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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51화 (51/128)

51화

엘리나는 기대하던 사교 모임 이후로도 계속해서 수도에 가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누구를 만나고 싶다기보다 황후와 만나서 사샤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퍼뜨리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아빠 정말, 황궁 가실 일 없으세요? 저 혼자 가려니까 엄마가 자꾸 안 보내 주세요.”

하지만 하녀 하나 데리고 황궁으로 가겠다는 걸 후작부인이 막고 있었다. 이베른 후작저에서 황궁으로 가는 길에는 깊은 숲이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이베른 후작은 소파에 앉아서 옆에 쌓아 둔 편지들 중 하나를 꺼내 보고 있다가 딸의 칭얼거림에 입술을 꾹 물었다.

“거기에 가서 뭘 하려고 도대체 계속 가겠다는 거냐. 연회에다가 개인적으로 황후 폐하까지 만나고 왔다고 했잖느냐.”

편지를 어서 확인하고 회신을 보내야 하는데 딸이 여기를 벗어날 생각을 하질 않았다. 기어이 옆의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아서 제 쪽으로 한껏 몸을 기울인 채 앉아 있었다.

“황후 폐하가 아무래도 날 좀 도와주실 것 같단 말이야. 지난번 모임 때 마무리 분위기 좋았는데, 그 뒤로 가질 못하고 있잖아.”

황후? 그 이름에 겨우 편지에서 시선을 뗀 이베른이 고개를 들어 딸을 바라보았다.

그가 관심을 보이는 것 같자 그녀가 화색을 띠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언니 싫어하는 거 알고 황후 폐하가 나만 따로 불러다가 얘기해 주셨어. 언니를 이그노트 공작저에서 쫓겨나게 하자고. 그래서 모임 따로 만들어서 소문 퍼뜨리는 거 작업해 뒀는데, 그 뒤로 나는 확인할 방법이 없잖아. 응? 그때 확실하게 해 둔 게 아니어서 얼른 하고 싶단 말이야.”

엘리나는 마치 자신이 정의로운 일을 하기라도 하는 듯이 당당하게 말해서 이베른은 쯧, 혀를 찼다. 아무래도 황후가 도움을 준다는 것에 힘입어 마치 사명을 가진 듯이 구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실제로 이그노트 공작을 보고 났더니 그에 대해 욕심이 생겼던 것일까. 그저 여느 영애들처럼 꿈만 꾸고 있는 줄 알았더니 사샤가 공작부인이 되어 나가자 그 자리가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숲을 지나가는 건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니. 어? 숲에는 위험한 시기가 있어서 갈 수가 없다고.”

“그럼 기사님이라도 하나 붙여 주세요. 그럼 되잖아요.”

황후를 등에 업고 뭔가 의욕이라도 얻은 것인지 엘리나는 안달이 나 있었다.

“아빠는, 나 대신에 언니를 그런 좋은 곳에 보내 놓고 억울하지도 않아? 언니가 그렇게 나가 버리는 바람에 아빠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도 많아졌단 말이야.”

그거야 알고 있었다. 이제껏 좋게 좋게 쌓아 왔던 이미지를 한 방에 뒤흔들 만한 일이었지만 이그노트 공작이 너무 갑작스럽고 강압적으로 결혼 이야기를 진행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급조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사샤에게도 후작에게도 나쁘지 않을 방향으로 해 놓기는 했지만 만약 이 이야기를 파고든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만한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막겠다면서 나설 생각은 없었다. 지금 그가 신경 써야 할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거 누가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오히려 지금 당장은 아픈 딸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병 낫게 한 아버지로 되어 있으니까.”

이베른은 대충 대답하고 나서 다시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마물의 움직임이 어떻다 하고 읽고 있는데 자꾸 그 중요한 타이밍에 엘리나가 들어오는 바람에 집중이 안 되고 있었다.

“전에 공작저로 초대해 놓고 나랑 엄마 대하는 거 봤잖아요. 그 언니가 이제 가만히 있겠어요? 이제 이그노트 공작부인이잖아요. 무려. 아으, 아까워 진짜!”

이베른은 엘리나가 짜증내는 소리 대신 편지에 집중했다.

주로 산맥을 타고 나타나는 마물들의 움직임이 이번에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제국 변방에 있는 반란의 무리들이 고용하여 부리고 있는 마물 사용자, 게라넬에서 온 보고였다.

카일러가 활약하는 바람에 반란의 무리들이 엄청나게 큰 타격을 입었다고 했다. 심지어 이번에 연달아 두 번이나 산맥에 와서 마물을 제거하고 가기도 하고.

반란의 무리나 게라넬에게는 엄청난 타격이었다. 전부터 카일러라는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재빠르게 반응할 수 있느냐 하는 불만을 토로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더더욱 그 주기가 빨라졌다고 했다.

“그 아이 보내 놓고 그래도 좀 안심하나 했더니, 어째 더 상황이 나빠지는 것 같은 느낌인데.”

이베른은 쯧 혀를 찼다. 결국 반란 세력도 많이 줄어들었고 마물이 그렇게 난리를 치는 바람에 제대로 통제를 하지 못해서 지급해 왔던 의뢰비는커녕 지금 낼 수 있는 돈마저 없다는 것이었다.

