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황궁에는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해가 점점 중천으로 떠오르는 때에 황궁 연회장은 사람들로 조금씩 북적대기 시작했다.
연회장은 춤을 추기 위한 세팅이 아닌 식사를 위한 커다란 테이블이 자리해 있었다.
끝과 끝이 어마어마한 길이로 테이블을 이어 놓은 자리에는 각종 꽃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고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고 앉기 시작했다.
“만찬에는 나오실까?”
“항상 나오셨잖아. 오늘도 오시겠지.”
“혹을 달고? 그냥 혼자 나오시면 좋겠는데, 그럴 리는 없겠지?”
“내가 알기로 이그노트 공작님만 초대하신 걸로 알아요.”
“어머, 그건 어디서 들으신 거예요?”
자리를 잡고 앉기 전 귀족 부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속삭이며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의 공통 관심사인지 한 명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거기에 한 명이 붙고 또 한 명의 귀가 기울여지며 점점 이야기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귀족들이 입장하고 있는 연회장 정문이 아닌 저 뒤쪽의 커다란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황제와 황후가 나타났다.
황제는 가벼운 발걸음을 움직여 곧장 자신의 자리로 향해 걸어갔고 그보다 보폭이 좁은 황후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다가 입구 쪽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여인들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쉿, 오셨어.”
“어머.”
뒤늦게 그들의 등장을 알아챈 여인들이 입을 합 다물고는 조용히 움직여 각자의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그 소란스러운 틈을 탄 것처럼 안으로 들어오는 젊은 귀족 내외가 있었다.
“오…… 되게 멋있네요.”
“조심, 여기 턱이 있다.”
“고마워요. 근데 나도 잘 보여요.”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며 들어오는 그들은 마치 교외에 잠깐 소풍을 나온 듯한 힘주지 않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황궁 나들이를 위해 한껏 힘준 귀족과 귀족 부인들은 그들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연회장에 나타나 당당하게 황제의 바로 옆 두 자리로 걸어오는 이들은 카일러와 사샤 이그노트 공작 내외였다.
그들이 놀란 것은 우선 카일러였다. 이그노트 공작이라고 하면 걸어 지나가면 그곳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차가운 표정에 눈빛을 가진 남자였다.
실제로 말수도 적고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듯한 날카로운 느낌이 강렬한 남자였다. 실제 신체적으로도 대부분의 남자는 쉽게 압도했고, 압도하는 외모 속에서 표정은 또 하나도 없는 것이 더 그를 무섭게 느끼게 만들었다.
“어머나…… 제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맞나요?”
가운데 자리이자 황제의 건너편 자리에 앉아 그가 정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던 귀족 부인이 그렇게 속삭이는 말이 시작이었다. 침묵으로 가라앉았던 테이블에 소곤거림이 퍼지기 시작했다.
“아니, 저 자리로 가는 걸 보면 분명히 이그노트 공작님인데……? 맞는데……?”
“아니…… 근데 저렇게 여인이랑 대화를 한다고요?”
“표정도 봐요. 매일 얼음장같이 차갑기만 하던 얼굴이 아니에요.”
“그냥 대화만 하는 게 아니에요. 느낌 보여요? 어쩜…….”
부인들이 저들끼리 충격적인 장면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 카일러는 황제의 옆자리에 서서는 자신과 동행한 여인에게 의자를 빼 주고 있었다.
오, 하면서 놀란 듯한 반응을 보이다 생긋 웃은 여인이 자리를 잡고 앉자 그는 그제야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부인들은 거의 대부분 저도 모르게 턱이 빠지도록 입을 벌리거나 그 벌어지려는 입을 가리기 위해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녀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보고 있든 신경도 쓰지 않는 듯안 그 공작 내외는 자리를 잡자마자 황제와 황후에게로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함께 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군.”
웃음기 머금은 황제가 그렇게 인사를 꺼냈다. 씨익 웃는 그의 눈웃음을 보고 있던 사샤는 뚱해지려는 표정을 감췄다. 카일러는 그저 그렇게 됐습니다, 하는 말만 남긴 채 다시 고개를 황제가 있는 쪽에서 스윽 사샤가 있는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
“오랜만이군요, 카일러. 마물 사냥은 순조로웠나요?”
황제의 옆, 그러니까 황후 미디에나가 카일러에게 말을 건넨 것이다.
양끝 먼 곳에서 울리고 있는 소곤거림은 이어지고 있었지만 황제와 황후의 근처는 분위기가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황후가, 황제 너머에 앉은 이그노트 공작에게만 따로 말을 건 것이었다. 그것도 친근하게 안부를 물으며, 이름을 부르며.
황제의 웃는 얼굴도 카일러의 냉담한 얼굴도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의 그러한 공기의 변화는 사샤에게 고스란히 닿았다.
“마물 사냥은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불과 어제, 돌아오셨어요.”
대답하는 것은 사샤였다. 카일러가 입술을 꾹 다무는 모습을 보고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눈웃음으로 가려진 황제의 눈동자가 반짝이며 그녀를 향했다. 사샤라는 여인은 당돌하게도 황후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네가 무슨 의도로 말을 거는 것인지 안다는 듯이.
