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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공작부인의 생존전략-49화 (49/128)

49화

황후가 던진 말에 순식간에 넓은 테이블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굳어졌다. 포크가 식기에 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시선을 끌 정도가 되자 슬쩍 내려놓는 이가 생겼다.

황후가 무언가 말을 더 꺼내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카일러가 스윽 사샤의 앞을 막아서듯 몸을 기울였다. 그 모습에 미디에나가 움찔하며 입을 다무는 듯했지만 곧 그 붉은 입술이 슬쩍 비틀렸다.

“그렇게 감싸 주실 거 없어요. 동정심이 너무 넘치시네요, 이그노트 공작.”

고개를 저으며 온화하게 미소를 짓는 미디에나의 얼굴은 넓은 등판이 가림막이 되어 사샤에겐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한마디에 주변이 살짝 술렁이는 것은 보였다.

“엘리나 영애가 얼마나 마주치길 무서워하던지, 본래 오늘 후작부인과 함께 참여하겠다 했었는데…… 못 오겠다며 돌아가 버렸지 뭐예요.”

걱정을 담은 얼굴로 미디에나가 조심스럽게 말하며 시선을 살짝 사샤를 향하자 모두의 시선도 그렇게 따라왔다.

그렇지, 나만 나쁜 년 만들려면 그 방법이 좋겠구나. 사샤는 샐쭉해져선 카일러의 등에 대고 표정을 숨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이베른의 둘째 영애에게 전해 주십시오. 앞으로 만찬과 연회는 참석하지 않을 테니 마음 놓고 나와도 된다고.”

갑자기 말문을 튼 카일러가 던진 말에 가장 당황한 것은 미디에나였다. 사샤를 난감하게 만들 생각으로 꺼낸 말에 그가 이 정도로 반응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니, 공작께선 이 제국의 중요한 사람인데 그런 큰 행사들에 빠지시면 아니 되지.”

미디에나가 당황하여 꺼내는 말에 사샤가 꾹 그의 어깨를 눌렀다. 용케도 자신의 신호를 눈치챘는지 가리고 있던 몸을 비키며 그녀 쪽을 돌아봐 주었다.

“아, 저 때문에 안 나온 거니, 저는 앞으로 행사에 참석하지 말라는 말씀이셨나요?”

사샤는 여유로운 척 대꾸했다. 이 여자들이 작정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번 백작 영애들을 데려왔기에 대놓고 멍석을 깔아 주긴 했었지만 눈앞에 카일러를 두고도 저렇게 말하다니.

빼앗겼다는 엘리나의 말을 믿었던 것일까.

“엘리나가 언니에게 정이 없을 법도 해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다락방에서 혼자 자라왔기 때문에 저도 그 아이를 많이 못 봤어요.”

“……다락방?”

자신을 슬쩍 돌아보고 있던 그가 아예 그녀에게로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사샤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려는 듯 했지만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이 전혀 태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연했지만 과하지 않았다. 살짝 촉촉한 눈으로 카일러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살짝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했다.

“아프셨다고…… 하지 않았나요?”

정면에서 앉아 있던 부인 하나가 사샤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질문을 하면서도 살짝 황후의 눈치를 보는 듯 옆을 흘끗거렸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사샤는 카일러를 올려다보던 눈길을 슬쩍 돌려 그녀를 바라봐 주었다. 입술에 살짝 연한 미소를 올렸다.

“어디가 어떻게 아팠는지 모르겠지만 뭐가 안 좋았으니까…… 홀로 다락방에 두고 키우셨겠죠?”

사실 정말 사샤였을 적, 후작저에서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는 과거였기 때문에 그냥 묻어 두기로 했던 것이다.

오늘부터 미래를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후작이 저를 아픈 사람으로 만드는 말에 맞장구를 치고 넘어갔었다. 그들에게도 자신을 이제야 세상에 드러낸 이유가 필요했을 것이고.

하지만 그걸 이용해서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면, 그걸로 인해서 자신이나 카일러에게 무슨 일을 만들려고 하는 거라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디에나와 사샤의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는 표정을 정말 잘 컨트롤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그냥 바라보기만 해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눈동자가 조금 움직여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앉은 카일러를 향하자 얼굴 한 귀퉁이에서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아주 잠깐 그 표정 때문에 흔들리는 걸 느꼈다. 저 사람이 카일러를 향한 마음이…… 너무 진짜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고 황후의 자리를 놓지도 못하고 있는 여자에게 카일러를 넘겨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마음의 크기를 비교할 게 아니다. 내가 이렇게 하고 있는 건 내 살길 찾는 것도 있지만 작위가 높은 것과 싸움 잘하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가, 그럼에도 제게 다정한 그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싶은 마음이 생겼으니까.

저 여자가 아무리 그를 사랑한다고 해 봐야, 그게 그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지금은 전혀 아프지 않으니까 괜찮아요. 걱정 감사합니다. 카일러가 절 잘 챙겨 줘서 괜찮아요. ……아, 이렇게 부르면 안 되나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정면에 앉은 부인에게 대답을 하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당황하는 모습이 매우 사랑스러워 보였다.

