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황제와 사샤의 시선이 가운데에 앉은 카일러에게로 향했다. 음식을 먹다가 그 시선을 느낀 그는 잠깐 씹는 것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생각을 환기하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커다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연회장의 웅장한 모습이 드러났다. 가운데로는 시야를 막는 기둥 하나 없이 넓게 공간에 펼쳐진다.
제대로 꾸미지 않았는데도 이미 넓고 아름다운 공간에 감탄하고 말았다. 이곳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연회장을 휘둘러보다 그의 시선의 끝은 당연하게도 사샤에게 향했다. 끌어당기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제국을 위해 힘써 주는 거야 짐도 당연히 알고 있으니 편의를 봐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황제는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는 카일러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다. 은근하게 시선을 던지자 그걸 보고 있던 귀족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둘째 치고, 매우 힘들고 귀찮은 일을 해 주고 있는 게 분명했으니까.
처음에는 그녀가 유난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항상 해 오던 일이었기 때문에. 그저 마물 소탕을 다녀왔을 뿐이고, 만찬이 내일일 뿐이고, 와서 밥을 먹으면 되고.
하지만 어제 대수롭지 않게 참석 의사를 밝힌 카일러에게 대뜸 화를 내던 그녀를 상기시키자면, 여기서 괜찮다고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카일러는 고개를 황제에게로 돌려 입을 열었다.
“피곤합니다.”
“허허.”
그리고 그의 감각이 바뀐 건가. 그렇게 말하고 나니 정말 몸이 뭉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은 몸이 버틸 만큼 버티고 있는 걸을 괜찮다는 말로 움직이고, 또 움직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걸 깨닫게 해 준 이가 바로 옆에서 열심히 식사도 하고 감상평도 늘어놓고 황제에게 불만을 정면으로 이야기하는 여인이었다.
제 이름을 가진 내 사람.
그것은 언제나 충성과 우정을 동등하게 주고 있는 황제와도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피곤, 피곤이라……. 좋다. 멀리 출정을 다녀왔을 시엔 만찬이든 연회든 억지로 나오지 않아도 된다.”
그의 흔쾌한 반응에 뒤에 반박할 말을 짜고 있던 사샤는 살짝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그래도 괜찮나요?”
“음. 뭐, 여기 와서 카일러가 하는 일도 없고 하니까. 괜찮지 않겠어?”
사람을 잡는 일마저도 피곤할 텐데 마물은 더할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사실 돌아보자면 정말 그랬다. 출정은 그에게 전부 맡겨 놓고 있는 상태인데, 그가 귀가 아플 때 그것을 쫓아 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게 일정하지 않고 수시로 나가는 일이 더 많다는 것도 알았다.
흔쾌하게 대답하는 황제를 보던 카일러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반란의 무리뿐 아니라 문제는 최근 더 들끓고 있는 마물이었다. 제국에의 위협은 다양하니까 한 가지를 처리한다고 해도 그의 귀가 편안한 날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심지어 자연재해가 올 때의 소음이라면 난감했다. 약간 소음의 종류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어떤 식의 재해가 올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카일러 또한 자신이 통제할 수 없고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에 황제의 부름에는 응하고 있었다.
그래서…… 얼른 돌아오고 싶었다. 사흘에 한 번씩 단 세 번뿐이었는데, 이렇게나 필요하다고 느끼게 될지 생각도 못 했었다.
그나마 시간의 여유가 생기고 나자 그녀에게 붙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서 다행이었다.
“오늘은 그럼 점심 만찬까지만 하는 것으로 하고 다들 쉴 수 있도록 자리는 좀 무르는 것으로 할까?”
“폐하……!”
황후는 그의 결단에 화들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만찬의 자리는 귀족들은 하나하나 두루두루 살펴보기 위한 자리였다. 누구와 함께 앉는지,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자신의 말에 의견을 올리는 사람은 누구인지.
그런 자리에서 카일러는 무게를 잡아 주거나 역으로 겁을 주는 역할을 했다. 이 자리에서 바보같이 극명한 반응을 보이려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 앞에서 간혹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알아내려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황제의 권위를 보여 주는 자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오늘 황제는 흔쾌히 놓아주었다. 주섬주섬 일어날 준비를 하는 그의 모습에 놀라는 황후를, 리디안은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문제는 많았다. 그게 황후 입장에서의 문제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사실 이런 자리가 아니면 저 남자를 볼 수가 없었다. 둘이서 마주칠 수 있는 일은 애초에 만들지를 않기 때문에 연회나 만찬같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만 그에게 말을 걸거나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횟수를 줄인다면 어떻게 되겠느냔 말이다.
“오, 이거 좋아해요? 이거 나도 좋아하는데.”
안 그래도 지금 그가 일어나 나가 버릴까 초조한데 옆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디에나가 서서히 시선을 내렸다.
