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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54화 (54/128)

54화

“저, 사샤 님. 햇볕이 너무 강해요. 여기 계속 계시면 피부가 다 타고 아플 거예요.”

회양목을 넘어 사샤에게로 다가간 코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팔을 들어 눈을 가린 채로 누워 있던 그녀는 코니의 말에 슬쩍 움직였다. 잠에서 깨어난 것이 분명했지만 사샤는 바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계속 여기 계시고 싶으시면, 차양이라도 설치해 드릴게요. ……잠시만요.”

조금 더 기다려 보았지만 대꾸가 없는 탓에 얼른 가서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들어가자, 코니.”

사샤는 자고 있던 게 아니었던 듯 멀쩡한 목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움직이는 그녀를 보고는 코니가 화들짝 올라 테이블 위에 놓인 티 웨어들을 챙겨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질 거 같아요. 오늘 무슨 일 있으셨어요?”

코니가 뒤에서 조그맣게 물어보자 사샤는 걸음을 멈추고 문득 공작저를 올려다보았다. 4층짜리 건물에 웅장함까지 갖추고 있는 그 건물을 뒷문 쪽에서 바라보는 건데도 이미 웅장했다.

“내 걱정이…… 정작 당사자에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어. 음, 그걸 좀 받아들이려고 혼자 멍하니 있었던 것 같아.”

예상보다 훨씬 부드러운 대답을 마친 사샤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코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그 말에 크게 공감하지는 못했다.

“음…… 걱정해 주는 것은 좋은 건데, 좀 어지럽군.”

마치 몇 바퀴 돌다가 갑작스럽게 일어난 듯이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끼며 사샤는 머릿속을 정리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게…… 공작님은 출타해 계신 날이 많다 보니까 돌아오시면 일을 많이 하세요. 아마 본인의 일을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 아닐까요?”

코니의 말을 들어 보니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그를 걱정해 준 다고 했던 건데, 사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구나. 그를 쉬게 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였는데. 정작 그는 어떨지에 대해서 생각 못 한 부분이 있었어. 쉬게 해 주는데 싫을 게 없다고 생각해 버린 것 같아.”

사샤는 차근차근 발을 옮기면서 그렇게 말했다. 코니는 자신이 말한 게 그녀에게 정답을 찾아가게 힌트를 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입술을 말아 물고 수줍은 미소를 지은 코니는 빨라지는 사샤의 발걸음에 살짝 거리가 벌어지려고 하자 입술을 앙물고 발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눈앞의 이는 아까 늘어져 있던 게 언제였냐는 듯이 발을 빠르게 움직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사샤는 바로 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그는 원래 대답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잠깐 기다린 뒤 바로 문을 열었다.

“……어?”

그런데 이곳에 그가 없었다. 만찬을 다녀오고 나서도 서류를 급하게 보고 있길래 할 것이 많은가 보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아니었던 걸까.

그저 집무실에 없을 뿐인데 그의 부재가 왠지 허전하게 느껴졌다. 어딘가에 가면 분명 있을 텐데도 가슴 뻥 뚫린 것 같은 허전함은 대체 무엇일까.

“사샤.”

그때 뒤에서 그녀가 계속 찾고 있던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샤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이 허전함이 빨리 채워질 수 있도록, 진짜 상실을 느끼게 될까 봐 얼른 움직인 거였다.

“카……일러.”

그의 이름을 한 번에 부르는 것은 아직도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특히 그를 직접 보면서 이름을 부르는 그 느낌이 몽글몽글한 게 아주 좋았다.

“할 이야기가 있다.”

“응. 저도요.”

두 사람은 하루 만에 다시 만나서는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보기만 해도 이렇게 미소를 짓게 되는 사람인데. 아까운 시간을 버렸다 생각하면서.

카일러는 그녀를 데리고 공작저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새로운 곳을 보여 주고 싶다는 그를 따라 계단을 한 발 한 발 올라갔다. 처음에는 성큼성큼 걷던 그는 뒤에 따라가는 제가 신경이 쓰였는지 보폭이 3분의 1로 확 줄어들었다. 덕분에 계단을 올라가는 움직임이 한결 가벼워졌다.

공작저의 4층에는 기다랗게 빠진 공간이 있었다. 아마도 지붕의 선을 따라 만든 공간으로 창고로 쓰였던 것 같은 공간들이었다.

“와,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었어요! 정말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이에요.”

창고는 창고인데 놀라운 것은 높은 곳은 카일러가 서 있어도 될 정도로 천장이 높았고 지붕 선을 따라 기울어진 천장 끝에는 벽이 모두 창문으로 뚫려 있었던 것이다.

