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그의 침대에서 맞이하는 아침이…… 약간은 일상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침대에서 눈을 뜨는 것이 가장 익숙한 일일 테지만 이렇게 알몸으로 그의 품에서 눈을 뜨는 것은 또 다른 매력이 있는 일이었다.
카일러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제 그에게 먼저 내 몸을 기대고 만져지길 바라면서 결론이 지어져 버렸다. 나는 이 사람을 정말 사랑하고 있었다.
그와 그의 사람들은 나를 엄청 따르게 만들어 주었고, 그 안에서 나는 생존도 잊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솔직히 사교계를 포기한다면 아마 그녀는 싸울 일도 없이, 따로 배울 일도 없이 그렇게 그냥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도 그녀를 건드릴 일이 없을 것이고 명확하게 그의 안에서 지낼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제국에 아주 깊게 관여가 되어 있는 자로서 그냥 옆에 서 있기만 하기엔 짐이 너무 커 보였다. 나는 지켜지고 싶은 것보다 도와주고 싶었다.
“일어났군.”
머리 위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에 문득 다시 열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자다 일어나선 이게 무슨 일이람. 사샤가 살짝 허둥대는 사이 맞닿아 있던 그녀의 몸이 따끈해지는 것을 느꼈는지 그가 쪽 이마에 입을 맞춰 주더니 그녀를 마주 안은 자세 그대로 제 몸을 똑바로 누였다.
똑바로 누운 그의 위에 마치 이불처럼 덮여진 몸이 묘하게 마찰했다. 그는 그런 거는 신경 안 쓰는 것처럼 무심하게 팔을 척 감싸 안고 구는데 어찌나 편안해 보이는지…….
“고, 공작님 아침부터…….”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 그렇게나 힘들 일인 것인가.”
사샤가 당황해서 내려오려고 하는데 아래에서 대답이 진지하게 돌아왔다. 아니, 쑥스러워서 한 번도 제대로 불러주지 못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 신경 쓰지 말라고요. 아니 그보다 내려 줘요.”
하지만 카일러는 그녀의 말대로 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맞닿아 눌리는 피부의 감촉들을 느끼며 그녀의 등허리도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다시, 불러 줘.”
“카일러…….”
“응, 사샤.”
그 이름 불러 주는 것이 그렇게 좋은 건가, 지난번에 지나가듯이 제대로 몇 번 불러 주지 않았나 기억하는 것이었다.
그는 손을 움직여 팔이 닿는 모든 곳을 매만지고 있었다.
“하아……. 아침부터 정말 이러기예요?”
“몸이 먼저 뜨거워진 건 사샤인데.”
씨익 미소를 담는 얼굴이 아침부터 멋진 것은 사기다. 정말 거짓말 같은 외모까지 겸비한 그를 볼 때마다 복이 터진 것인지 아니면 뭔가 내놓아야 할 게 있는 것인지 불안에 떨릴 때가 있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이고 밤을 보내면서 오히려 그래서 더 믿음이 생겼달까……. 처음 하는 여자의 어리석은 믿음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일 테지만…… 아무튼 카일러는 그랬다. 뭘 해도 믿음직스러운 남자.
“오늘 뭐 하실 거예요? 저랑…… 놀아요, 카일러.”
쑥스러워 내려오려고 발버둥 치던 사샤가 도망가려던 것을 포기하고 몸에 힘을 쭉 뺐다. 그의 위에 널브러진 사샤가 힘 뺀 목소리로 그의 귀 근처에서 속삭였다.
“……놀아?”
생소한 단어인 양 그가 그렇게 되뇌었다.
“데이트……라고 알아요?”
저 단어가 여기에서도 쓰이는 말인지 몰라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면서 대꾸했다.
“그래, 안다. 남녀가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거지.”
대답을 끝내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카일러는 갑자기 손을 올려 허리를 쓸어 올리다 가슴을 쥐었다. 몸 사이로 들어온 그의 갑작스러운 힘에 놀란 사샤가 그의 어깨를 짚고는 상체를 젖혔다.
“가, 갑자기…… 아침인데 또 하려고요?”
“……남녀가 만나서 좋은 시간…… 보내자 했으니까.”
아, 쿡쿡. 이 남자가 데이트란 단어를 들어 보기만 하고 실제로 뭔지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아마 쉽지 않을 것이지만…… 아무튼 그녀가 만들려도 했던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도 데이트일 수 있겠지만 이 정도 말고 다양하게 많거든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모든 시간에 함께하는 거예요.”
음, 하는 소리를 낮게 내던 그가 또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위에 올려 둔 몸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좋아. 무엇이든지 좋으니 그 데이트, 같이하지.”
무슨 혼자 할 일에 대해서 허락받는 것 같은 느낌에 쿡쿡 웃던 사샤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일단 피곤해서 더 자고 싶어요. 대체 밤에 몇 번을 해야 속이 풀리는 거예요…….”
