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53화 (53/128)

53화

공작저는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사샤는 뒷마당 회양목 너머의 의자에 앉아 눈은 감고 있었고, 카일러는 자신의 방 소파에 길게 누워 있었다.

각각 햇빛이 닿는 곳에 누워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두 분 어제부터 왜…… 저렇게 떨어져 계신 거야?”

뒷문 앞에 모여 있는 하녀들은 조잘조잘 걱정스러운 얼굴들로 소곤거리고 있었다.

분명 각각을 보면 평소의 그들과 다를 게 없었는데, 사실 두 사람이 함께 저택에 있을 때는 전혀 이런 적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카일러가 저택으로 돌아올 때엔 거의 모든 시간을 사샤와 붙어 있으려 했기 때문에. 만 하루 동안 이렇게 떨어져 있었던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너희들.”

“흐익!”

“로, 로제 님!”

한참 모여서 회양목을 바라보며 걱정을 쏟아 내고 있던 하녀들은 로제의 등장에 펄쩍 뛸 정도로 놀랐다. 그들을 혼낼 생각으로 온 게 아니었던 로제는 너무 크게 놀라는 아이들이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려니 제일 먼저 차분해진 새라가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저기 너머에 사샤 님이 계신 거냐.”

“예. 아까 슬쩍 보고 왔는데 낮잠을 주무시고 계신 것 같았어요.”

흠, 하고 고개를 끄덕인 로제는 하늘을 살피고 회양목 너머를 가늘어진 눈으로 잠시 관찰하는 듯하더니 코니를 바라보았다.

“햇볕이 강하구나. 사샤 님을 깨워서 안으로 모시든지, 거기 계속 계신다 하면 차양이라도 만들어 드려라.”

“아……! 네, 네! 알겠습니다.”

코니는 로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리나케 회양목 쪽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로제가 다시 눈을 돌리자 남은 세 명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분이 따로 계신 것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새라가 그녀의 눈빛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녀들의 걱정은 로제가 신경 쓰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카일러의 주변을 살피고 있다가 사샤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러 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뭔가 의욕 넘치게 도서관을 찾아가던 그녀가 이 땡볕 아래 내내 낮잠이라니 그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음, 그래. 우선 코니가 차양을 쳐야 하면 가서 도와주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아이들은 돌아서는 로제의 등에 대고 하고 싶은 말들을 꾹꾹 참았다. 자신들이 참견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이니까.

그저 회양목 너머로 간 코니가 잠에서 깨운 사샤와 함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제는 식당으로 가서 저녁 식사 확인을 했다. 두 사람 모두 아침은 굶었고 점심은 각자가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간단한 요리를 가져다 달라 주문했다.

“저녁만큼은 두 분 모두 식장에 와서 드시도록 할 테니까 잘 좀 준비해 줘요.”

“에이, 걱정하지 말아요. 나도 분위기 좀 읽었다고. 통돼지 바비큐를 한번 해 봤으니까 잘 얘기해 줘요.”

주방장의 넉살을 받고 로제는 살짝 미소로 그의 노고에 화답하고는 주방을 나섰다.

주인들은 만찬에 다녀오고 나서도 괜찮아 보였는데 어느 순간 맞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어색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는 최근 항상 도서관을 놀이터처럼 이용하던 사샤는 다시 회양목 너머의 의자에 자리를 잡았고, 집무실에서 주로 일하며 보내던 카일러까지 자신의 방 기다란 소파에 몸을 묻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로제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할 뿐이었다.

똑똑.

잠시 기다렸지만 역시 아무런 대꾸도 들리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 소파 너머까지 걸어가니 카일러가 아직도 그 자리에 그 자세로 앉아 있었다.

“공작님.”

로제의 고요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하지만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고요한 방 안에 놓은 정물 같은 그의 자태는 너무 멋있었지만 로제는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사샤 님과…… 뭔가 문제가 있으십니까.”

사샤의 이름이 들리자 그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역시 그분과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아 아예 직접 물어보러 온 것이었다.

“공작님…… 사샤 님도 지금 어제까지만 해도 열심히 드나드시던 도서관에 가지 않고, 마음 불편할 때 주고 가시는 회양목 너머 분수대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그녀의 상황도 함께 전해 주었다. 그녀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까지 들은 카일러는 두 눈을 지그시 감더니 늘어져 있던 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날렵한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읏……!”

그리고 일어나 앉자마자 머리를 감싸 쥐더니 고통스러운 듯한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 고통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로제는 눈썹을 찌푸릴 뿐 괜찮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그의 고통을 목격해 온 지가 오래라 그런 상투적인 반응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진작에 깨달았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을 땐 그저 바라봐 주는 것이 그에게 도움이었다.

“사샤가…… 기분이 좋지 않던가.”

“예……. 무슨 일 있으셨던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없으세요?”