사샤가 카일러를 향해 소곤거리며 말을 거는 모습에 미디에나의 눈빛이 나주 날카로워졌다. 무릇 비슷하다고 말할 만한 것은 없었지만 뭔가 그 분위기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는…… 카일러는 원래 이런 남자가 아니었다.
언제나 냉철한 얼굴로 다른 이의 접근을 차단한 채 지내는 외로운 늑대 같은 사람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오는 영애들은 그 차가운 반응에 혼자 상처받기 일쑤였고, 사실 남자들도 그에게 선뜻 친분을 논할 만큼 편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그게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제가 갖지 못하는 남자였지만, 그 어느 누구도 탐낼 수 없는 남자이기도 했으니까.
저처럼 말을 간단하게 걸 수 있는 정도만 되는 것이지, 이제 자신도 못하게 된 바에……는 아무도 할 수 없어야 했다.
그렇게 가질 수 없는 남자의 표본이었던, 그래서 더더욱 직접 마음을 전하지 않아도 내 안에 남자로 둘 수 있을 것 같은 그 것이 좋았던 거였다.
그런데…… 그런 남자를 빼앗겨 버렸다. 저 어디서 온지도 모를 이상한 여자 때문에.
“……그럼 이건 먹어라.”
“달라고 한 거 아니에요. 빨리 먹어요.”
계속되는 대화에 미디에나의 눈길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사실 동생이라는 이베른 영애와 비교했을 때 솔직하게 동생보다는 언니 쪽이 조금 더…… 우아한 느낌이 들었다. 저 반짝이는 눈빛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빛나는 것이 퍽 인상 깊었으니까.
우아한 외형과 다르게 발랄한 느낌이 그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부드러운 눈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는 카일러를 보고 있자니 그 생각마저 틀렸다는 것을 알고는 충격을 받아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자신의 부인에게만 보여 주고 있는 저 부드럽고 한결 풀어진 것 같은 얼굴이 그에게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것도 매우 충격적이었다.
“문제는요……. 아무, 문제, 없습니다.”
미디에나는 분함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황제의 질문에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황제 쪽은 바라보지도 않은 채였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한쪽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은 황제는 반대편의 귀족과 이야기를 나누며 벌써 다음 귀족 회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벌써 다 먹었나.”
그때 미디에나의 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저 울림은 그녀가 알고 있는 소리가 맞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다정하게 들리는 것일까.
아까는 자기 생각에 빠져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만으로도 화가 났는데…… 자세히 들어 보니 평소와 같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제는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도 눈썹이 팔자를 그리며 늘어지는 것도 막을 수가 없었다.
“네. 다 먹었어요. 여기 음식 진짜 맛있네요. 역시나 황궁의 요리사이려나요?”
그리고 생기 있는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까지…… 그 모습이 모두 아름다워 보여서 사실은 너무…… 화가 났다. 어떻게 하면 저 자리에 제가 있을 수 있을까 집중하던 때를 지나 포기하고 그저 비어 있던 자리를 제 것인 양 생각하고 있었는데…….
순간 미디에나의 눈동자가 화륵 불타오를 정도로 질투에 짙게 물이 들어 버렸다.
“사이좋은 척 연기하는 게 매우 수준급이시군요, 부인.”
미디에나는 기어이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뒷수습도 본인의 몫이 되겠지만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펴던 그 아이를 이용할 수 있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물은 흐려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지난번 엘리나의 연기를 보고 난 후 확실하게 흔들리는 영애가 하나 있었다.
그것이 목적이었다. 조금이라도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는 것, 그 사람이 밖으로 나가 조금이라도 이 이야기를 퍼뜨려 주는 것.
지금 당장은 뒤로 소문이 조금 퍼진 듯해도 아직 유효한 반응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조금 의외였다. 확실하게 넘어간 영애가 제대로 얘기를 했을 것 같은데, 뭔가 막고 있는 듯이 쉬쉬하며 몇몇에게서만 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원래 소문이란 그렇게 하찮은 것에서 시작한다. 의심이 크기를 키우고 더 퍼지게 만드는 법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지금 이 순간을 그냥 보내면 화가 병이 될 것만 같았다.
갑자기 나온 말에 어리둥절해진 사샤는 두 사람 너머의 황후를 바라보았다. 제게 한 말이 맞나 싶을 정도로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다르게 말해 그녀가 시비를 걸 만한 사람도 저밖에 없었다.
“혹시 제게 말씀하신 걸까요, 황후 폐하?”
사샤는 그렇게 물었다. 설마 이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은 아니겠지. 엘리나도 없는데?
하지만 그녀가 저렇게 꺼낼 말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싶었지만…… 이미 저 앞의 여자가 상식적이지 않은 여자였다. 사샤는 약간의 긴장을 담은 손으로 물컵의 손잡이를 꼭 잡았다.
그리고 식탁 아래 숨겨진 그녀의 왼손은 그가 꽉 잡아 주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손은 내내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