“아빠는?! 내 말 듣고 있어요? 나 기사 한 명 데리고 숲길 타고 가겠다니까?”

이베른이 편지를 읽고 있는 사이 열이 바짝 오른 아이가 기어이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미간을 찌푸린 이베른이 딸아이를 확 노려보았다.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눈에 화들짝 놀란 엘리나가 휘둥그렇게 뜬 두 눈을 깜빡, 깜빡, 하고 있는 사이 쯧, 혀를 찬 이베른은 그녀에게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잘 들어, 엘리나. 우리가 꽁꽁 숨겨 놓고 살았지만 사실 최선은 우리에게서 되도록 가장 멀리 그 아이를 떨어뜨려 놓는 것이었다. 그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 딸이 있다는 이야기도 안 하고 다락방에서 키운 거였다. 그게 이그노트 공작가에 시집보내는 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아무튼 그것만 뺀다면 손도 안 대고 코 푼 격이라는 거다. 이해하겠어?”

이베른이 참다 참다 터뜨린 속사포 같은 말에 엘리나는 멍해져 버렸다.

그 언니가 떨어져 있는 게 우리 집에 좋은 거라고? 하지만 어렸을 때에는 그 언니가 다락방을 벗어나지도 못하도록 꼭꼭 가둬 두고 어딜 허락 없이 가지 못하게 했었다.

그저 엘리나는 그녀가 그냥 거기에 갇혀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됐고, 그녀는 방 밖을 나와서도 안 되고 심지어 후작저 바깥으로 나가면 절대 안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그때까지 왜 기다렸어? 왜 카일러 공작님이 올 때까지 기다렸냐고! 그전에 아무 집에나 시집보냈거나 멀리 보내 버렸으면 이런 일은 없었잖아!”

그 말의 뜻을 이해한 엘리나는 버럭 성질을 부렸다. 아무리 그 자리가 탐났던들, 제 혈육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다는 사실에 이베른은 좀…… 아니 꽤나 당황스러웠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버렸어야 했다는 말이 아니잖아. 성인이 되면 바로 아무 집안에다 보내 버렸어야지. 왜 계속 어물쩍대다가 그 자리를 놓친 거냐고요!”

무엇이 이렇게 엘리나의 눈이 돌아가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빠에게 막말을 해 댈 정도로 갖고 싶어 하던 자리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분해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 방법이 있었겠지. 하지만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다 어른들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 그렇게 좀 알아. 지금 그거 때문에 마물이 숲까지 내려온다니까 자꾸 말리는 거 아니겠냐! 기사 하나 가지고 마물 만나면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아? 네 언니나 가능했을까, 너는 마물을 만나면 기사랑 같이 찢겨 죽을 거다.”

이베른이 화가 잔뜩 났는지 칭얼대던 엘리나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버렸다.

그들이 통제가 안 된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대를 이어 온 이 업이 계속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민가로 내려오게 된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이베른이 소리를 지르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엘리나는 입을 벌린 채 뻐끔거리기만 할 뿐 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큰 소리가 바깥에까지 새 나갔는지 ‘여보!’ 하고 부르면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에요! 어머…… 엘리나?”

응접실로 달려온 후작부인이 얼른 다가와 입을 벌리고는 어버버한 채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딸의 어깨를 감싸 안아 주었다.

심각하게 구겨진 얼굴의 이베른을 바라본 그녀는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파악했다. 요 며칠 엘리나가 어떤 상태였는지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애한테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나 놀라 눈물까지 글썽인단 말인가. 따지고 싶었지만 이베른의 상황 또한 모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후작부인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애한테 무슨 말을 했길래 그러는 거예요. 그냥 달래서 내보냈으면 됐잖아요.”

엘리나의 편을 드는 부인을 보고 이베른은 속으로 분노를 꼭꼭 씹어 삼켰다. 어쨌든 상황을 자세히 모르는 아이가 한 말이고 그걸 설명해 주지 않았던 부분은 자신의 선택이었으니까.

이베른은 무거운 숨을 내리고 엘리나의 손을 가져다가 두 손으로 꼭 잡아 주었다. 키우면서 제대로 혼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크게 소리 지른 것만으로도 꽤 충격을 받은 듯했다.

“너도 이제 어른이 아니냐. 투정을 부리는 것도 상황을 봐 가면서 해야 하고,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을 구분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나직한 목소리로 타이르는 그의 말에 엘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눈에 가득 맺혔던 눈물이 토독 떨어졌다.

“소리 지른 건 미안하다. 응? 엘리나.”

“흐잉, 놀랐잖아, 아빠. 흑, ……잘못했어요.”

성인이 되어 사교 모임에도 참여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특히나 부모 앞에서는 응석받이가 되고 마는 아이였다. 이렇게 사랑스러우니 혼을 낼 수도 없었던 거였다.

“지금 숲을 건너는 것은 위험하다. 마물들이 산맥을 지나 숲까지 내려온다는 얘기가 있어서 그래. 기사 한두 명으로는 어림없을 것이다.”

엘리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목숨이 제일 중요한 것이니까.

그녀가 눈물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여 주니 후작부인이 조심히 다독여 주었다. 그런 모녀를 보던 후작의 눈길은 다시 편지 더미로 옮겨 갔다.

방법이…… 필요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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