그의 손길이 흥분되는 한편 피곤이 더해지자 너무나도 기분 좋은 쓰다듬었다. 그래서 심신이 지킨 그들을 구제해 줄 단 한 명의 그녀가 온다.
“네가 사랑스럽지 않을 때까지…….”
다시 잠에 들어 색색 숨소리를 내고 있는 사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카일러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
어느 부부의 아침이 이와 같을까. 평범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아침의 시작이었다.
사샤는 한숨 더 자고 일어나서니 번쩍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심지어 오늘은 제가 먼더 데이트를 신청한 날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가장 문제였고 사샤는 무난하게 번화가를 선택했다.
“오늘 공작님과 함께 번화가에 데이트 나갈 거야, 로제, 그러니까 우리 없을 때 잘 놀고 있어.”
아침 식사 시간에 건네는 말이 로제에게는 거의 폭탄 급의 발언이었던 모양이었다. 들고 있던 찻잔을 떨구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그렇게 놀랄 일……이겠지, 참…….
그동안의 카일러를 생각한다면 정말 놀랄 일이 맞기는 했다. 로제 정도의 나이쯤 되면 아마 제가 키운 아들이 첫 데이트를 나간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정도의 느낌일까?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사샤가 로제를 올려다보려는데 그녀가 문득 사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 공작님께서 데이트의 뜻을 제대로 알고 계신 걸까요.”
사샤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웃음이 빵 터져 버릴 뻔했다. 이렇게 훅 공격이 들어오더니 로제가 제법인데. 사샤는 바로 곁에서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카일러에게는 눈웃음을 보내 준 뒤 로제를 향해 속삭였다.
“미묘하게 모르는 것 같길래 알려 주려고 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어떻게 걱정을 안 하냐는 얼굴이 되는 걸 보고 있자니 정말 그녀가 엄마같이 느껴졌다. 이런 게 엄마가 맞다면 말이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십시오. 공작님, 사샤 님께 실수하시면 안 됩니다.”
“누가 누구에게 부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군.”
카일러는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고개를 슬쩍 저었다. 하지만 눈동자에 고인 반짝이는 미소가 그가 지금 이 상황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아침 식사 시간은 미묘하게 활기찬 분위기로 이어졌다. 대화를 많이 나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러 사람이 함께 한 것도 아니었지만.
언제나 이런 분위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들뜬 마음에 체하지 않도록 꼭꼭 씹어서 먹었다.
“이렇게…… 나가면 되는 것인가.”
카일러는 단정한 옷을 입고 서서는 그녀에게 확인을 구하듯 바라보았다. 데이트를 나간다는 말에 저들이 더 신난 미니와 니나가 발 벗고 나서서 카일러의 데이트 룩을 골라 준 것이다.
자신의 옷을 바라보며 정말 괜찮은지 묻는 그의 모습에서 왠지 편안함이 느껴져 사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 번화가 나가는 거 기대돼요. 카일러는 가 본 적 있어요?”
서로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고 마차에 오르며 사샤는 들떠 있는 자신의 상태를 굳이 감추지 않았다.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예 그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따뜻하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자연스럽게 맞닿은 몸이 서로에게 온기를 전해 주고 있었다. 그 온기는 역시 놓칠 수 없는 것이어서 사샤는 더 바짝 붙어 앉았다.
“역시…… 번화가는 됐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떤가.”
제게로 자꾸 몸을 부대껴 오는 사샤에게 카일러는 진지하게 물었다. 아직도 어젯밤의 감각의 여파가 잊히지 않은 탓이었다.
“에이, 아니에요. 낮에는 데이트! 몸의 데이트는 이따 밤에 해요……. 알겠죠?”
피식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은 카일러가 그녀의 이마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춰 주었다.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번화가에 도착했다. 덩그러니 마차에서 내려진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기만 할 뿐 섣불리 발을 내딛지 못했다.
“나는, 번화가를 두 발로 걷는 것이 처음이다.”
이곳에 볼일은 없었다. 일이 없을 때엔 저택 안에서 두문불출하는 시간이 많은 그로서 번화가는 그냥 지나가는 통로? 길목? 그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다.
사샤에게도 익숙한 곳은 아니었기에 잠시 혼란이 있었으나 사샤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럴 줄 알고 하녀들에게 부탁해 놓은 것이 있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어 놓은 종이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펼치자 번화가의 지도와 데이트하기 좋은 곳이 표시가 되어 있었다.
“우선은 여기예요, 카일러.”
“……여기? 여기는 무얼 하는 곳이기에.”
“식당이에요. 우리 이제 점심 먹을 시간이이요.”
“오…….”
로제가 없이 먹는 점심이라고 하니 왠지 모르게 기대되는 무엇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건강을 챙겨야 하는 사람이기에 로제의 간섭이 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맛있는 집이었으면 좋겠군. 사샤는 보면 은근히 먹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런 걸 눈치채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녀와 식사한 적도 많이 않았고 여기는 대략적으로 주어지는 1인분의 양이 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에, 맛있었음 좋겠어요.”
괜히 수줍어지는 기분에 발걸음은 더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