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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60화 (60/128)

60화

“여기서 보는 것도 좋지만…… 좀 걸어도 돼요? 이 물줄기를 따라 거슬러 가 보고 싶어요.”

“길이 험하지 않으니 상관없다. 자.”

한참 하는 일도 없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사샤가 자리에서 번쩍 일어났다. 그녀가 하자는 건 뭐든 해 줄 듯이 그는 손을 내밀었다.

찬란하던 햇살이 비스듬히 나무를 비껴 들어치기 시작하고 사샤는 그와 함께 물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간혹 멈춰 서 물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호기심에 돌멩이 하나를 들어 던져 보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컴컴하고 음침한 숲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통 숲이 그렇긴 하다. 여기는 침엽수가 많아서 해가 잘 드는 편이라 밝은 것이다.”

사샤가 말을 꺼내면 그는 분명히 대답을 건네었다. 그가 앞서 걷든 사샤가 그를 앞질러 걷든 놓지 않은 두 손으로 서로를 이어 주듯이 두 사람의 대화도 그렇게 맞물리고 멈췄다가 다시 이어지곤 했다.

위로 올라가자 시냇물보다는 약간 계곡 같은 느낌도 나고…… 정말 여러모로 매력이 넘치는 곳이었다.

“이제 다시 돌아갈까요? 너무 멀리 온 거 같아요.”

문득 올라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그냥 계속 걸어온 숲길처럼 보여서 정신이 번뜩 들었다. 물길의 끝이 궁금했던 것인데 생각보다 물길은 그 모습을 조금씩 변화하며 이어지고 있었다.

질리지도 않고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는 듯 카일러의 손을 꾸욱 잡았다.

“이렇게나 물을 좋아하면…… 집 옆으로 호수라도 하나 파야 하나.”

카일러가 그녀의 손길에 돌아서며 그렇게 말하자 사샤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서로를 보며 고요히 웃음 짓는 일은 많았지만 소리 낸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 웃음소리에 카일러가 미간을 슬쩍 좁혔다.

“카일러도 농담 할 줄 아네요. 호수를 어떻게 파요.”

사샤는 그의 팔을 당겨 이번에는 제가 앞장을 서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마음은 살짝 급해졌지만 먼 길이라는 걸 감안해 속도를 내지는 않았다.

“농담…… 물론 할 줄 안다. 하지만 지금 한 건 농담 아니었어. 호수 정도는 팔 수 있지. 여기와 비슷하게 물이 흐르게도 할 수 있다.”

“에이, 설마요…….”

설마, 했지만 말끝을 흐리는 것이 약간 자신감이 없어지기는 했다. 음, 한 나라의 공작이 자기는 재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짜로 그가 말한 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사샤는 입을 합 다물었다.

“그런 거 없어도 돼요. 가끔 이렇게 나와서 함께 걸어 주면 돼요. 그건 해 줄 있죠?”

“호수를 만들어 달라고 해도 괜찮다. 그대와 함께 물을 보고 있는 것도 즐거울 것 같군.”

약간의 긴장을 담아 그렇게 묻자 그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해 주는 그의 무뚝뚝한 다정함이 너무 좋았다. 절로 올라가려는 광대를 잡아 내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지금 이 정도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가 이렇게 대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갖지 못했던 것들에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마음을 받는다는 것도 가슴을 채우는 것 중에 하나였지만 그 마음을 주는 이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과거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도 나도 쉽게 드러내지 못할 과거를 가진 듯하다는 그 얼마간의 동질감만 있으면 된다. 지금 이 감정을 탄탄하게 만들고 그걸 유지해 나가기만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지지 않을까.

키이이이-!

그때였다. 저 멀리서 한 번도 듣지 못한,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두 귀를 막았지만 그 소리에 두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사샤가 소리가 난 뒤를 돌아보자 카일러가 굳은 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사샤의 시선이 그 너머 허공을 헤매고 있는 사이 다시 한번 그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 날카로운 무엇으로 공간을 자르는 것 같은 기분 나쁘고 미묘한 그 소리에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카일러를 찾았다.

소리가 아까보다 더 가까워졌다.

“뛰어라.”

“예……?”

“뛰어!”

카일러는 단숨에 그녀에게 다가와 사샤의 허리를 낚아챘다. 사샤는 지금 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평소보다 좀 더 편한 신발을 신고 있다 하지만 드레스를 입은 여자이고, 심지어 천천히 산책을 했다고 하지만 다리를 계속 움직여 온 상태였다.

지체 없이 그녀를 허리춤에 붙여 든 채로 달리기 시작했다.

“읏, 지금 이 소리, 뭐예요?”

사샤는 짐짝처럼 그의 팔에 들린 채 달리는 발에 따라 덜컹거리며 힘겹게 말을 걸었다. 그가 이렇게나 급하게 자신을 들고 달리는 상황 자체가 너무 두려워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마물이다.”

사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도 죽이기 힘들어하던 마물의 소리가 저편에서 또 저편에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가…… 방심했다. 위험하지 않은 지역이라고 네 손을 놓지 않고 있었어. 그럼…… 안 되는 거였다.”