“아니에요. 이름 부르는 게 어때서? 보기 좋아요. 다만…….”

곁에 앉은 부인들이 앞다투어 괜찮다고 말을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황후가 아니라 카일러의 눈치를 보았다. 그를 흘끔 바라보며 반응을 살피는 것이…….

의미를 알 수 없어 카일러를 보았다가 정면의 그 부인을 다시 바라보자 정면에서 눈이 마주친 죄로 그 부인이 대답을 해 줘야 하는 임무를 지어 버렸다.

“호호…… 아니이, 저 이그노트 공작님께서 이렇게 다정한 호칭을 허락했다는 게 신기해서 말이에요.”

“아아…….”

리액션은 마치 이해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목소리가 수그러드는 게 뭔가 석연치 않다는 반응이었다. 그러고는 카일러를 올려다보는 사샤의 입가에 다시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 만찬은 부인들이 대화를 많이 나누는 시간이었군. 새로 이그노트 공작부인이 와 주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군. 다음에는 초대장을 함께 보내야 하겠어.”

황제가 이 자리를 마무리하는 말을 꺼냈다. 황후는 그의 말엔 첨언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는 건 곧 일어나겠다는 뜻이니까.

“감사합니다, 폐하. 공작님께서 힘들 때엔 제가 자리를 채우도록 하겠습니다.”

초반에 이야기 나눴던 부분까지 살뜰하게 챙겨 대꾸하는 사샤를 곁의 귀족들이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처연한 듯하면서도 황제 앞에서 당당한 여인의 모습은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받아들이는 황제가 아무렇지 않게 하하 웃어넘기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다. 아무래도 이그노트가의 사람이라고 인정을 했던 것일까.

이그노트라 하면 제국을 무력으로 지켜 주는 역할을 해 왔기 때문에 대대로 수호 가문이라는 명성을 이어 온 곳이었다. 황제의 입장에서 그런 가문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지만 특히나 리디안과 카일러는 나이가 비슷해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랐기 때문에 거의 친우나 다름없었다.

그 친우에 대한 예우가 그의 부인에게로 이어지는 것을 보자 확실히 귀족들의 그녀를 보는 눈빛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럼 우리는 먼저 일어나겠다. 차도 마련해 두었으니 원하는 대로 돌아가도록.”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말하자 황후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족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자 황제는 카일러와 사샤에게 한 번 더 시선을 준 뒤 바로 뒤돌아 연회장을 나섰다.

미디에나는 미련 가득한 얼굴로 카일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황제에게 향했던 시선을 돌려 바로 사샤를 바라볼 뿐 다른 곳에는 전혀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녀는 거의 없는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붉은 입술을 짓씹은 그녀는 휘익 몸을 돌려 황제의 뒤를 따라 걸어 나갔다. 그 격한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귀족들은 다시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사샤도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데 문득 그에게 팔목을 잡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대답도 없이 다른 이에게 입을 열었다.

“우리도 이만 일어나지. 그녀가 말한 대로 내가 좀 피곤해서.”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그녀를 제대로 일으켰다. 그러고는 그녀의 팔과 자신의 팔을 엮어 팔짱을 끼게 만들고는 친히 에스코트해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황제와 황후가 나간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이들이 카일러와 사샤가 나가는 뒷모습에는 끝까지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문을 여는 것도 카일러가 했고, 사샤는 그런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올려다보고는 사뿐하게 문을 통과해 나갔다.

“와…… 사람이 저렇게 변해도 되는 건가요?”

그들이 문을 닫고 아예 나간 걸 확인한 여인이 먼저 대화의 물꼬를 텄다. 차를 준비하기 위해 시종들까지 사라진 테이블에는 이그노트 공작 내외에 대한 화제가 올라왔다.

“자기 부인이 얼마나 귀하면 저렇게 말하는 거지? 그 이그노트 공작님이 아니잖아.”

부인들만 놀라울 일이 아니었다. 귀족들도 저마다 눈길을 주고받으면서 방금 본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부인이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데도 아무렇지 않아 했잖아요. 심지어 여기는 공식적인 자리인데, 그렇게 부르는 걸…… 뭐라고 하지도 않고 말이야.”

“오히려 더 좋아하지 않았어요? 못 믿으시겠지만…… 눈이 웃고 있었어요.”

사샤의 옆에 앉아 카일러의 표정을 제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부인이 그렇게 말하자, 멀리 있어서 말로만 전해 듣던 이들은 더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 설마…… 그 사람이 여인을 보고 웃어?”

하지만 설마라고 하고 넘기기에 자신이 두 눈으로 본 것도 있었다. 계속해서 부인을 챙기고, 톡 하면 부러질 듯이 소중하게 대하는 것이 느껴졌다.

호들갑스럽지 않아도 다정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행동에 남자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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