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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52화 (52/128)

52화

본래는 딸의 즐거운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하루의 일과를 듣는 것이 저녁 시간이었지만 마음이 상해 버린 엘리나는 자신의 방에서 저녁을 먹겠다 해서 음식을 올려 준 참이었다.

“아까 왜 그렇게 예민하게 했던 거예요? 엘리나가 저렇게 부탁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메인디시가 나올 때쯤 후작부인이 조심히 이베른에게 말을 던졌다. 그냥 지나가려고 하기에 오늘 그가 왠지 매우 예민해 보였기 때문이다.

“후, 그래. 이제 성인인데 아직도 아이처럼 떼를 쓰더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애지중지 키워 온 딸인데 오늘따라 그게 신경을 긁은 모양이었다.

후작부인은 슬쩍 눈치를 보면서 고기를 조금 썰어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씹고 삼키는 그 짧은 시간에도 너무나 고요한 나머지 그의 눈치를 보게 됐다.

“마물이 날뛰고 있다는군. 게라넬조차 통제가 어려워서 지금 숲까지 내려왔다는 거야.”

“어머…… 어떡해요 그럼? 산에서 나가면 그거 큰일이잖아요.”

“통제가 안 된다면…… 그건 정말 큰일이야. 이제까지 게라넬이 어떻게 이 일을 이어 올 수 있었는데. 뭐지, 최근의 어떤 변화가 이런 일을 만든 것이지.”

산맥과 숲까지를 이베른이 관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산맥에서 꾸준히 생성되듯이 나타나고 있는 마물을 통제하는 게라넬이라는 조직이 산맥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게라넬은 본래 마물을 다루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용병들로 이루어진 조직이었다. 거기에 조언을 하듯 마법사가 끼어들어 마물을 통제하는 법을 찾았다.

처음 시작은 그 마물들이 산에서 내려와 사람을 해치지 않기 위해 관리하거나 필요시에 없애는 일들을 해 왔지만 민간인들의 모임이다 보니 그 의의는 변질된 지 오래였다.

예전에는 북쪽의 프란테스 공국에서 마물을 통해 제국을 경계하기 위해서 게라넬을 거의 고용하다시피 했었고, 최근에는 거세진 반란의 무리가 이 마물을 이용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런 식으로 게라넬의 필요성은 때에 따라 변동되어 왔지만 아무튼 마물이 그 자리에 있어 줘야만 이어 나갈 수 있는 활동이었다. 몇 백 년을 그 산맥 안에서만 활동하던 마물들이 어째서 지금 그런 이상 행동을 보이는지 알 수 가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뭐라고 하셨군요. 숲을 통과해야 하니까.”

“후우…… 제일 먼저 설명을 했는데도 자기 생각밖에 머리에 없으니 내 말이 머릿속에 들어갈 리가 있나.”

쯧 혀를 차는 이베른은 그래도 고기를 잘라 입으로 가져갔다 조금 빠른 속도로 먹어 치운 그는 빈 접시가 나가고 다음 디저트가 오는 사이에 후작부인이 남은 고기를 포크로 꾹꾹 찌르더니만 그의 앞에 디저트 접시가 놓이는 찰나 입을 열었다.

“최근 변화라고 한다면…… 사샤가 이 집을 나간 것밖에 없는데 말이죠.”

후작부인이 눈치를 보면서 꺼낸 이야기에 이베른의 숟가락이 멈추었다. 이제 곧 식사가 끝날 텐데 그사이에 단단히 체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갑자기 여기서 왜 그 아이가 나와.”

눈도 바라보지 않은 채로 읊조리는 목소리가 너무 냉랭해 후작부인은 흠칫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아니…… 생각해 보면, 사샤를 그렇게 올린 게 그래서잖아요.”

“그렇게 따지자면 걔는 피하게 만드는 아이인데, 여길 떠났으니 더 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기는 한데, 그게 아니면…… 갑자기 이런 변화가 생기는 이유를 알 수가 없잖아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도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후작부인을 이베른이 진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첫 아이라고 조금 기대를 했었다. 결혼을 하고 이베른 후작의 이름을 물려받으며 북쪽의 공국과의 사이도 매우 돈독하던 때라 금화도 제대로 쌓이고 있던 때였다.

아이는 무사히 태어났지만 생각보다 큰 감흥은 없었다. 거기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온 부인도 본인이 아픈 것만 생각하느라고 아이는 거의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이베른은 임신으로 인해 까다롭게 굴던 부인이 아이를 낳고 더 이상 투정을 부리지 않게 되자 공국의 의뢰대로 마물을 움직이기 위해 매일 산맥으로 향했다.

“후작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후작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신 때부터 마물이 이 언저리로는 오려 하지 않습니다.”

이상 현상이 생긴 것이었다. 산맥 중에서도 후작저가 가까운 방향으로는 마물들이 움직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함께 움직여 줘야 하는데, 능선 중에서도 길이 난 곳이 바로 후작저 방향 쪽이었다.

“컨트롤이 쉽지 않습니다. 대체 무슨 반응인지…….”

