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하지만 그러는 사이 아가씨들 사이에서 마물 이야기는 끝이 나고 말았다. 다시 귀를 기울여 봐도 수도의 어느 귀족 영애가 누구와 눈이 맞았다든지, 아니면 어느 영식이 제일 멋있는지 그런 이야기만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지, 아가씨들이 마물에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알고 있는 정보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더 알아보려면 결국 자신이 알아보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마물과 관련이 있는 것은 눈앞의 카일러와 이 몸의 아버지 이베른 후작뿐이었다.
과거엔 아무 신경 안 쓴다고 말해 놓자마자 갑자기 이 미묘한 단어들의 조합이 너무 신경이 쓰여 버리게 됐다. 미간을 찌푸렸던 사샤는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일러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지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 카일러 아스파라거스 싫어하는구나.
“그것도 다 먹어요. 고기랑 같이 먹다 보면 맛 괜찮을 거예요.”
마치 엄마가 반찬 투정하는 아이를 바라보듯이 이야기하자 그는 잠시 접시를 응시하더니 포크에 아스파라거스와 고기를 한 번에 찍어 올려 입에 합 넣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세상 우아하게 다루는 그의 손이 아스파라거스를 불만을 가득 담아 쿡 찍어 올리자 그 모습이 뭐랄까 조금…… 귀여웠다.
지금 당장은 그에게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정 궁금한 거면 나중에도 다시 생각이 나겠지. 그럼 그때 가서 다시 고민해 봐도 늦지 않을 것이다.
괜히 뭔가를 들쑤셔서 문제를 만든다거나 그를 곤란하게 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잘 먹었습니다.”
“벌써 다 먹은 건가.”
“벌써라니요. 시켜 주신 거 접시가 다 비었는데요?”
그녀가 말을 꺼내니까 입을 열었다가 뒤늦게 접시를 내려다본 카일러는 아, 하는 소리 하나만 남기고 조용해졌다. 쿡쿡 웃은 사샤가 그의 포크에 찍혀 있는 채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일러 부족한 거 같은데 더 시킬까요?”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마지막 음식을 모두 씹어 삼킨 뒤에 포크를 내려놓았다. 오물오물 티도 잘 안 나게 씹으면서 그녀를 계속 응시하고 있는 것에 오히려 사샤가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종이가 보였다. 하녀들이 고심해서 골라 준 데이트 코스였다.
“식사 다음은 어디지? 거기 적어 온 것 같은데. 식당이 만족스러워서 다음도 기대가 되는군.”
그는 끌려다니는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적극적이었다. 그의 시선도 벌써 그 종이에 닿아 있었다. 굳이 이대로 다 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들의 로망이 담긴 곳이라 하니 아마 알음알음 데이트하기 좋다고 소문이 난 곳인 듯했다.
그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종이를 펼쳐 들었다. 그곳에는 생각지 못한 것이 담겨 있었다.
“우할린 숲……?”
“숲이라고?”
사샤가 읽은 것을 그대로 소리로 내자 카일러가 되물었다. 왜지? 가면 안 되는 곳인 건가?
그녀가 의문을 담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입술을 다문 채 앉아 있던 그가 고개를 살랑 저었다.
“우할린 숲은 서북쪽에 있는 산맥 아래로 있는 숲이다. 식당을 나가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게 산맥이고 능선이 낮아지는 곳으로 눈길을 돌리면, 그곳이 숲이다.”
아아……. 전에 지도를 살펴볼 때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이베른 영지와 이그노트 영지를 막는 산맥과 그 아래 숲, 그걸 지나면 수도가 있었다.
“거기에 가면…… 굉장히 아름다운 시냇물이 흐르고 그 근처에 쉴 수 있게 정자가 만들어져 있대요.”
과연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소였다. 그에게는 그저 나무가 심어져 있고 흙바닥인 곳이겠지만.
그의 눈치를 살짝 보았지만 그는 표정 없이 그녀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떡하지, 가자고 해도 될까.
사실 사샤는 살짝 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럼 갈까?”
“에?”
“그 쪽지가 오늘의 데이트 계획 아니던가? 가자, 우할린 숲으로.”
그는 씨익 웃으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저 미소를 본 것만으로도 오늘 번화가로 나온 목적을 다 이룬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어머어머! 방금 봤어? 허억! 너무 잘생겼다아……!”
“왜? 왜? 뭐가?”
“나도 봤어! 세상에…… 저렇게 잘생겼으면 진짜 공작님이신 거 아냐? 아니지, 공작님이 저렇게 웃으실 리는 없잖아.”
그의 미소에 홀라당 넘어가 버린 것은 사샤만이 아니었다. 아까 수다를 떨고 있던 아가씨들이 소리 죽여 꺅꺅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요 뭐…… 이해해요, 저런 얼굴을 우연히 식당에서 목격했다면 그런 반응이 너무나도 당연한 거지.
“나가요, 그럼.”