로제는 어렸을 때부터 보아 온 그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물론 정을 잘 줄 줄 모르기 때문에 차가워 보이긴 했지만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에겐 아주 자연스럽게 다정해지는 사람이었다.

표현을 잘 하지는 않지만 로제나 파반은 거의 가족과도 같이 생각했고 조잘대는 하녀들도 간혹 배려하고는 했다.

그렇기 때문에 왠지 이번 어색함의 이유가 누군가의 잘못 때문은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음…… 어제 말이지.”

그는 귀의 소란이 잦아들었는지 한숨을 폭 내쉰 뒤 느릿하게 말을 시작했다.

만찬 이야기를 듣고 가지 말라 말렸던 것, 심지어 그 이야기를 다음 날 황제의 앞에서 똑같이 했다는 것, 협상을 시도해서 꼭 참석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의 상태에 따라 참석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했다는 부분까지 이야기했다.

“정말…… 대담하신 분이군요.”

아무리 사람 좋게 웃고 있어도 그의 눈빛을 보고 있자면 섬뜩한 날카로움이 바로 느껴지는 것이 리디안 황제였다. 로제는 그가 공작저로 놀러 왔을 때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미 잠깐의 마주침으로 그가 무서운 성정을 가진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황제의 앞에서 자신의 남편을…… 아무리 공작이라지만 공작부인이 남편의 참석 여부를 두고 그렇게 협상을 하다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로제의 반응에 카일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만찬 자리 파하고 돌아왔을 때 나는 얼른 책상 앞에 앉았다. 나는 급히 해야 하는 일들이 있으니 얼른 처리하고 그녀와 시간을 보내려고 했던 것인데…….”

카일러는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며 말을 끝냈다. 로제는 그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사샤 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음…… 쉬라고 했다. 내게 계속. 그러고는…… 자꾸 자기 의견만 강조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집무실을 나갔어.”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대답하는 그의 말 속에서 생략된 부분이 많아 보였지만 대충 어떤 일인지는 알 것 같았다.

“공작님, 그래서 사샤 님께 많이 서운하신가요?”

그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일할 때에야 오늘의 질문 개수를 써 놓지, 침실에서 로제가 묻는 것에는 제한이 없었다. 그녀가 질문하는 것에 진지하게 생각에 잠기던 그는 고개를 돌려 로제를 올려다봤다.

“나는…… 그녀에게 서운한 게 아니다. 나는 해야 할 일을 빨리 마치고 싶었던 것인데…… 아마 그 자리에 계속 있는 것이 힘들었을 거다. 그래서 손은 놓고 하고 싶은 걸 하게 해 줬다.”

그는 말주변이 나쁜 사람이 아니었는데 사샤에 관한 일에는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로제…… 그녀는 어째서 기분이 나쁜지 알려 주겠나?”

이런 것. 그녀의 마음이 어땠는지를 알아야 그녀가 지금 화가 났는지 속이 상하는 건지 서운한 건지를 알게 되는 것일 텐데, 그걸 잘 모르니 진전 없는 답보 상태가 두 사람에게 찾아온 것이다.

로제는 인자한 미소를 지은 입술을 잠시 달싹였다. 말하려는 것이 정리되지 않아 이런 리액션을 해 본 적은 별로 없지만 이 문제만큼은 신중하게 설명을 해 주고 싶었다.

“공작님, 사샤 님은 공작님을 걱정해 주신 겁니다.”

“그건 나도 안다. 그래도 내가 하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으니까 그것만큼은 제대로 지키고 사샤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했었다.”

생각해 주는 마음은 기특한데…… 문제는.

“공작님, 그 사실을, 사샤 님께 말씀을 드리셨었습니까? 약속한 부분이 있어서 해야 할 부분이 있고, 그것만 끝나면 사샤 님의 바람처럼 쉬시려 했다는 것을요.”

로제가 그 이야기를 꺼내자 로제를 올려다보며 갑갑하다는 눈을 하고 있던 카일러가 스륵 눈에 힘을 풀었다. 음, 하고 한 음절을 길게 빼며 로제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처럼 되었다.

“그건 우리끼리의 약속…… 아니, 저희에게 일방적으로 공작님께서 약속하신 일이었습니다. 사샤 님은 모르시지 않을까요?”

“음.”

“그럼 황제 폐하 앞에서까지 공작님께서 쉬셨으면 좋겠다고 말씀하고 돌아왔는데, 쉬지 않고 일만 하는 공작님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요?”

“음…… 서운할 수 있었겠군.”

많은 것을 모르지만 그렇다고 설명해 주는 것까지 모르고 헤매는 바보는 아니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정답을 내놓자 로제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아마 황궁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침실에 오셔서 주무셨다면 매우 뿌듯해하셨을 거라고 감히 추측해 봅니다. 한번 나갔다 오는 것, 며칠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음…….”

그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로제의 말을 경청했다. 이렇게 뭔가 받아들이는 데에 하녀의 말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이 태도가 또한 그의 장점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