이런저런 방법으로 마물들을 컨트롤해 보려고 했지만 그들은 맘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그 때문에 공국과의 계약도 어느 순간 흐지부지되어 가고 있었다. 이건 게라넬의 존속이 달린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유에 대해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빠~”

그사이 사샤는 열심히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나이가 되었다. 저 빠 소리가 자신을 부른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조금 울컥? 뭉클?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도 같다.

그날은 아이가 열심히 걸어 집 밖으로 걸어 나와 있을 때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정원 한가운데 지붕을 올리고 커다란 소파에 자리 잡고 누워 있던 때였다.

아이는 점점 걸어 저택의 동쪽, 산맥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 너머 경계 이후는 위험하기 때문에 제재를 했겠지만 최근 저택 방향으로는 전혀 오지 않으려 하는 마물 때문에 고군분투를 했던지라 그쪽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꺄아악! 안 돼요, 아가씨!”

그때였다. 저택의 앞마당을 가득 채우는 유모의 비명 소리에 이베른이 벌떡 일어났다. 그가 본 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마물 하나가 산맥 아래를 가로지르듯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 마물이 지나가는 자리로 아기가 걸어가고 있다는 것.

유모가 아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그 속도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이베른도, 후작부인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사샤!”

이제 아이는 코앞이었다. 아마 대상으로 잡고 공격할 것도 없이 마물이 지나간 자리에 휩쓸려 큰일이 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요란스럽게 들리던 마물의 소리까지도 멈춰 버렸다.

“그 아이…… 마물의 기운에 중독됐다고 하는 것도 이상해요. 그때 마물은…… 그 아이 앞에서 멈췄었잖아요.”

그날 마물은 사샤를 덮치지 않았다. 코앞에서 멈춘 마물은 누가 목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듯이 괴로워 보였지만 꼼짝도 하지 못했고 아기는 유유히 그 마물을 올려다보다가 알아서 방향을 바꿔 이쪽으로 돌아왔다.

마물은 아이가 멀어지자마자 산맥을 타고 도망쳤다. 그리고 멀쩡히 돌아온 듯했던 아이는…… 그날 밤부터 고열에 시달렸다. 아이에 대해 특별히 애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낳은 생명이었다.

백방으로 알아보던 중 신전으로 가 신관에게 아이의 상태를 봐 줄 것을 부탁했었다. 딱 죽기 직전의 고열로 며칠 동안이나 괴로워하는 아이를 보고 있기가 힘들었던 그때 그 신관이 아이를 보더니 말했다.

“이 아이는 마물의 기운이 중독이 되어 버렸습니다. 혹시, 이 아이가 태어난 이후…… 주변에 이상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예……. 산맥에 마물이 많은데, 이쪽 산길로는 전혀 마물이 출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럼 좋은 거 아닌가요? 공격받지 않게 될 테니까…….”

“하지만 분명 아까는 마물이 저택 가까이에까지 마물이 내려왔잖아. 이것도 이전엔 없던 일이야.”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관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더니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 아이가 마물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군요. 저로서도 정체를 잘 모르겠습니다.”

“이 아이가 없었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인가.”

이 아이가 태어나고부터였다. 산맥의 마물들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 확실했다. 마물들을 데리고 장사를 해야 하는 이베른으로서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고, 문제는…… 바로 이 아이였다.

“없던 때로……. 혹시나 아이를 죽이거나 쫓아낼 생각이시라면 그건 관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혼란스러워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게 없어져 버린다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괜찮을 수도 안 괜찮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아이를 떠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언제 마물이 산맥을 내려와 집으로 쳐들어올지 모르는 불안 속에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 틈에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 소중한 아이가 새로이 찾아오고 보니 삶을 불안하게만 하는 사샤는 쳐다도 보기 싫어졌다. 내쫓거나 죽일 수 없으면 적어도 눈에 띄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이는 다락방으로 올려 버렸다.

돌보는 이는 유모뿐이었고, 그나마도 아이가 열 살이 지나고부터는 챙김도 소홀해지고 말았다.

그 이후로 마물이 쳐들어오는 일도 없어졌고, 마물이 통제가 안 되는 것도 서서히 나아졌다.

“전에도 그랬잖아. 서서히…… 나아질 거야. 걱정하지 마.”

“정말 그럴까요? 하긴…… 그렇죠, 그랬죠. 마물이 내려오지도 않았고 피하던 것도 잠잠해졌고요…….”

후작부인은 이베른의 말에 불안을 잠재우고 살짝 녹아 버린 디저트를 입에 물었다.

그 마물은 이제 그 아이의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맞았다. 애초에 다락방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이 집에서 내보내는 것이 목적이었던 아이였으니까.

어떻게 그 계기가 공작이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었지만 분명 우리는 엘리나를 추천했었고, 굳이 고집을 부리며 첫째 사샤를 데려가겠다 한 것은 카일러였다.

“일은 다 괜찮아질 거다. 걱정하지 말아. 그보다 엘리나 좀 어떻게 해 봐. 황궁에 가서 천방지축으로 다니는 건 아니겠지.”

이베른이 짐짓 엄한 말투로 말하자 후작부인은 멋쩍게 웃으면서 아니에요, 하고 조용히 대답했다. 이제 저 아이가 있으면 되었다. 우리에게 애초에 딸은 하나였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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