엄청난 속도로 뛰고 있으면서도 그는 흔들림 없이 말을 전달했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의 의미까지는 잘 전달되지 않았다.

돌멩이가 튀고 나뭇가지가 얼굴을 살짝 스치기도 했다. 그는 열심히 달렸으나 마물의 울음소리는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 정도의 속도라면 다리로 달리는 게 아니라 날아다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던 찰나, 쐐애애액!

갑자기 무언가 공중에서 쏘아져 내려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허리를 감싼 그의 팔에 불끈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머리를 감싸고 몸을 최대한 둥글게 말아라.”

“예……?”

어리바리한 대답을 하면서도 사샤는 반사적으로 그가 말하는 대로 머리를 팔로 감쌌다. 그리고 손깍지를 끼자마자 몸에서 공기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처음에 그게 무슨 감각인지 몰랐다. 허리에서 그의 팔의 감각은 없어지고……. 날 던졌어?

던져진 걸 깨달은 사샤가 다리를 최대한 당기는 그때 알 수 없는 덤불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얇은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이 모여 일종의 쿠션의 역할을 해 주었지만 결국 땅에 부딪친 몸에서 엄청난 격통이 일었다.

“바위 사이로 숨어!”

키이이이악!

그녀가 떨어짐과 동시에 카일러의 외침과 함께 마물의 소리가 정면에서 들려왔다. 얼마나 멀리 던진 건지, 저 멀리에서 마물의 입을 검날로 막고 있는 그가 보였다.

이게 무슨……. 갑자기 나타난 마물에 사샤는 혼을 놓을 지경이었다.

그가 분명히 바위틈으로 숨으라고 소리를 질러 줬음에도 그 정체를 확인한 사샤는 온몸이 굳어 버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약간 드래곤과 익룡을 섞을 듯한 기이한 외형에 날개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크기는 카일러보다 조금 큰…… 그리고 그와 비슷한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안 돼…….”

위기의 상황이었지만 사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에 절망했다. 몸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도 잠깐 동안은 그가 알려 준 대로 바위틈으로 가서 숨을 정신조차 제대로 차릴 수가 없었다.

그의 다리만큼이나 길고 큰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데 처음에는 엇비슷한 듯했던 힘에 바로 차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아 튀어나올 듯이 뛰어 대던 게 아파질 지경까지 가는 사이 싸움은 점차 그 차이를 확연히 드러냈다.

키야아아아악!

“하아!”

푸슉, 검이 마물의 날개를 찔렀다. 그리고 귀에 거슬리도록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버둥대는 날개를 놓치지 않고 검을 가로질러 날개의 가죽 같은 부분을 확 그어 버렸다.

마물의 발버둥은 더 심해지고 마물의 주둥이가 그의 얼굴을 삼킬 듯이 확 다가왔지만 그는 바깥으로 삐치게 그었던 검을 다시 당기며 허리를 숙여 주둥이를 피하고 바로 가슴을 아래서 위로 찔러 올렸다.

한 번 찌르는 것으로는 잘 죽지 않는다 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카일러는 찌르고 베고 틈이 나면 또 찌르며 계속해서 검을 놀리고 있었다. 그사이 그 마물로부터 피가 튀고 마물의 비명이 숲속을 어지럽게 울렸다.

그래서 그 소리에 다른 소리 하나가 묻혀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차아!”

카일러는 가슴을 찌른 검을 양손으로 쥐고는 짧은 기합과 함께 힘차게 아래로 그어 내렸다. 그 최후의 일격으로 마물은 비명을 지르고 힘없는 날개를 퍼덕이며 뒤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 위로 올라타 목을 베어 버리는 것으로 확인 사살까지 마친 카일러가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쉰 뒤 뒤를 돌아보았다.

“사샤.”

“카…… 카일러.”

멀리 던져 놓은 그녀가 입을 움직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고 카일러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덤불이 있던 곳까지 내려왔고, 제대로 던졌고,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의 말대로 머리를 감싸고 다리를 웅크리는 것을 보았으니 다쳤어도 크게 다치진 않았을 것이다.

“괜찮은가, 미안하다. 던져……서…….”

키야아아악!

그때 마물의 소리가 울렸다. 사샤는 아까 그가 죽인 마물이 살아났나 싶었고, 카일러는 얼굴이 창백해져 버렸다.

그 소리가 울리는 것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쐐애애액!

아까도 들었던, 뭔가 쏘아져 내려오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카일러는 이를 악물고 뛰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제게 달려오고 있는 카일러를 두 눈 가득 담고 있는데 그녀의 시야 바깥쪽에서 시커먼 것이 그보다 더 빠르게 그녀에게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쾅!

“사샤!”

그녀의 지척에서 뭔가 떨어져 내려 땅을 후려쳤다. 폭발음 같은 소리와 흙먼지가 먼저 그녀를 덮쳤고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던 사샤는 조심스럽게 팔을 내렸다.

그는 아직도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왼쪽으로는…….

키이이익!

새로운 마물 한 마리가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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