 그는 게라넬에겐 지금 크게 관심이 없는 듯이 보였다.

“마물들을 통제하는 게 그들의 일인데 그게 안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간혹 숲으로 넘어가는 마물들이 생기게 됐다는 겁니다.”

“쯧, 그러니까 통제만 할 게 아니라 문을 닫는 방법이라도 연구를 해 놨어야지.”

카일러가 드물게 비난의 목소리를 내자 딜런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이 생겨나는 이유를 밝혀낸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마물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마물이 생성되는 것을 마계 문이 열려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들이 통제를 오래 해 왔기 때문에 그나마 마물들이 산맥에만 머물 수 있었던 것인데, 큰일이군.”

“그리고 그것이…… 혼란한 틈을 타 안을 조금 더 파고들어 보았습니다만…….”

딜런의 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쪽에서 당황할 만큼 예측 불가능한 일이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당황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특히나 그들에겐 비단 그날 하루의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

카일러는 지금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따로 있었으나 허투루 들을 수는 없는 소식이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그날의 일을 되새기고 있던 카일러는 그저 의식적으로만 말을 듣고 있었다.

“게라넬의 수장이 딸을 낳았던 20년 전쯤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그 딸이 시집을 갔는데…… 그랬더니 또 그때와 비슷한 일이 생기고 있다고, 신기해하더랍니다.”

“딸, 20년 전…….”

게라넬의 마물 통제는 신관과 마법사의 힘이 결합된 어떤 것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어서 대외적으로 그 비법이 새 나간 적도 없었다.

그들을 제외한다면 마물은 죽이거나 당하거나였다. 그런 게라넬에서도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생겼는데 그 이유를 추측할 만한 일이라곤 수장의 딸과 관련된 일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예. 그땐 이베른 후작저 쪽의 능선을 타질 않아 고생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당시엔 그쪽에만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다고…….”

뭔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별 상관도 없고 그냥 그런 일이 또 일어나고 있다는 말일 뿐인데 놓치면 안 되는 무엇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카일러의 직감이 움직였다.

“그리고, 이건 보고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일이긴 합니다만, 우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딜런은 그런 자체 판단이 매우 정확한 편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하는 것들까지 구구절절 보고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굳이 덧붙이겠다는 말에 눈에 주었던 힘을 풀고 귀를 기울였다.

“예전에 그 수장의 딸이…… 마물을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카일러는 그 말에 두 눈을 번쩍 떴다. 마물을 맞닥뜨린…… 여자.

그의 반응에 딜런은 속으로 놀랐지만 다시 말을 이었다.

“아주 아기였을 때라고 합니다. 수장의 집 근처로까지 마물이 나타났는데, 그 아이와 마주쳤다고 합니다. 그러고 자세한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그 아이가 그러고도 아직 잘 살아 있어서 신기하다는 말을 했었습니다.

그 수장의 딸이 태어나고 가장 마물이 통제가 안 되던 시절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 합니다. 그걸 멀리서 직접 본 사람이라고 하면서요.”

명확한 사실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된 상황인지도 모르지만 카일러는 딜런을 바라보며 그가 전한 말을 곱씹고 또 곱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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