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황후 폐하는 이제 부인을 괴롭히기로 작정하신 건가요?”
황궁에서 꺼내기에 부담스러운 말이었지만 지금 모두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모두들 살짝 주변의 눈치를 보기는 했지만 시녀들이 아직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다시금 입을 열었다.
“엘리나 영애와의 일은 그렇다 쳐도…… 그걸 어떻게 본인이 나설 생각을 하는 것인지.”
혀를 차는 남자의 말에 주변에서도 슬렁슬렁 고개를 끄덕이는 분위기였다.
“지금 결혼엔 관심도 없던 카일러 공작이 급작스럽게 결혼하게 된 이유가 누구 때문인데 아직도 저렇게 티를 내면 어쩐답니까.”
“그러게 말이에요. 솔직하게, 그 마음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걸 티 낼 자리가 아니란 말이죠. 이 데르마 제국의 황후 자리를 만만하게 보는 게 아니겠냐고요.”
메딜란 공작이 이그노트만큼이나 제국에 큰 영향을 끼쳐 온 곳이었기 때문에 황후가 될 수 있었고 황제가 봐주고 있지만…… 이제 귀족들은 점점 그녀의 행동에 의문을 넘어서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폐하는 어째서 저렇게 하는 것을 가만 보고 계시는 걸까요? 마음만 품고 있어도 문제이거늘 번번이 이렇게 남들 앞에서 감추지도 못하고 말이에요.”
한 번 터진 봇물에 여러 가지 불만이 쏟아졌다. 그 사이에서 요리조리 눈치를 보고 있던 한 귀족 부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렇게 따지면…… 이상하지 않아요? 결혼 전엔 저렇게까진 안 했는데……. 사샤 공작부인이 미심쩍으니까 그러시는 건 아닐까 하고요.”
새로운 의견에 모두들 먼저 미간을 좁혔다. 황제의 앞에서는 싹싹하게 자신의 남편을 챙기고, 황후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반박하며 이그노트 공작에게는 다정한 미소를 보여 주던 여인에게…… 의심할 부분이 있었던가.
“이베른 후작이 숨길 정도로 많이 아팠다고 했는데, 지금 보면 너무나 멀쩡하지 않던가요? 전 처음부터 그게 의심이 되던데……. 그래서 혹시…… 몸이 아니라…….”
초록 드레스를 입은 그 귀족 부인의 계속되는 발언에 집중하고 있던 이들은 생각지도 못한 의견에 다들 흡, 고요히 숨을 멈추었다.
“그런…….”
“그게, 사실 이베른 후작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고…… 생각하긴 했어요. 이상하지 않아요? 아무리 몸이 아프다 한들 딸이 있다는 걸 숨긴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소곤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
방금 보았던 이그노트 공작부인을 생각하자면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일 뿐이지만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해 보자면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수도에 나와 정치적 생활도 크게 하지 않고 후작저의 힘이 필요할 때 간혹 가다 나와서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고 가는 정도였다.
수도에서 크게 멀지 않은 곳에서 영지를 다스리며 주변 귀족들은 물론 영지의 평민들에게도 인자하기로 소문난 이베른 후작가에서 듣도 보도 못한 영애가 나타나 이베른과 이그노트의 연결 고리가 되었다는 것에 귀족들은 혼돈에 빠졌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녀의 말을 다 믿을 수가 없다는 얘기가 되는 것인가.”
어느 쪽이 더 미더운가, 이쪽을 믿으면 다른 쪽은 어디까지 의심해야 하는가, 복잡한 일만이 남아 있었다. 수군거리던 그들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 보려 했으나 점점 말을 아끼는 분위기가 되던 차에 모두들 큼큼 마른기침을 하고 일어나 하나둘씩 연회장을 벗어났다.
초록 드레스를 입은 여인도 자신의 남편을 따라 연회장을 벗어나면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잘했어.”
남자가 그녀의 그런 기색을 읽었는지 한마디 툭 나직하게 던졌다. 그녀는 그 말에 슬쩍 고개를 들어 자신의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걱정했던 것보다 평온한 얼굴에 하얗게 질리려던 입술을 놓았다.
“모두들 어색해진 분위기 봤지? 본래 의심의 실마리조차 없던 공작부인에게로 의심이 어느 정도 이동한 것이야.”
그가 그렇게 설명해 주고 나서야 안심한 듯 부인도 얕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쪽이 맞는 걸까요. 왜 우리에게 이런 걸 시키는 거죠?”
“스흡!”
마차를 타기 전에 경솔하게 입을 연 자신의 부인을, 남자는 가차 없이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움찔한 부인은 재빨리 주변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말조심하겠습니다.”
그녀가 사과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재빠르게 남은 거리를 걸어 마차에 먼저 올라탔다. 치마가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있던 그녀는 한 손으로 치마를 한 움큼 집어서 올리고는 힘겹게 마차에 올라타야 했다.
탁, 마차 문이 닫히고 덜컹덜컹 흔들리기 시작하자 출발했다는 것을 확인한 남자가 그녀에게로 눈을 맞추었다.