그 창문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넓게 뚫려 있는 곳이라 시원한 느낌이 화악 전해졌다.

“어떤가.”

카일러는 먼저 이 방에 들어와 뷰를 한번 확인하고는 뒤따라 들어온 그녀에게 소개하듯이 옆으로 비켜서 주었다. 그의 옆으로 서서 안을 둘러보던 그녀의 시선을 역시나 가로로 길쭉하게 뻗은 창문과 그 밖의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새파란 하늘에 그녀는 감탄했다.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길쭉한 방 한가운데에 커다란 창문이 있고 그 앞에 기다란 소파가 있었다.

“여기…… 와, 이렇게 뚫려 있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방을 뭔가 꾸며 놓은 것은 아닌데도 깔끔한 느낌도 들고요. 화려하지 않아서 아늑한 방이네요. 아, 경치도 너무 좋아요.”

그녀가 여러모로 좋아하는 반응을 보여 주자 카일러도 그게 너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일이라는 것을 몸소 느꼈다.

카일러는 소파에 앉아서 그녀를 불렀다.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어요.

“로제에게 그대와 있었던 일을 얘기하면서 그대가 어떤 감정이었을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샤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와 그녀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이것이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 말이다.

“로제에게 그걸 다 이야기한 거예요?”

사샤가 나긋한 목소리로 그렇게 묻자 입을 열고 말을 이어 가려던 카일러가 살짝 그 입을 다물었다.

“잘못한 것인가. 앞으로는 로제에게도 절대 말하지 않겠다.”

아, 그가 오해한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 사샤는 배싯 웃어 주며 그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 말 못 할 것처럼 생겼는데. 그런 거 말하고 조언 주하는 것도 용기예요.”

사샤는 그에게 다정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카일러도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할 일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내 눈으로 바로 보고 싶어서 계속 쉬라고 말했던 거였어요. 할 일이 있는 거고, 그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는 건데, 그냥 일을 빨리 관두고 제가 보는 데에서 얼른 내 말대로 쉬어 줬으면 하고 바랐던 거죠.”

그가 용기를 내주었으니 이번엔 자신이 용기를 낼 차례였다. 사실 용기랄 것도 없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걸 이야기하고 사과할 건 사과하고 바로잡아 나가야 할 일이었으니까.

사샤에게 중요한 것은 그와 사이좋게 지내는 일이었다.

“그거에 대해선 나도 해야 할 말이 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해 주자 카일러도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군가에게 내 상황을 설명에 대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냥 나는 내 일을 하면 됐었고, 정해진 일이었기에 설명을 더할 필요가 없었다. 기사단원들과는 출정 나갈 때마다 이야기하지만, 그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할 이유가 없으니까. 완전히 생소한 일이었다.”

아……. 그렇다. 사실 저 부분은 자신에게도 있었던 거였다. 공유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공유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너무 가슴이 뛰는 것만 같았다. 제가 해 오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로 보내기에 시간이 아까우니까. 오히려 이렇게 풀어 나가는 시간마저도 중요하게 느껴졌다.

“나는 집에 있을 때는 항상 내가 일을 했으면 했어. 그래서 나가지 않고 저택에 있을 땐 내가 서류를 모두 정리해서 보이려고 했다. 그래서…… 그대가, 내가 편하게 쉬었으면 하는 거 같아서 서류를 빠른 속도로 보고 있었던 거다. 얼른 해야 할 것만 처리하고 그대와 쉴 생각으로.”

그는 빠르지 않은 속도로 천천히 그렇게 말했다. 한 글자 한 글자 목소리에도 정성이 들어간 듯이. 그래서 내 마음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되뇌면서 생각할 수 있었다.

“제가 너무 서둘렀어요. 진짜 얼른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그가 말을 꺼내는 제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그는 항상 제게 닿아 있으면서 손을 잡고 몸을 쓰다듬지만 그 손은 다른 무언가를 할 때와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얼른 쉬는 게 카일……러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만 생각하고, 그걸 하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게 오히려 당신에게 강요인데 그걸 알아채지 못했던 거죠.”

그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하려니 약간 목소리가 떨려 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진중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슬쩍 경직되었던 입술이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당신이 그런 일정 끝에 돌아와 바로 쓸데없는 모임에 참여하게 되지 않도록 하고, 그러고 집에서는 할 일을 모두 잘 끝내고 쉴 수 있도록 내가 여러 가지로 도와줄 생각이에요.”

카일러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유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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