“아, 그런가요.”
황후는 뭔가 말을 꺼낼 것처럼 머뭇거리더니, 결국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쪽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그녀들의 기 싸움에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눈알 도르륵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자, 오늘도 자리에 함께해 준 그대들에게 감사하는 바이다. 이렇게 우리끼리의 사이를 돈독하게 해야 제국도 원만하게 굴러갈 수 있지 않겠는가. 응? 오늘도 맛있는 점심 나누면서 서로 대화 잘 나눠 보도록 하지.”
황제의 한마디는 언제나처럼 간단했다. 허세가 있거나 멋 부리는 말이 쓰이지도 않았고, 편안히 친구를 초대한 것처럼 대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어느새 뒤로 와 있던 시종과 시녀들이 바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움직임에 따라 테이블에 늘어서 앉은 귀족들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황실의 음식이야 말할 것도 없이 고급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흥밋거리 넘치는 이그노트 부부가 있어서 모두 거기에만 집중하고 있는 듯했다.
“음식이 참 맛있네요.”
사샤는 천천히 음식을 음미하며 맛을 봤다. 전부 다 먹기 시작하면서 열심히 두세 입마다 클리어를 해 나가면서 음식들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공작부인은 어떻게 이 자리에 나온 건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음식들을 대충 올리고 있던 리디안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가 말을 꺼냈다.
마치 말을 걸기 위해 호시탐탐 놀았던 기회를 노린 것처럼. 사샤가 먹던 음식을 내려놓고 입에 든 것을 모두 삼킨 다음에야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오히려 그녀의 표정에 피싯 웃음을 흘릴 뻔했다. 이렇게 흘기듯 노려보는 반응이 여느 또래와 같은 영애 같았다.
“카일……, 아니 공작님께서 매우 피곤해하실 것 같아서요.”
“뭐? 그래? 카일러가 하루 만에 그 피로를 싹 떨치지 못했다는 이야기인가? 호오 놀라운 일이군.”
황제는 역시 널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계획을 아주 잔망스럽게 밀어붙여 버렸다. 어디서 카일러를 로봇을 만들려고! 왠지 모르게 황제의 앞에서는 뭔가 불타오르는 느낌으로 노려봤다.
“마물 소탕이 엄청나게 어려움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두 번이나 마물 소탕을 다녀 온 지라 하루 만에 황궁으로 불려오니 피로를 제대로 풀지 못해 염려스럽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런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기에 사샤는 제법 당당한 목소리를 내는 대신 부정적인 느낌이 들지 않게 말을 꺼냈다.
“호오. 카일러, 그대 지금 피곤한가? 그럼 진작에 말을 하지. 만찬에 나오는 것을 고려해 보았을 텐데.”
황제의 떠보는 질문에도 카일러는 허투루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그저 묵묵하게 입을 움직이며 눈앞에 있는 음식을 먹을 뿐이었다.
“말리는데도, 쉬어야 한다고 말하는데도 꼭 이 자리에 나오겠다는 그를 따라 같이 나왔습니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저렇게 음식 외의 것으로 볼을 부풀리고 있는 것인지 황제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저렇게 여린 여인이 자신을 향해 불만을 있는 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왠지 귀여워 보이고 있었다.
“어디, 황제께 감히…….”
그때 이를 듣고 있던 황후가 언성을 높이려 말을 꺼내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곁에서 듣고 있느라 심장이 조여들 것 같은 귀족들이 한껏 긴장을 타고 있을 때였다.
그 낌새를 알아챈 이들이 황후의 불벼락이 떨어질 것을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사이, 그녀를 막은 것은 황제였다.
“그가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구나.”
황제는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이에 있는 이 덩치 큰 공작 놈이 방해였지만 열심히 불만을 토로하는 그녀도 살짝 상체를 숙인 편이어서 아주 잘 보였다.
“그럼, 어떻게 그걸 안 쉬고 배깁니까? 마물들 한 번 베어선 죽지도 않는다면서요. 막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찌르고 베고 쑤셔 대……. 아, 죄송합니다. 아직 식사 중이지요.”
사샤는 막 달려 나갈 것 같은 말을 잠시 멈추고 거칠 어휘 선택을 하려던 것을 무마시킨 채 가볍게 사과의 말을 돌렸다. 주변에 있는 이들과 슬쩍 눈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기 다녀오는 것만 해도 며칠씩이나 걸리는데 거기다가 마물 소탕도 하고…… 얼마나 힘들겠어요. 예? 황제 폐하께서는 가능하신 일인가요?”
“아니, 짐은 할 수가 없네.”
“그것 보세요. 그렇죠? 쉬어야 한다고요.”
여유로운 황제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은 다른 이들이 보기엔 경악 그 자체였다.
특히나 옆에 앉은 황후는 자꾸 휘둥그레지려는 눈에 힘을 주고 벌어지려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음……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내게 보고를 하고 다니는 편이 아니라서 말이야.”
황제의 제안에 사샤는 잠깐 멈칫했다. 결국 움직이는 사람이 어떻게 할 건지를 알아야 하는데.