“바깥에서는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하니 않았나.”
제대로 혼쭐이 나기 시작하자 녹색 드레스의 여자는 작은 머리를 조아려 제 발끝을 바라보았다. 잔뜩 주눅이 들어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는 제 부인의 모습을 보고 있던 남자는 혀를 또 차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를 믿고 맡겨 주시는 게 아닌가. 제대로 해서 돈값은 해야지. 딸아이를 아주 잘 뒀어. 사샤 공작부인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다니. 안 그런가.”
“예에, 그럼요.”
부인은 아까 한마디 거들 때도 그랬지만 한껏 수그러든 어깨를 하고는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쯧쯧 그녀를 지켜보고 있자니 답답한지 혀를 또 차고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다음에 또 안 만난다던가.”
“아직…… 그런 이야기도 없었어요.”
“그렇군. 계속 이야기해 봐, 친한 척하게 하고. 이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
“알겠어요.”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황궁을 벗어나 수도 방향으로 달려 사라져 갔다.
*
만찬에서 돌아오고 나서 뭔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꼈다. 사샤는 가만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가 한 모금만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차의 수색도 참 예뻤다. 온도도 적당하고 오늘 로제가 내어 준 찻잔도 굉장히 예뻐서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카일러. 돌아오고 나서 다시 이렇게 일만 하면 내가 거기 황제 폐하 앞에서 얘기한 게 다 뻥이 되잖아요.”
카일러는 황궁에서 돌아오고부터 줄곧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서류 봐야 할 게 많다는 건 알지만 그건 하루쯤 로제나 파반이 대신 봐 줄 수도 있다고 했다. 그가 자리를 비울 때가 많아서 어느 정도의 권한을 위임해 두었다고.
황제의 앞에서 마물 사냥 후에 이렇게 연회나 만찬에 불러대지 말라고 하고 온 제가 무안하게…… 계속해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느라 오른손으로만 찻잔을 잡아 올려 차를 마시고 있었다.
손은 이렇게 잡고 열심히 일에 몰두하고 있는 그가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았다. 제가 아무리 찔러 보고 큼큼 소리도 내 보고 심지어 저도 모르게 하품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피곤한가.”
“내가 아니라 당신이요.”
꾹꾹 한 음절씩 눌러 대답하자 그제야 카일러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약간 불퉁하게 나오려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보고는 웃음이 샐 뻔했다.
“빨리 끝내야 제대로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하고 있었다. 그대가 내가 쉬는 걸 봐야 마음을 놓을 것 같아서.”
“그건 그런데요…….”
쉬기는 바라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쉬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쯤 되니까 하나도 안 피곤한 사람한테 계속 쉬라고 강요하는 것 같네요. 이렇게 막 집중해서 빨리하려고 애쓰지 말고 평소 하던 대로 해요. 참견은 안 할게요.”
신경 쓰고 있던 것을 놔 버렸다. 괜히 내 뜻대로 끌고 다니려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냥 힘을 빼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반응을 본 카일러는 서류와 그녀를 잠깐 보다가 마지막으로 잡고 있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을 하던 그는 사샤의 손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어라, 하는 사이에 그의 왼손이 자신의 손이 아닌 책상 위 서류 끄트머리를 짚었다.
왠지 순간적으로 드는 복잡한 생각 끝에 사샤는 약간 시무룩해져서 일어났다. 제가 정말 그에게 쓸데없는 참견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진짜로 괜찮았을 뿐인데 괜히 걱정한답시고 황제와 협상 테이블에 앉으려 했던 게 너무너무 창피해졌다. 화끈해지는 볼이 눈에 띄지만 않기를 바라면서 어깨를 늘어뜨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해요, 그럼.”
그녀는 터덜터덜 걸어서 집무실을 나갔다. 오히려 내 머리가 더 피곤해지는 것 같아서 뒷 정원으로 가서 잠이라도 좀 자 볼까 생각했다.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던 카일러는 문이 닫힘과 동시에 흐음, 하고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제 손을 들여다보고 다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는 아직 해결해야 할 서류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있을 때엔 꼭 로젠이나 파반이 아닌 자신이 처리를 하겠다고 스스로 생각해 왔던 것이 있기 때문에 그는 다시 서류 끄트머리에 자신의 서명을 넣었다.
“윽……!”
아주 잠깐 귀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간헐적으로 통증에 가까운 소음을 일으켰다.
잠깐 한숨을 내쉰 뒤 그는 다름 서류를 챙겼다. 주기가 꽤 길었기 때문에 다음 통증이 오기 전까지 여러 개를 해결해 놓아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저, 공작님.”
그때 로제가 들어와 그의 기색을 살폈다. 항상 사샤와 붙어 있던 그가 혼자 집무실에 남아 있고 사샤만이 나와 뒷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보곤 이상하다 생각한 것이다.
“무슨 일인가.”
그의 목소리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스스로도 느끼는 그 변화를 로제가 모를 리가 없었다.
“사샤 님이 안 계서서인가요……?”
조심히 묻는 그녀에게 카일러는 조용히 눈을 들었다. 그 눈동자는 깊은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이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