사샤는 그의 말에 밝게 웃음으로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가 움직이자 저쪽 테이블의 아가씨들도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 테이블에 가까워지자 사샤는 은근슬쩍 그의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을 감싸 잡자 내 손이 꽉 차서 뭔가 안정감을 주었다.
다시 그녀들의 어머어머 하는 소리가 들렸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사샤는 그 챙 아래 얼굴을 숨겼지만 그들의 반응은 제대로 느껴졌다. 손을 뿌리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는 찰나의 생각이 드는 순간,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 설마…… 생각만 했을 뿐인데 진짜 그렇게 할까 싶은 생각에 심장이 엄청나게 두근거렸다.
그런데 앞서 걷던 그가 그녀를 돌아보고 잡힌 자신의 손을 바라보더니 피식 입꼬리를 올리고는 손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 힘을 따라 한 걸음 두 걸음 걸어가자 그가 손을 놓았다. 아…… 역시 바깥에서 그러는 건 조금 그런가. 생각하던 찰나였다. 괜히 아가씨들 앞에서 객기를 부려 가지고…….
“꺗.”
“어머어머.”
그런데 그 아가씨들의 비웃음이 아닌, 다시 한번 놀라는 비명이 들렸다. 그가 놓은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던 것이다. 단단한 팔이 그녀를 감싸 주고는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세상에…… 방금 봤죠. 이그노트 공작님……!”
“허억! 나 착각한 줄 알았는데? 진짜 맞아요? 헉!”
뒤에서 아가씨들이 흥분해서 꺅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걸로 기분 좋아 하고 있는 내가 참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좋은 건…… 좋은 거니까.
“먼저 손을 잡아 주는 거 꽤 좋은데.”
게다가 그런 달달한 말까지 해 주니까 제가 보기에도 이그노트 공작 같지가 않았다.
“우리 데이트 나왔으니까. 그쵸?”
수줍게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바짝 붙어선 채 천천히 번화가를 걸어갔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함부로 말을 거는 사람은 없이 그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지나쳤다.
아마…… 그가 어떠한 여인을 다정하게 감싸고 걷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다른 이의 시선을 딱히 신경 쓰지 않고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사샤는 식당에서 나오기 전까지 사실 그런 신경을 매우 쓰고 있었다.
그의 곁에 있는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 자신들의 영지를 돌보는 과묵하고 검술 실력도 권위도 높은 이그노트의 안주인으로…… 자신을 제대로 받아들여 줄 것인지에 관해서 걱정이 많았던 것이다.
자신이 그냥 후작저의 여인이었다면 이런 시선과 인사 같은 것들에 태연할 수 있었을 텐데. 오히려 인사를 건네 오면 당당하게 그들과 눈을 맞추며 우아한 척 인사를 받아 주었을 텐데.
“마차에 올라라. 숲까지 걸어가는 것은 조금 무리일 테니까.”
아, 생각에 잠겨 있느라 그들이 다시 마차로 돌아왔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라타자 말이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마차는 초반에만 조금 흔들린다 싶더니 곧 편안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우할린 숲…… 숲이면 저 이 드레스 괜찮은 거예요?”
숲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제 드레스가 걸어 다니기에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치맛자락이 풍성한 드레스다 보니 걱정이 된 것이었다. 나무 사이를 걷다가 치마가 걸려 찢어지면 어떡하지?
“그곳에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군. 숲 초입에는 산책로가 잘 돼 있다. ……시냇물은 좀 더 들어가야 하지만 치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안심이지. 옷이나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하녀들이 그런 부분을 신경 안 써 줬을 리가 없었던 건데. 조금 안심한 사샤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 꽤 돌아다니고 있는 번화가의 모습이 좋았다. 수도와 멀지 않은 곳이라 꽤 활성화된 도시라는 것이 보였다.
여기는 그냥 살다 보면 마법이나 마물 이런 것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였다. 생각 안 하고 있다 보면 어느 중세시대의 역사 교과서엔 나오지 않는 어느 왕조로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사이에 마물이라는 것이 포함이 되자 다른 차원, 책으로나 보던 세계로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가 마물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때도 실감하지 못했던 걸 다른 이들의 대화 속에서 듣고 자신의 가문에까지 이야기가 뻗어 나오자 그걸 한층 더 실감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것을 들었을 때 더 충격을 받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의 선에서 끝났을 이야기가 자신에게로 까지 뻗어 온다는 느낌…….
“그러고 보니 시간 무리해서 빼는 건 아니에요? 할 일이 많을 텐데.”
사샤는 걱정의 말을 꺼냈지만 카일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하루 시간도 못 뺄 정도로 바쁘게 사는 것은 아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으음, 사샤는 살짝 못 미덥기는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런 여유를 함께 즐기는 일이 거의 없었을 만큼 바쁘게 지냈기 때문이다.
“사샤와 시간을 이렇게 보내려면 더 열심히 일해야겠군.”
이젠 말끝에 웃음을 짓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 멋진 미소를 보면서 사샤도 마주 웃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